오디세이 ㅣ 메이트북스 클래식 32
호메로스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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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노란 바탕 위에 흑백 흉상 하나. 표지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쪽의 책입니다. 위쪽 절반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고 아래쪽은 형광에 가까운 노란색이 화면을 가득 채워요. 고전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무게와 서점 평대에서 바로 눈에 걸리는 선명함이 한 장에 같이 들어 있습니다. 하단에 굵게 박힌 두 줄 가운데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끝까지 살아남는다"라는 문구가 이 판본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크기도 두께도 평범해서 손에 들었을 때 부담이 없었어요. 완역본을 앞에 두면 먼저 드는 망설임이 분량인데, 이 도서는 그 문턱을 낮추는 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편역본이라고 해서 유명한 모험만 골라 이어 붙인 판본은 아닙니다. 원작의 24권 체제를 그대로 두고 권마다 '마침내 시작된 오디세우스의 귀향' '트로이의 노래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처럼 내용을 짚어주는 제목을 달았고, 각 권 안에서도 번호가 붙은 절로 나뉘어 있어서 긴 이야기를 따라가다 길을 잃을 일이 적습니다. 본문 앞에는 트로이 전쟁부터 작품이 시작되는 시점까지의 배경 설명과 등장인물 사전이 붙어 있고, 암브로시아나 스틱스강처럼 설명이 필요한 개념에는 영문을 병기하고 옮긴이 주를 답니다. 파이아케스 궁전에서 음유시인이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의 다툼을 노래하는 장면에는, 이것이 <일리아스> 첫머리의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갈등과는 다른 사건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어요. 독자가 헷갈릴 자리를 미리 알고 손을 쓴 흔적입니다.


읽는 동안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을 떠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섬은 불멸의 신이 보아도 기뻐할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됩니다. 향기로운 나무가 타는 동굴, 포도송이가 달린 입구, 네 방향으로 흐르는 샘. 그런데 정작 그는 동굴에 없고 바닷가 바위에 앉아 있습니다. 낮이면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밤에만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잡니다.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은 사람이 왜 거절하는지, 그의 대답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아내가 여신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먼저 인정하고 나서 이렇게 말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보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이긴 쪽을 고른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다음이 저에게는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결심 뒤에 이어지는 것이 감격이 아니라 작업입니다. 청동 도끼와 자귀와 송곳을 받아 나무 스무 그루를 베고, 구멍을 뚫어 못과 이음새로 잇고, 가장자리에 기둥을 세워 판자를 올리고 파도막이를 두릅니다. 나흘 동안 일한 끝에 닷새째에 떠납니다. 바다에서는 큰곰자리를 왼쪽에 두라는 조언을 따라 별을 보며 방향을 잡고 열이레를 잠들지 않고 건너갑니다.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도구와 일정과 별자리로 번역되는 이 과정이, 저는 신화적인 장면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그 뗏목은 부서집니다. 폭풍 속에서 그가 내뱉는 혼잣말이 오래 남았어요. 차라리 트로이에서 죽었더라면 장례도 받고 명예도 얻었을 텐데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바다에서 비참하게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귀향을 택한 사람이 명예로운 죽음을 아쉬워하는 소리를 감추지 않고 적어둔 서술이라, 인물이 갑자기 사람 크기로 내려옵니다. 이틀 밤낮을 떠돌다 육지를 발견하는 순간의 비유도 마찬가지예요. 병으로 오래 누워 있던 아버지가 다시 건강을 되찾았을 때 자식들이 기뻐하듯, 그가 숲과 육지를 보고 기뻐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괴물과 신들 사이를 지나온 이야기에 가장 평범한 가족의 안도를 끌어다 붙인 문장입니다.


파이아케스 사람들의 섬에서는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왕은 이 낯선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한 뒤에, 그러고도 먼저 배와 노잡이를 준비시킵니다.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 돕는 순서가 아닙니다. 잔치 자리에서 음유시인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자 오디세우스는 겉옷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웁니다. 자기 이름이 이미 남들의 노래가 되어 있는 사람이, 그 노래 앞에서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장면이에요. 노래가 멈추면 눈물을 닦고 옷을 내리고, 다시 시작되면 또 가립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직 곁에 앉아 있던 왕만 그 깊은 한숨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왕은 이유를 캐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제 밖으로 나가 경기를 하자고 화제를 돌려 그 자리에서 손님을 빼내줍니다. 위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이 오래된 이야기가 알려주는 방식이 이렇게 조용합니다. 배웅하는 대목에서 왕비가 선물 상자의 매듭을 단단히 묶으라고, 잠든 사이 누가 열어 훔쳐가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는 것도 같은 결로 읽혔어요. 좋은 것을 내주면서 세상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까지 알려주는 어른의 말투입니다.


저승으로 내려가는 권은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졌습니다. 태양이 뜰 때도 질 때도 비추지 않는 땅에서 그는 제물의 피를 앞에 두고 칼을 들고 서 있습니다. 어머니의 혼이 나타나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말을 걸지 못하는데, 예언자를 먼저 만나야 하니 어머니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마음이 무너졌다고 적어놓고도 칼을 내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뒤에 어머니는 자신이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걱정이 목숨을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세 번이나 팔을 벌려 안으려 했지만 세 번 모두 혼이 그림자처럼 빠져나가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서둘러 빛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거라." 만남을 붙잡지 말고 돌아가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전하라는 뜻입니다.


같은 권에서 밝혀지는 아버지 쪽 소식도 걸렸습니다. 라에르테스가 도시로 내려오지 않고 시골에 머물며, 겨울이면 불 가까이 재 위에서 거친 옷을 입고 자고 여름에는 포도밭에 떨어진 잎을 모아 잠자리를 만든다는 대목이에요. 앞서 오디세우스가 낙엽을 끌어모아 몸을 덮고 잠들던 장면이 그대로 겹칩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모르는 채로 같은 자리에 누워 있었던 셈입니다. 부모 세대를 배웅하는 나이가 되면 이 배치가 다르게 읽힐 것 같아요.


예언자가 알려주는 그의 마지막도 뜻밖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전사가 아니라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아주 평온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그 전에 구혼자들을 정리한 뒤 노 하나를 메고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의 땅까지 다시 떠나야 한다는 명령이 붙어요. 누군가 그 노를 보고 곡식을 까부르는 키라고 부르면 그곳에서 멈추라는 것입니다. 도착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숨기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한 군데는 갸웃했습니다. 어머니의 혼이 팔 사이로 빠져나간 이야기를 막 끝낸 직후에, 오디세우스가 선물을 더 마련해준다면 한 해를 더 머물러도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고, 빈손보다 재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편이 고향에서 더 존경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앞에서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닷가에서 울던 사람이라 낙차가 컸어요. 고대의 환대와 선물 관습에서는 자연스러운 계산이었을 텐데, 편역본 본문만으로는 그 사정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아서 저 같은 독자에게는 숙제로 남았습니다. 이런 자리에 옮긴이 주가 한 줄 더 붙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소식을 통해 이 이름을 처음 들은 분이라면 원작의 뼈대를 확인하는 입구로 쓸 만합니다. 출판사 소개에는 2026년 여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이 기획의 배경으로 적혀 있는데, 화면으로 본 장면들이 책에서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지 따라가 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완역본을 두 번쯤 시작했다가 접어둔 경험이 있는 쪽에도 권하고 싶습니다. 고전을 읽었다는 느낌까지 줄어들지는 않게 만들겠다는 것이 엮은이의 원칙이었다고 하는데, 그 약속은 지켜진 편입니다.


해가 눈에 띄게 짧아지는 9월입니다. 저녁 공기가 서늘해지는 이 시기에 귀향 이야기를 읽으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오래 버티게 하는지 조금 더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2800년 전 사람도 결국 같은 것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어요. 서평단으로 만난 책 가운데 고전은 늘 완독을 걱정하게 되는데, 이 한 권은 마지막 장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불멸을 마다하고 뗏목을 깎아 집으로 향한 사람의 이야기. 2800년 된 귀향의 원형을 완독 가능한 두께로 만난 편역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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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의 기술 - 한국 추리소설 작가 5인이 말하는
김이환 외 지음 / 알파미디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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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밤빛 남색 바탕에 이층집 한 채가 서 있고, 창이 다섯 개인데 그 안에 사람이 하나씩 앉아 있어요. 누군가는 책을 펼쳤고, 누군가는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현관 위에 작은 등이 켜져 있고요. 추리소설을 다루는 책이면 서늘한 그림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 집은 오히려 누군가를 기다리는 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밤에도 불을 끄지 않은 집이라는 인상이었어요. 다 읽고 나서야 그 다섯 개의 창이 다섯 명의 필자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한국 추리소설 작가 5인이 말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의 기술>은 김이환, 박상민, 전건우, 정명섭, 조동신 다섯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세계를 캐릭터와 주제별로 나눠 읽어낸 책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평범해서 들고 읽기에 부담이 없었고, 비평서라기보다 동료 작가 다섯 명의 이야기를 차례로 듣는 자리처럼 편안했습니다.


표지 띠에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 한이 작가의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미스터리를 정의하는 형식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작가는 없다, 우리가 여전히 히가시노 게이고에 열광하는 이유다. 프롤로그에서 그 이야기를 풀어주는데,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가 풀려도 범인이 특정되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 밝혀져도 동기가 저절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 세 겹의 질문이 책 전체의 뼈대가 됩니다.




가가 쿄이치로 시리즈를 다룬 장에서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필자는 추리소설의 오래된 문법을 먼저 짚습니다. 형사와 탐정은 범인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고, 독자의 시선은 그들의 시선과 완벽히 겹쳐진다는 것. 홈즈의 관찰력이든 푸아로의 회색 뇌세포든 결국 '어떻게 범인을 잡는가'라는 질문을 향해 달린다는 정리인데, 가가는 처음부터 다른 질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한다고 씁니다. 이 사건 주변의 사람들은 지금 어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가. 그 질문은 훨씬 오래 걸리고 소모적이고, 때로는 검거라는 목표와도 어긋납니다. 필자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어긋남'이라 부른다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 장을 읽으며 오래 남은 문장은 두 개였습니다. "그는 형사이기 이전에 인간이었고, 수사관이기 이전에 이웃이었다." 그리고 "'왜 떠났는가'라는 질문은 그의 가장 오래된 수사였고, 그 질문이 형사로서의 그를 완성시켰다." 가가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일 때 집을 떠나 연고 없는 센다이로 갔고,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가 텅 비어 버렸다는 대목에서, 이 시리즈가 왜 사건보다 사람의 사정을 오래 들여다보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필자는 범인을 잡는 일이 수사의 결과일 뿐 목적은 아니라고 적습니다. 목적은 사건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왜 이 상황에 처했는지를 밝히는 쪽에 있다고요.


솔직히 갸웃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가가의 내면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대목은 다소 도식적으로 읽혔어요. 한 인물의 평생을 어머니의 부재 하나로 정리해도 되는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필자 스스로도 우연히 완성된 설정일 수도 있고 정교하게 짜여진 것일 수도 있다며 한 발 물러서 두었고,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신뢰를 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아버지를 잃은 경험을 짧게 꺼내놓은 대목도 그렇습니다. 비평서에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위험한데, 그 한 문단이 있어서 캐릭터의 개연성을 따지는 뒤의 논지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다룬 장은 결이 가장 단단했습니다. <방황하는 칼날>을 붙잡고 한 절을 통째로 씁니다. 소년범죄와 소년법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낡지 않는 주제라는 전제로 시작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책임까지 가벼워져도 되는지, 가해자의 미래를 보호하는 동안 피해자와 유족의 삶은 누가 책임지는지를 나란히 놓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자기 자리를 감추지 않습니다. 교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원칙이 유족에게는 또 다른 형벌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고, 머리로는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감정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간극이 늘 남았다고 적습니다. 저도 뉴스를 보며 비슷한 자리에서 오래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독자를 정면으로 겨냥한 대목이 이어집니다. <소년심판>이나 <더 글로리> 같은 작품이 왜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짚으면서,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법이 악인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누군가 대신 심판해주기를 바란다고 진단합니다. 사적 제재물이 그 위험한 욕망을 건드린다는 것. 그런데 <방황하는 칼날>에는 그런 안전한 쾌감이 없다고 못 박습니다. 소설은 딸을 잃은 아버지에게 가해 소년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결론 내리지 않고, 사적 제재를 정의의 대안으로 제시하지도 않으며, 법이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을 때 한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그려낼 뿐이라고요.


제목 해석이 이 장의 정점이었습니다. 방황하는 칼날은 아버지가 든 총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처벌하면서도 보호해야 하는 법, 그 법을 집행하면서도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경찰, 복수를 잘못이라 여기면서도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독자까지 모두 방향을 잃은 칼날이라는 것. 법은 존재하지만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정의를 바라는 마음은 있으나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정하지 못한다는 문장에서 잠시 손을 멈췄습니다. 소설이 봉합해주지 않는 불편함을 그대로 두는 편이 주제에 더 어울린다는 필자의 판단에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영화판들이 총에 실탄을 비워둔 선택은 관객의 마음을 배려한 것이겠지만, 원작의 결말이 남기는 참담함 쪽이 이 이야기의 몫이라는 이야기였어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해부하는 장은 온도가 또 다릅니다. 여기서는 감상보다 설계도를 읽습니다. 옴니버스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편의 구조적 완성도에 무게를 둔 작품이라며, 세 번째 에피소드가 기와 승에서 전과 결로 넘어가는 포석을 어떻게 놓았는지 따라갑니다. 편지가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 왜 쓰기 어려운지, 편지에 대사를 넣으면 읽는 감흥이 어떻게 떨어지는지 같은 이야기는 창작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관찰이라 흥미로웠습니다. 좀비 영화의 설명량이 줄어든 과정이나 웹소설의 회빙환 관행을 끌어와 장르가 발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대목도 체감이 잘 됐습니다. 힐링 소설을 두고 그냥 쉽게 읽히는 글 아니냐는 평을 반박하면서, 쉽게 읽힌다고 쓰기도 쉬운 건 아니라고 적은 문장은 위로처럼 읽혔어요. 예술 작품이면서 상품이기도 한 것의 숙명이라는 말로 스스로 균형을 잡는 태도도 좋았습니다.



그 장에서 가장 마음이 놓인 대목은 태어났기 때문에 삶은 가치 있다는 잡화점 주인의 대답이었습니다.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도 행복할 수 있을지를 묻는 편지 앞에서,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도 마침내 동의하는데, 필자는 그가 그냥 아버지 말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변했기 때문에 기적이 가능했다고 짚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먹고 오래 고민하면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문장이, 이 책에서 제가 접어둔 자리 중 하나입니다.


아쉬움도 적어둡니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세상을 떠난 뒤 빠르게 묶인 헌사의 성격이 강해서, 작품별 완성도의 높낮이를 따지는 냉정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100권이 넘는 다작 가운데 실패한 시도나 반복된 패턴도 분명 있었을 텐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진 느낌이었어요. 다섯 사람의 온도 차가 큰 것도 처음에는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읽어갈수록 그게 장점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은 상처에서 사람을 읽고, 한 사람은 제도와 감정의 간극에서 윤리를 읽고, 한 사람은 설계도에서 기술을 읽습니다. 같은 작가를 두고 다섯 개의 창이 각각 다른 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어왔지만, 읽은 적 있다고 생각했던 작가를 다시 꺼내 보게 만든 책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난 7월 세상을 떠났고, 이 책은 그 직후에 나왔습니다. 추리소설 입문자에게는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려주는 지침이 되겠고, 이미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어온 사람에게는 자기 감상을 언어로 정리해주는 거울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소설을 써보려는 사람이라면 다섯 작가가 흘리듯 적어놓은 실무의 고민들을 놓치지 않으실 듯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자리입니다. 낮은 아직 여름 끝을 붙잡고 있는데 해가 지고 나면 공기가 먼저 달라지는 시기죠. 표지의 집처럼 창마다 불이 켜지는 저녁이 길어지는 계절에, 사람의 사정을 오래 들여다보는 책 한 권이 옆에 있으면 그 저녁이 조금 덜 서늘해집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시 읽을 구실이 필요하다면 이 책이 그 구실을 충분히 해줄 거예요.


트릭을 파헤치는 책이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끝까지 사람의 사정을 놓지 않았는지를 동료 작가 다섯 명의 목소리로 확인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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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불안을 이기는가 - 고요한 행복에 이르는 에피쿠로스의 지혜
박은미 지음 / 서사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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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붉은 배경 한가운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손에 묻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붉은 옷과 청록의 배경이 서로를 밀어내는데 정작 제목 글씨는 차분한 회청색으로 눌려 있어요. 불안을 감추지 않고 화면 정면에 세워둔 다음, 그것을 다루는 말은 낮은 목소리로 하겠다는 태도.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인상이 그랬고, 다 읽고 나서도 그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철학은 어떻게 불안을 이기는가>는 에피쿠로스가 남긴 백이십여 개의 구절 가운데 스물다섯 개쯤을 골라 오늘의 말로 풀어낸 책입니다. 손에 들면 한 손에 잡히는 판형에 두께도 적당해서, 진도에 부담이 없습니다. 저자 박은미는 철학박사이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철학'을 모토로 활동해온 철학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문장에서 그 이력이 그대로 만져집니다. 개념어를 쌓아 올리는 대신 말을 걸듯 씁니다. 각 편 끝에는 질문 한 줄이 놓여 있어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잃기 싫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 식입니다.


가장 먼저 발목이 잡힌 대목은 2장의 '부재'였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좋아지는 것에는 쉽게 적응하지만 나빠지는 것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불행해지기 쉬운 이유를 찾습니다. 좋아지는 쪽은 적응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익숙해지니 좋은 줄을 모르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있을 때는 있어서 좋은 점보다 있어서 불편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없을 때는 없어서 불편한 점만 크게 보인다는 관찰이 이어집니다. 결국 곁에 없어져야 그 가치를 알게 되고, 늘 뒷북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는 말인데, 이 문장 앞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 챕터에서 저자가 꺼내는 사례가 하필 직장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취직했는데 이걸 위해 그렇게 애썼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다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저자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고 먼저 인정한 뒤에, 월급이 없어서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해보라고 권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원했던 것이었는지 잊지 않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말과 함께요. 챕터는 저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에피쿠로스의 구절로 닫힙니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무시하지 말라. 지금 누리고 있는 그것도 당신이 한 때 열망했던 것이었음을 잊지 말라."


이 책이 다독임에만 기울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챕터, '인식'에서였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하는 리더가 옆에 쓴소리하는 참모를 두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역할을 자기 안에도 마련해두라고 권하는 대목이에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말한 악마의 변호인을 끌어와, 어떤 사람의 입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사람의 논리를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게 안 되면 아직 악마의 변호인을 두지 못한 것이라고요. 예측력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에 일부러 가중치를 얹으라고 조언하는데, 나를 잘 아는 친구나 인공지능에게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을 말해달라고 부탁해보라는 제안까지 나옵니다. 고대 철학서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나니 조금 웃음이 났고, 동시에 실제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자기 판단을 검토받을 자리가 줄어드는데, 이 챕터는 그 빈자리를 정확히 가리킵니다. 논의에서 패한 사람이 새로 배운 바가 많으니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에피쿠로스의 말도 여기 함께 놓여 있습니다.


책의 무게가 확 실리는 곳은 3장입니다. 저자는 죽음을 다루면서 물리학자 김상욱의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동료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돌아가신 분이 원자로는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옮기고, 그 표현이 에피쿠로스의 죽음관을 떠올리게 한다고 연결해요. 에피쿠로스에게 죽음은 원자 배열의 해체이고,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서 생기는데 죽음은 감각의 박탈이니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그 자리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탄생 이전의 비존재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의 비존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루크레티우스의 물음도 따라붙고요.


솔직히 말하면 이 논변만으로는 마음이 다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그 지점을 먼저 짚어줍니다. 에피쿠로스의 말을 다 받아들여도 지금 누리는 모든 것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슬픔을 준다고, 죽어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은 그 미래를 알고 있으니 삶의 허무가 슬픈 것이라고 적어요. 애써 모아둔 자산과 집착했던 관계와 청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 앞에서 사람이 무력해진다는 서술도 함께 나옵니다. 읽는 사람의 반론을 저자가 대신 말해주는 구성이라, 오히려 그다음 문장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다음이 이 책의 승부처입니다. 저자는 '덧없다'는 말을 한 번 더 뒤집어요. 덧없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다고, 덧없음을 허무해하는 마음조차 덧없을 수 있다고 씁니다. 지금 나를 짓누르는 허무함이며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흘리는 눈물이며 왜 나만 운이 없냐고 억울해하는 마음까지도 길어야 몇십 년 뒤면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대목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슬퍼하는 일조차 덧없기에 비로소 오늘 눈앞의 평온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그 가벼움의 정체였던 것 같아요. 불교의 방하착을 끌어와 손에 쥔 모래를 흘려보내듯 마음을 놓아버릴 때 편안해진다고 풀어내는 흐름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허무를 반박해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끝까지 통과해서 지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제목의 '이기는가'가 어떤 뜻인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에피쿠로스 본인의 임종 편지를 읽는 자리에서는 꽤 오래 시선이 멈췄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열거한 다음에 이렇게 이어지거든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나눈 철학적 대화들을 떠올리며 내 영혼이 느끼는 기쁨 덕분이지."


아타락시아를 말한 철학자가 자기 주장에 어울리는 마무리를 했다는 저자의 한마디가 과장 없이 들렸습니다. 이론을 논증으로 증명하는 대신 마지막 태도로 증명한 셈이니까요. 죽음 이후는 분명하지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지금을 놓치는 것은 분명한 손해라는 문장도 이 장 어딘가에 있습니다. 손익을 따지는 말투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실감이 컸어요.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부재' 챕터에서 밀당을 소재로 끌어온 부분은 논지에 잘 붙지만, 철학책의 결 안에서는 살짝 겉도는 느낌이 있었어요. 저자도 밀당이 전략이 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라고 인정하며 방향을 돌리니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 크게 남은 물음은 다른 쪽입니다. 덧없음을 끝까지 인정하면 해방감이 찾아온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그 해방감이 실제 상실 앞에서 얼마나 버텨주는지에 대해서는 책이 답을 아껴둡니다. 아마 답할 수 없는 영역이겠지요. 다만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그 미결의 자리였습니다. 저자의 글은 위로를 건네되 결론을 대신 내려주지는 않고, 각 편 끝의 질문으로 공을 다시 넘깁니다. 그 방식이 이 책의 성격에 맞다고 생각해요.


읽는 동안 떠오른 얼굴들이 있습니다. 성과와 평가를 기준으로 오래 판단해온 사람, 자기 결정을 검토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 부모 세대의 노년을 지켜보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 실감으로 만난 사람. 퇴직금으로 무엇을 해볼까 궁리하며 유리한 가능성만 보고 있는 이에게는 '맑은 정신의 추론'을 다룬 대목이 특히 서늘하게 읽힐 겁니다. 고대 철학이 어렵게 느껴져 미뤄두었다면, 이 한 권이 입구로 삼기에 무리가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네요.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정리하는 일이 순서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며칠을 두고 다시 펼쳤습니다. 마감을 위해 읽는 책과 저를 향해 읽게 되는 책이 다르다는 걸 알려준 한 권이었어요.


9월 중순의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슬며시 물러나는 계절이라, 있음의 가치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인간의 습성을 이야기한 이 책과 시기가 잘 맞았습니다. 창을 열어두면 바람이 한 자락 들어오는 저녁, 그 정도로도 하루가 괜찮아진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믿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덧없음을 끝까지 인정하고 지나갈 때 오늘의 평온이 손에 남는다는 것을, 에피쿠로스의 말과 저자의 담백한 문장으로 확인하게 되는 책입니다.


#철학은어떻게불안을이기는가 #박은미 #서사원 #에피쿠로스 #철학에세이 #인문에세이 #교양철학 #고대철학 #서양철학 #아타락시아 #방하착 #카르페디엠 #죽음에대하여 #평온 #불안다스리기 #자기성찰 #악마의변호인 #서평단 #북유럽카페 #책추천 #독서기록 #40대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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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표 2026-09-1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es24에서 3년간 120개 이상의 서평을 작성하며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서평을 작성하면서
책의 내용을 되새기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 신청한 책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성장하는 경험,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698572
< 사회복지사 마스터플랜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545304
< ADHD 농경사회의 사냥꾼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502390
< 운명이 건네는 호의, FAVOR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19960472
< 사무실의 도른자들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18493270
< 업스트림 >
 
딸깍! 제미나이 & 노트북 - 초보자도 AI&AX 전문가로 만들어 주는 50가지 레시피
반병현.황현목 지음 / 생능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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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초록과 흰색뿐인 표지에 김이 오르는 종이컵 하나가 큼직하게 앉아 있습니다. 뚜껑은 반쯤 열려 있고, 그 위로 붙은 빨간 스티커에는 '딸깍!' 한마디. 손글씨체로 적힌 '50가지 레시피'까지 보고 나면 기술서라는 생각보다 부엌 선반에 꽂아 두는 조리법 책 쪽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인데, 교재 판형에 두께도 과하지 않아 처음 펼칠 때 부담이 적었습니다.


반병현, 황현목 두 저자가 쓴 <딸깍! 제미나이 & 노트북>은 구글 Gemini와 Gemini Notebook을 업무에 붙여 쓰는 방법을 다룹니다. 겨냥하는 독자가 분명합니다. 서류에 파묻힌 직장인과 공무원, 그리고 AI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내놓는 바람에 한 번 실망하고 손을 뗀 사람들이죠. 앞부분은 접속과 계정, 요금제 같은 '밑준비' 열 항목으로 조용히 시작하고, 그다음부터 레시피 번호가 붙은 실습이 쭉 이어집니다.


책의 성격이 확실히 잡히는 지점은 Notebook을 소개하는 9장입니다. 참고자료를 올려 주지 않으면 대화조차 안 되는 서비스라고 먼저 선을 긋습니다. 삽화에서는 로봇이 의자에 축 늘어져 "참고자료를..주세요..."라고 중얼거리고, 팔짱 낀 담당자가 세계 1위라며 왜 아무것도 모르냐고 쏘아붙입니다. 그러다 자료가 들어가면 "순식간에 천재로 돌변합니다"라고 적어 두었어요. 지원하는 파일 형식을 네 줄 표로 빼곡하게 보여 준 다음, 종류를 외울 필요는 없다고 곧바로 정리해 버리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실무자 입장에서 정작 걸리는 대목은 그 아래 한 줄이었습니다. 한컴오피스 HWP는 인식되지 않으니 워드나 PDF로 바꿔 올려야 한다는 안내. 공공기관과 국내 기업의 문서 환경을 떠올리면 이 문장이 사실상 가장 높은 문턱입니다.


같은 챕터 끝에서 저자는 웹에서 소스를 검색해 오는 기능을 소개하자마자 되도록 쓰지 말라고 권합니다. 편리한데도 말이죠. AI가 찾아온 정보를 다시 AI에게 근거로 넘기면 이 도구를 쓰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람이 직접 검토하고 골라낸 자료를 올려야 답변이 정교해진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기능 설명서에서 갑자기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건너가는 순간입니다. 결국 도구가 좋아질수록 무엇을 읽히고 무엇을 덜어낼지 판단하는 몫은 사람에게 남는다는 뜻이겠지요.


11장에 실린 '해 본 적 없는 업무' 레시피는 보는 각도가 조금 다릅니다. 로봇 다섯이 책상을 둘러싸고 서명이 누락됐다, 명조체로 적어야 한다, 저장하라고 저장, 하며 동시에 소리치고 담당자는 서류 더미 속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습니다. 첫 업무를 받아 든 사람의 얼굴이라 낯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첫 수가 대단한 기술이 아니에요. 지방세 관련 법령과 조례 마흔여덟 건을 올려 둔 채, 업무를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지 안내해 달라고 물으면서 "처음 맡는 업무야."라는 한마디를 붙입니다. 옆자리 선배에게 건네는 말투 그대로입니다. 이후 마인드맵으로 수십 개 문서를 네 갈래로 묶고, 필요한 노드만 펼쳐 보고, 인포그래픽 한 장과 실무 가이드라인 보고서, 발표용 슬라이드까지 뽑아내는 흐름이 순서도 한 장으로 정리됩니다. 요즘 공공기관 보도자료에서 자주 보이던 그 깔끔한 그림체가 대부분 이 도구의 결과물이라는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바로 다음 레시피는 사회복지시설 사례를 다룹니다. 노인복지시설을 신축한 법인이 운영자금 때문에 1층 일부를 카페로 임대했고, 그 면적이 연면적의 5%가 안 되는데도 시청이 건물 전체에 재산세를 부과한 상황. 4컷 만화 마지막 칸에서 담당자와 민원인이 물음표만 띄운 채 서 있는 그림이 사안의 난감함을 압축합니다. 실제 공무원이 마주하는 사건에 비하면 이조차 매우 요약된 자료라는 단서도 달려 있어요. 이 챕터에서 오래 남은 것은 법령 해석 결과보다 곁에 놓인 두 조언이었습니다. 하나는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창을 내려두고 다른 일을 하거나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켜라는 권유인데, 뒤에 "농담이 아닙니다"라고 못을 박고 그것도 실무자에게 필요한 역량이라고 씁니다. 다른 하나는 출처를 일일이 열어 소스와 답변이 서로 맞는지 확인하는 검증을 AI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규정한 대목입니다.


다만 책 전체를 덮고 나서 한 가지가 계속 걸립니다. 표지와 소개글은 칼퇴를 약속하는데, 6장 오디오 오버뷰 챕터의 삽화에는 밥 먹을 시간도 사치라며 더 배우고 더 일하겠다고 되뇌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저자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일중독자라 부르며 이동 시간과 식사 시간까지 학습으로 채워 온 사람이 절약한 시간의 쓸모를 어디에 두는지는 끝내 명확하지 않습니다. 순서도의 마지막 두 칸, 퀴즈로 복습하고 오디오로 추가 학습하는 단계까지 성실히 따라가면 도구를 익히는 일이 또 하나의 업무처럼 불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율을 올리는 방법은 충분히 배웠는데, 그렇게 번 시간을 쉬는 데 쓰겠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필로그에서 AI를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되묻는 만큼, 그 답의 한쪽에 '덜 일하기'도 놓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한 권의 값이 깎이지는 않습니다. 부서가 바뀌어 낯선 규정 앞에 앉아 본 사람, 매뉴얼을 넘겨받고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첫 장만 만지작거려 본 사람이라면 짚이는 대목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읽은 책 가운데 이렇게 곧바로 실무 화면을 열게 만든 도서는 드물었습니다. 화면을 따라 하는 쪽보다, 무엇을 읽히고 무엇을 버릴지 고르는 손이 결국 사람 몫이라는 문장 하나 때문에 기억에 남는 한 권이 되었습니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요즘, 두툼한 이론서보다 이렇게 필요한 항목만 펼쳐 보는 안내서가 손에 잘 맞습니다. 컵에서 김이 오르는 표지가 계절과도 잘 어울리네요.


도구를 빠르게 익히게 해 주는 실습서이면서, 자료를 골라 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말해 주는 책.


#딸깍제미나이노트북 #제미나이 #Gemini #GeminiNotebook #NotebookLM #생능북스 #반병현 #황현목 #AI활용서 #업무자동화 #직장인추천도서 #공무원업무 #AX #생성형AI #서평단 #북유럽카페 #서평 #독서기록 #실용서추천 #BOOK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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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곡선 -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넘어야 돈이 나를 위해 일한다
안유화 지음 / 경이로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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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검은 바탕을 가르며 금빛 빛줄기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휘어 오르고, 그 끝에 도시의 윤곽과 원화 기호가 흩어져 있어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을 그림이 그대로 받아 적은 셈입니다. 그런데 손에 들자 두께와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고, 결과적으로 그 속도가 이 도서에 맞았습니다.


이야기는 오후 3시 14분에 도착한 문자로 시작합니다. 면담은 11분 만에 끝나고, 쉰셋의 김상철은 명예퇴직 통보를 받습니다. 그날 이후 그의 몸은 매일 새벽 3시 14분에 깨어납니다. 아내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고, 90일 뒤 월급이 끊긴다는 사실과 32평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 대출도 혼자 짊어진 상태예요. 잠에서 깬 그가 거실 식탁에서 노트북을 열고 빈 화면에 적은 두 줄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들어오는 돈, 나가는 돈.


들어오는 돈은 월급 세후 약 620만 원 하나였습니다. 나가는 돈을 대출 원리금부터 부모님 용돈까지 더해보니 635만 원. 연봉 1억을 받는 가계가 매달 15만 원씩 적자였고, 그 구멍은 명절 상여금과 성과급이 용케 덮어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더 무거운 두 줄이 따라붙습니다. 퇴직 후 들어오는 돈 0원, 나가는 돈 635만 원. 30년 동안 회사의 매출과 원가와 손익분기점을 지겹도록 들여다본 사람이 자기 돈은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었다는 서술에서, 저는 읽는 속도를 늦췄습니다.


이 장의 문턱을 넘게 해주는 문장은 심리학에서 옵니다. 저자는 손실회피 연구를 끌어와, 새벽마다 깨우는 것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위험을 알리는 경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적습니다. "두려움은 적이 아니다. 이름 없는 두려움이 적이다." 공포에 이름을 붙이면 신호가 되고, 신호가 되면 읽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면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갭 = 매달 나가는 돈 − 자산이 벌어다 주는 돈. 635만 원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잔인한데, 적어놓고 나니 막연한 공포보다 차라리 낫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날 새벽 인물이 얻은 것은 해답이 아니라 좌표였다고 책은 정리합니다.


중반으로 가면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시장에서 달걀을 사면 절반은 장바구니 아래 볏짚을 깔아 담고 나머지는 작은 보자기에 따로 싸서 어린 손자 손에 들려주던 분이에요. 왜 귀찮게 나눠 담느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보자기 매듭을 단단히 묶으며 답합니다. "상철아,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다 담는 게 아니다." "한쪽이 넘어져도 먹을 달걀은 남아야지." 쉰셋이 되어 돌아보니 그의 달걀은 월급과 회사, 아파트, 원화, 하나의 직장경력에 거의 다 담겨 있었습니다. 분산이라는 개념을 이론으로 먼저 배우지 않고 시장 바닥의 지혜로 먼저 이해시키는 순서가, 이 책이 독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 독자에게 가장 아프게 읽힐 대목은 집을 다루는 자리일 겁니다. 저자는 부모님 세대가 강조해온 집 한 채가 인생의 방패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집은 주거 안정이고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며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까지 긍정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집은 단단하지만 현금이 흐르지 않는다고요. 자산총액은 있어 보이는데 쓸 돈이 부족한 구조, 부동산은 있는데 자산소득이 0원인 현실. 그 진단 끝에 놓인 문장은 이렇습니다. "집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집만 믿지 말라는 뜻이다." 살던 집을 흔들라고 부추기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절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나이와 정면으로 겹치는 장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이에 따라 돈의 임무가 달라진다고 말하는 장에서, 저자는 40대와 50대를 가장 많이 벌고 가장 많이 새는 시기로 규정합니다. 문제는 새는 비용이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고 해요. 아이 교육도 중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부모도 챙겨야 하고 보험도 있어야 하니, 그 돈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빠져나갑니다. 고정비 점검표에 붙은 질문들이 꽤 날카롭습니다. 대출이 노후준비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보험에 중복보장은 없는지, 이 교육비가 아이의 미래인지 부모의 불안인지. 매달 나가는 돈은 처음엔 작아 보여도 십 년이 쌓이면 무시할 수 없는 규모가 된다는 지적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50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활주로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비행기가 뜨려면 활주로가 필요하고 너무 짧으면 이륙하지 못하는데, 월급에서 자산소득으로 넘어가는 일도 그렇다는 겁니다. 통보를 받고 나서야 자기 활주로가 짧다는 걸 알았으니 공포가 컸다는 해석이 1장과 맞물려요. 현금과 안전자금, 연금, 경험을 활주로로 꼽은 것까지는 예상 범위였는데, 마지막에 정보 활주로가 들어 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가족이 찾을 수 있는 계좌와 보험, 상조, 디지털자산 정보를 정리해두라는 항목이에요. 자산의 크기가 아니라 남은 사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라, 이 책이 왜 생애자산이라는 말을 쓰는지 그제야 납득이 갔습니다.


물론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초반의 635만 원 계산은 퇴직 이후에도 그 지출 구조가 고스란히 유지된다는 전제로 잡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녀 학원비나 차량 할부처럼 몇 년 안에 사라지거나 조정될 항목이 섞여 있으니, 공포를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로는 강력하지만 숫자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설계됐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세대별 처방도 명료한 만큼 규범적입니다. 30대 봉투 체계가 결혼과 출산, 양가 부모님 지원을 기본값으로 놓고 짜여 있어서, 비혼이나 1인 가구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경로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다만 가계 대차대조표와 점검표가 대부분 빈칸으로 남아 있는 건 오히려 이 책의 성격에 맞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채우는 사람의 숫자가 들어가야 비로소 작동하는 도구니까요.


그동안 받아온 도서들 가운데 가장 실무적인 성격이었고, 동시에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책입니다. 읽기만 하고 덮으면 절반도 가져가지 못하는 구성이라, 뒤쪽 100일 프로젝트는 제 숫자를 넣어가며 천천히 따라가 볼 생각이에요. 재테크 지식을 정리해주는 안내서라기보다, 자기 가계를 한 번쯤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작업대에 가깝습니다. 월급 하나에 기대어 십수 년을 버텨온 사람이라면 어느 장을 펼쳐도 자기 이야기가 섞여 있을 테고, 이제 첫 월급을 받는 자녀와 나란히 읽어도 대화가 될 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실제로 책 속 부녀가 그렇게 대화하고요.


저자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이가 쉰셋이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늦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포기로 기울지 않는 문장이라, 제게는 이 책 전체의 온도로 남았습니다. 50대를 포기의 시기가 아니라 전환의 시기로 부르는 대목도 같은 결이고요. 그리고 장을 닫는 한 줄이 오래 남습니다. "돈은 나이를 알아야 한다."


여름의 열기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지는 9월입니다. 한 해의 남은 달들을 헤아려보기 좋은 시기이고, 숫자를 마주할 결심을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때라고 생각해요. 곡선은 단번에 꺾이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은 오늘 정할 수 있습니다.


막연한 불안을 숫자로 바꾸어 자기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게 만드는, 천천히 읽고 오래 붙잡아야 하는 생애자산 설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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