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문 당일 도착의 경제학 - 유통, 물류를 알면 비즈니스가 보인다
엄지용.신승윤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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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에 형광 초록. <오늘 주문 당일 도착의 경제학>은 표지부터 신호등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위쪽에 건물 몇 채와 초록 트럭이 얹혀 있어서 경제서라기보다 도시의 단면을 그린 도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시장을 움직이는 진짜 힘, 돈의 흐름은 물류에서 시작된다. 손에 들어 보니 크기도 두께도 평범해서, 분야만 보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게 넘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도서입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들이 던지는 진단은 짧고 분명합니다. 더 많이 팔고 더 빠르게 배송하고 더 넓은 시장을 점령하면 된다는 외형 성장의 문법이 힘을 잃고, 그 자리를 최적화가 채우고 있다는 것이죠. 단위 경제성, 수익성 있는 물류, 데이터 기반 의사 결정 같은 말들이 이어집니다. 업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도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성장률 숫자로 버티던 시절이 저물고 나면, 남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남길 것인가 하나로 좁아지니까요.


책의 중반, 대형 마트 새벽배송을 다룬 장이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026년 대형 마트와 SSM의 새벽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 추진 안건이 고위당정협의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에 업계가 활기를 띠었고, 개정안 소식이 전해진 날 이마트 주가가 8.5% 급등해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는 대목까지는 그럴듯한 성장 서사입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점포를 합치면 쿠팡이 구축한 물류 센터 수보다 많다는 숫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들은 곧바로 현장의 온도를 가져옵니다. 취재에 응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새벽배송은 과정 중 하나일 뿐이라며 신중했다고 해요. 신선 식품 풀필먼트 기업의 한 임원은 오프라인 쇼핑에 최적화된 공간에 새벽배송 물류 센터의 옷을 입히면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냉장·냉동 탑차를 위한 독도 없이 마트 주차장을 써야 하는 상황을 두고 "이건 도심 곳곳의 지하철역을 그대로 MFC화한다는 발상이랑 다를 게 없어요."라고 덧붙이는데, 이 비유 하나로 상황이 그려집니다. 저자들의 정리는 이렇습니다. "법이 바뀌어 문이 열려도, 문 뒤에 있는 매장 구조 자체가 새벽배송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국 월마트를 참고 사례로 끌어온 방식도 좋았습니다. 매장을 물류 거점으로 쓴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려고 매장 설계부터 인력 배치, 픽업존 구조, 긱워커 플랫폼까지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는 점을 짚습니다. 국내 사례로 넘어오면 결이 달라집니다. 이마트 매장을 거점으로 삼은 퀵커머스가 다섯 달 만에 전국망을 갖췄지만, 본업과 병행하게 된 매장 직원과 픽업존 상품을 배달하는 라이더의 이해관계가 어긋나 있었다는 것이죠. 픽업존이 지하나 2층에 있으면 라이더들 사이에서 다신 콜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온다는 문장에서, 조직 안에서 일이 늘어나는 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 거예요.


편의점으로 넘어가면 같은 문제가 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집니다. 강남구와 관악구 현장에서 만난 아르바이트 직원의 말이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카운터를 보면서 배달 주문을 수락하고 라이더가 오기 전까지 피킹과 패킹을 마쳐 별도 공간에 진열해야 한다면서, "배달 알림 소리에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요."라고 하더군요. 점주는 중개 수수료가 20%를 넘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하고, 라이더는 단가 낮고 부피 예측이 어려운 편의점 콜을 기피합니다. 세 주체 누구도 확실히 이득을 보지 못하는 구조인데, 서비스는 계속 확대됩니다.


이 장을 못처럼 박는 숫자가 있습니다. 퀵커머스를 시행한 이마트 점포의 98.2%가 전담 인력 없이 기존 업무와 병행했고, 그 결과 78.1%가 휴게 시간이 줄었다고 답했다는 조사입니다. 여기에 결정과 실행 사이의 거리라는 진단이 붙고, 본사가 확장을 결정하고 플랫폼이 서비스를 발표하지만 그 결정을 새벽 4시에 실행하는 건 점포의 야간 알바와 점주라는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윗선에서 내려온 결정과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는 자리 사이의 거리는, 업종을 바꿔 놓아도 비슷하게 벌어져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서술의 무게가 사람 쪽으로 기울어요. 쿠팡 물류 센터를 다룬 대목에서 저자들은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한쪽에서는 고강도 노동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현장에 들어가려는 일용직 지원 경쟁이 치열합니다. 근무 신청 앱에서 출근 확정을 받기가 어려워 쿠켓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고 하죠. 왜 다시 그 문을 두드리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문턱이 없다는 점, 정산이 정확하다는 점 그리고 사회 보장 제도를 활용하려는 계산입니다. 커뮤니티에서 가장 활발히 공유되는 주제가 실업 급여 수급을 위한 근무 일수 맞추기라는 설명에서, 산업 이야기가 고용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실업 급여를 받은 뒤 현장에 복귀한 분의 말이 이 책에서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급여만 생각하면 노동 강도에 비해 벌이가 너무 적은 일이라고 하면서, 취업 준비 자금을 모으려고 업무 일수 맞추기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업무로 뺑뺑이를 돌아도 참았죠. 통계 몇 줄보다 이 한마디가 상황을 더 잘 설명합니다.


도로 위의 장면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2025년 택배 없는 날을 두고 쿠팡 대리점 협력사들이 참여 반대 기자 회견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쉬라고 만든 제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가 하락과 휴일 뒤에 밀려오는 물량이었습니다. 한 퀵플렉서는 쌓인 물량을 한꺼번에 무리해서 처리할 바에 기존 루틴대로 일정을 소화하는 게 낫다며, 고객 주문과 결제를 막는 게 아니라면 택배 없는 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휴식을 권리로 규정해도 수요를 그대로 두면 부담이 뒤로 미뤄질 뿐이라는 지적이라, 제도를 만드는 쪽에서 먼저 읽어야 할 대목으로 보였습니다.


저자들이 정직하다고 느낀 지점은 자기가 앞에서 제시한 숫자를 스스로 흔든다는 데 있습니다. 주 5일 이하로 일하는 기사 비율이 62%라는 데이터를 소개해 놓고, 몇 쪽 뒤에서는 가족 명의로 백업 기사를 등록해 두고 실제로는 주 7일 내내 단독으로 일하며 수익을 다 가져가는 이중 계정 관행을 전하면서, 그 데이터에 착시가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현장의 시각을 붙입니다. 업계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책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이겠죠.


다만 에필로그에서는 조금 걸리는 데가 있었습니다. 혁신은 기술로 시작할 수 있지만 완성은 사람이 한다는 결론,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현장과 사람이 있다는 문장은 따뜻하고 저자들의 진심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혁신의 주인공이라기보다 시스템의 빈틈 위에서 각자 유리한 계산을 하며 버티는 쪽이었어요. 실업 급여를 목표로 근무 일수를 맞추고, 가족 명의 계정으로 주 7일을 감당하는 선택은 희망의 언어로 감싸기가 어렵습니다. 저자들이 이 간극을 모를 리 없는데도 마무리에서 다시 사람을 답의 자리에 놓았으니,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계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았습니다. 이 책의 약점이라기보다, 4장까지 다 읽은 독자에게 남는 숙제에 가깝겠습니다.


읽는 내내 익명 표기가 절마다 A, B, C로 다시 돌아가는 탓에 누가 어느 자리에서 한 말인지 잠깐씩 되짚어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 취재가 촘촘한 책일수록 이런 부분이 아쉽게 느껴지네요.


쿠팡과 네이버의 배송 경쟁이 궁금해서 집어들었다면 2장이 충분한 답을 줄 겁니다. 제 경우에는 뒤로 갈수록 생각이 다른 데로 갔어요. 회사에서 새 사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분이라면 결정과 실행 사이의 거리라는 표현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될 테고, 고용 형태가 흔들리는 시대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기업 정규직이 오랫동안 지향점이었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진단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산업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그 구조 안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 같이 보여주는 책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찬 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주문 건수도 늘고 배송 물량도 함께 불어난다는데, 새벽에 움직이는 트럭과 캠프의 컨베이어를 한번쯤 떠올려 봐도 좋겠습니다. 클릭 한 번의 편리함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한 권이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당일 도착의 속도를 만드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며, 그 속도를 매일 새벽 감당하는 사람들의 구조까지 함께 보게 만드는 현장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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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고사성어 - 삼천 년 지혜를 오늘의 삶으로 읽는 생존의 언어
김세중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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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초역'이라는 두 글자가 파란 원 안에 도장처럼 박혀 있습니다. 살구빛 바탕에 분홍과 초록 매듭 문양이 네 귀퉁이를 잡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초록 삼각과 파란 아치가 산과 문처럼 놓여 있어요. 한자 성어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묵직한 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단정하고 밝은 표지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보통이라 손에 들었을 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종류가 아니었고요.


김세중 작가가 논어와 맹자, 손자병법, 춘추전국과 삼국지, 초한지에서 골라낸 성어 123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옮겨 놓은 책입니다. 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해요. 한쪽 면에는 성어의 뜻과 출전, 유래가 짧게 정리되고 그 아래 '초역'이라는 이름의 문장 한 대목이 박스로 들어갑니다. 맞은편 면은 현대의 사례 한 편, 그리고 '오늘의 한 줄 생각'으로 닫힙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도 되고, 지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펼쳐 읽어도 되는 형태입니다. 저는 후자로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붙잡힌 곳은 역지사지였어요. 맹자에서 온 말이라는 설명 뒤에 붙은 초역이, 제 눈에 뾰족하게 보이는 상대의 태도가 실은 그가 서 있는 낭떠러지의 깊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발바닥 밑을 먼저 내려다보라는 권유였습니다. 이어지는 사례는 세종대왕입니다. 관청의 여자 노비가 아이를 낳고 이레만 쉬고 노동에 복귀해야 했던 시절, 세종은 그 휴가를 백 일로 늘리고 출산 전 한 달을 더했으며 남편에게도 서른 날을 주어 아내를 돌보게 했다고 적혀 있어요. 덧붙은 문장은 이렇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가 편안하면 서 있는 사람의 불편함이 안 보인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의 자리에 서보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리가 하나씩 올라가고, 그러면 앉은 자리의 감각이 기준이 됩니다. 서 있는 사람의 종아리가 어떤 상태인지는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되고요. 이 꼭지가 오래 남은 이유는 거창한 교훈 때문이 아니라, 지금 제 시야의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토사구팽 꼭지는 결이 다릅니다. 사기 회음후열전의 한신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사례로 붙은 인물은 6세기 동로마의 벨리사리우스입니다. 영토를 되찾아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었지만 명성이 커질수록 황제의 의심을 받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직위와 재산을 잃었습니다. 두 눈을 멀게 해 거리로 내몰았다는 대목은 야사로 전해진다고 책이 분명히 표시해 두었어요. 여기 실린 초역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쓸모가 다했을 때 버려지는 도구가 되지 마라. 타인의 손 위에서 춤추며 달콤한 찬사에 취해 있을 때, 이미 등 뒤에서는 칼날이 갈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늘한 문장이지만 겁을 주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한 줄 생각이 향하는 곳은 어떤 풍파에서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자신만의 뿌리를 키워야 한다는 쪽이니까요. 몸담은 조직 안에서만 통용되는 유능함과, 조직 밖에서도 남는 실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 나이쯤 되면 짐작하게 됩니다.


권토중래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당나라 두목의 시에서 온 말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 올라온다는 뜻이라고 해요. 다산 정약용이 십팔 년 유배를 견디며 오백여 권을 남긴 이야기가 붙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지금이 학문의 기틀을 세울 기회라며 매일 먹을 갈았다는 서술 뒤에, 몸은 귀양지에 갇혀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거대한 흙먼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문장이 놓입니다. 성어의 뜻과 사례가 하나의 그림으로 맞물리는 대목이라 편집이 잘 되었다고 느꼈어요. 초역은 이렇게 닫힙니다.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인생의 무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무릎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일어서는 자가 결국 마지막에 웃는 진짜 승자가 된다."


견원지간 꼭지는 소리 내어 웃을 만한 사례를 데려옵니다. 개와 원숭이의 앙숙 설화 다음에 코카콜라와 펩시의 콜라 전쟁이 나와요.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비방 광고와 마케팅비를 쏟아붓는 동안 웰빙이라는 큰 흐름을 놓쳤고, 그 틈으로 건강 음료와 생수의 신흥 강자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웃과 동료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자신을 지켜 주던 울타리를 허무는 것과 같다는 마무리가 붙는데,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대립을 떠올리면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걸리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사례의 무대가 제왕과 명장, 대문호와 글로벌 기업 쪽에 많이 몰려 있어요. 이야기의 힘은 분명하지만, 백 일의 출산 휴가를 내린 임금과 반도체에 나라의 미래를 걸었던 창업자의 결단을 제 하루의 판단에 바로 갖다 붙이기에는 간격이 꽤 큽니다. 마무리가 대체로 권유형이나 명령형으로 닫히는 것도, 여러 꼭지를 연달아 읽으면 조언이 조금 촘촘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이 책은 애초에 아무 데나 펼쳐 한 꼭지씩 읽으라고 안내하고 있으니, 그렇게 읽는 편이 결에 맞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어요. 같은 인물이 여러 장에 다시 나오는 것도 처음엔 겹친다 싶었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여러 각도에서 잘라 보여 주는 편집으로 받아들이면 수긍이 갑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 보면 한 번 읽고 정리되는 책과 책장에 세워 두고 자꾸 꺼내게 될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놓였어요. 고사성어를 새로 배우고 싶은 마음보다, 결정을 앞두고 흔들릴 때 기댈 문장이 필요한 사람에게 쓸모가 더 클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 사람을 다루는 자리에 앉은 분이라면 역지사지와 견원지간 쪽에서, 한 번 크게 넘어져 본 분이라면 권토중래 쪽에서 오래 머무실 듯하고요. 아이와 함께 한 꼭지씩 읽고 이야기를 나눠 봐도 괜찮을 만큼 문장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저녁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눈에 띄게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분기를 앞두고 무엇을 접고 무엇을 밀고 나갈지 셈을 하게 되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이런 무렵에 삼천 년을 건너온 네 글자를 하루 한 꼭지씩 읽는 일은, 생각보다 든든한 준비가 됩니다.


오래된 네 글자를 오늘의 자리로 끌어다 놓은 책으로, 결정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기댈 문장을 건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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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괴이 사전 : 전설편 ㅣ 세계 괴이 사전
에이토에후 지음, 현정수 옮김, 아사자토 이츠키 감수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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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고 한동안은 펼치지 않고 표지만 봤어요. 괴담과 공포를 다룬다고 들었는데, 라벤더빛 바탕에 형광 오렌지와 민트그린이 겹쳐진 그림은 무섭기는커녕 흥겨웠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뜬 고대 석상, 석조 성채, 배를 감아쥔 촉수가 한 화면에 빼곡한데도 어둡게 가라앉은 구석이 없습니다. 표지에 적힌 한 줄,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해지는 700항목 이상의 신비한 전설!"이 그 색감과 잘 어울렸어요. 480쪽의 두께를 손으로 가늠하면서, 며칠에 끝낼 도서는 아니고 계절 하나를 같이 보낼 한 권이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목차를 보면 챕터 제목 대신 국가 이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아시아에서 시작해 오세아니아와 남북아메리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지나 태평양과 남극, 북극까지. 그러니까 이 사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궁금한 나라를 펼쳐 한 항목씩 주워 담는 방식으로 읽게 됩니다. 항목 하나가 반 단 남짓이어서 짧게 읽고 덮기에도 좋아요. 대신 항목 끝마다 다른 항목을 참조하라는 안내가 붙어 있어서, 태국 이야기를 읽다가 순다랜드로 넘어가고 거기서 무 대륙까지 끌려가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한국 독자라면 대한민국·북한 섹션을 먼저 펼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거인 할망이 치마에 담아 옮긴 흙이 한라산이 되고 배탈로 인해 백두산과 압록강이 생겼다는 이야기, 주몽과 단군의 건국 서사, 쇠를 먹으며 몸집을 키운 불가사리, 밀양 아랑각에 얽힌 아랑의 원한, 호랑감투를 쓴 도깨비 설화, 삼성혈의 세 신, 그리고 해와 달의 빛을 되돌린 연오랑과 세오녀까지 실려 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남의 눈으로 다시 읽는 감각이 묘하게 새로웠어요. 무엇보다 주몽과 박혁거세 항목을 나란히 두고 천제의 후손을 건국 시조로 삼는 구조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해둔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만 표기에서 손을 멈춘 곳이 있었습니다. 제주 삼성혈의 구멍 이름을 한자로는 모흥혈로 적어놓고 한글은 다르게 옮겨두었고, 할망 항목에는 설문대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방대한 분량을 한 권에 담는 과정에서 생긴 빈틈이겠지만, 우리 이야기라서 더 눈에 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 항목의 끝에는 이즈모 지방에 전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남고 다른 쪽에서는 지워진 이야기라는 뜻이죠. 이 한 줄을 읽고 나니 뒤에서 만나는 비슷한 대목들이 다르게 보였어요. 가이아나 편에는 아라와크족 계열 선주민의 문화와 전설이 유럽 각국의 지배를 거치며 상실되어 버렸다고 적혀 있고, 앤티가바부다 편은 전해지는 전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분홍빛 모래 해변 소개로 채워집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국기인 부즈카시는 내전이 길어지며 존속이 위태롭다는 문장으로 닫히고, 이스라엘의 열 부족은 기록에서 모습을 감춘 채 여행자들의 증언만 남아 있습니다. 700항목이 넘는 이 목록은 남아 있는 이야기의 카탈로그이면서, 사라진 자리를 드러내는 명부이기도 하더군요.


물론 판정하지 않고 다 담아두는 태도가 늘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콰도르 발디비아 토기가 조몬 토기와 닮았으니 조몬인이 태평양을 건너갔을지 모른다는 설, 히브리어와 일본 신사의 구조가 비슷하다며 열 부족이 일본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유공조론 같은 항목이 다른 전승들과 같은 무게로 나란히 놓여 있어요. 어디까지나 소문과 설로 옮겨 적는 형식이긴 하지만, 학계에서 근거가 약하다고 정리된 주장과 오래된 구전을 구분 없이 배열하면 읽는 쪽에서 헷갈릴 여지가 생깁니다. 항목마다 한두 줄이라도 신뢰도의 결을 달리 표시해줬다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그럼에도 이 책을 계속 펼치게 만든 힘은 겁주기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주 돌하르방 항목은 경계를 지키던 주술적 석상을 설명하다가, 표정이 온화하고 사랑스러우며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준다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요.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마녀는 겨울이면 모두 북쪽으로 떠나 홀로 남겨지곤 했기에, 스스로 열매로 변신해 사람과 동물과 새를 마을에 붙잡아 둡니다. 그 열매에는 "열매를 먹으면 파타고니아로 돌아오게 된다"라는 전승이 따라붙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전쟁터로 예고된 메기도의 언덕조차, 스물다섯 겹의 파괴와 재생을 품은 채 오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이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어요. 전설이 사람을 위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사전은 낯선 지명들을 통해 계속 알려줍니다.


뒷부분에 끼어 있는 짧은 칼럼들도 국가별 나열의 리듬을 잘 끊어줍니다. 전설의 검을 다룬 글은 쿠사나기와 엑스칼리버에서 출발해 아론다이트와 갈라틴, 아스칼론, 칼라드볼그, 발뭉, 클라브 솔라스를 훑고 이렇게 닫혀요. 오랜 시간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이어져가기에, 이것들은 전설의 검인지도 모른다. 전설을 옛날에 있었던 무엇이 아니라 지금도 옮겨지는 무엇으로 슬쩍 밀어두는 문장입니다. 지도에만 있는 장소를 모아둔 칼럼은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저작권 대책으로 창작된 뉴욕주의 가공 마을, 이십일 세기에 실재하지 않음이 판명된 샌디 섬, 구글맵에 나타났다가 같은 해에 지워진 영국의 아글턴, 일본의 지도 앱에 잠시 출현했던 정체불명의 역.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일이 먼 옛날의 미신에만 속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평소에 들여다보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문장이 이 한 권 전체의 성격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도서인데, 서평용으로 건네받은 책들 가운데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조금씩 읽은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완독을 목표로 쥐면 버거운 대신, 국가 하나를 펼쳐 항목 두세 개만 읽고 덮어도 그날 몫의 독서가 채워지는 종류였거든요. 이야기를 만드는 분들에게는 자료집으로서 값을 하겠고, 세계사나 지리에 흥미가 있는 학생에게도 입구가 되어줄 만합니다. 여행을 자주 떠나기 어려운 형편에 지도만 자꾸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특히 오래 붙들 책이겠어요. 다만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집어든다면 결이 어긋날 수 있습니다. 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화사와 민속지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매 한 마리마다 여권이 발급되는 아랍에미리트의 사정이나 파타고니아 로고에 담긴 산의 실루엣 같은 항목까지 들어와 있으니까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두툼한 사전 한 권을 책상 한쪽에 세워두고, 마음 가는 나라를 골라 몇 항목씩 읽어 나가는 일은 꽤 어울리는 소일거리예요.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아직 펼치지 않은 대륙이 여러 곳 남아 있다는 점도 든든합니다.


세계 곳곳의 전설을 모은 두툼한 목록이면서, 이야기가 남은 자리와 사라진 자리를 함께 보여주는 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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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리버 - 인류 문명을 만든 일곱 개의 강 이야기
버네사 테일러 지음, 박은영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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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받아 들자마자 알았습니다. 이건 한 번에 읽을 책이 아니라는 걸요. 손에 얹으면 무게가 그대로 전해지고, 목차를 펼치면 일곱 개의 강이 각각 세 개의 장을 끌고 옵니다. 그래서 계획을 처음부터 바꿨습니다. 강 하나를 끝내면 며칠 쉬고 다음 강으로 건너가는 방식으로요. 지나고 보니 그게 맞았습니다. 속도를 내면 정보만 쌓이고, 천천히 가면 생각이 남는 종류의 책이었습니다.


표지를 다시 봅니다. 짙은 남청색 바탕 위로 청록과 하늘빛 물길이 굽이치고, 그 사이에 금빛으로 앉은 것들이 있어요. 돔을 얹은 건물, 노를 젓는 고대의 배, 증기선처럼 보이는 강배, 백로, 물고기, 그리고 맨 아래 왼쪽의 악어. 일곱 개의 강을 지도로 그리지 않고 곡선만 남긴 감각이 좋았습니다. 표지 아래쪽에 적힌 한 줄, "인류는 어떻게 강을 지배하고, 강은 어떻게 문명을 만들었는가"가 사실상 이 책의 설계도였다는 걸 읽으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버네사 테일러는 첫 장을 왕조나 피라미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마에서 출발해요. 고대 이집트인들이 하마를 사랑했다는 문장 다음에, 하마 얼굴을 한 여신 타와레트가 임산부와 아기를 보호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이 손바닥보다 작은 푸른 유약 공예품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지고, 사나운 기색 없이 입을 얌전히 다문 하마가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들이 하마를 사냥해 고기와 상아를 얻었습니다. 이용과 숭배가 한 몸이라는 이 책의 큰 주제가 부적 하나에 이미 들어 있는 셈이죠.


나일강 편의 문을 여는 제사는 《이집트 사자의 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나는 물을 거슬러 흐르게 하지 않았다. 나는 흐르는 물길을 끊지 않았다.


죽은 이가 자신의 결백을 고하는 형식의 문장이라고 합니다. 물길을 끊지 않았다는 항목이 도덕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댐과 운하, 매립과 준설이 줄줄이 나오는 이 책의 뒷부분을 생각하면 첫 페이지에 이미 판결문이 놓여 있던 것과 같으니까요.


저자가 나일강 편에서 꺼내는 해석 하나도 오래 남습니다. 나일강을 무한함의 상징으로 만든 주체가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것. 통제력과 권위를 굳히려면 끝없는 연속성을 강조해야 했고, 그래서 앞선 세대의 문자와 강 관리법과 전통을 부지런히 재활용했다는 겁니다. 챕터 제목 '오래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가 향수가 아니라 통치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실제 발원지가 훨씬 남쪽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징적인 발원지 하나로 충분했다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사실보다 표식이 필요했던 사람들의 사정이 지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템스강 편에서는 '그림자 강'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런던이 키운 번영이 다른 유역의 강과 수로를 영향권 아래 두면서 가능했다는 개념인데, 저자는 이게 런던만의 사정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모든 주요 강에 그런 그림자가 있다고요. 뉴캐슬의 타인강은 '석탄의 강'이라 불리며 매년 수천 톤의 석탄을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1666년 대화재 때 도시를 태운 연료가 그 석탄이었고, 재건의 재원이 된 것도 석탄에 붙은 세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쉰한 개의 교회가 서고 1711년 세인트폴 대성당이 완공됩니다. 포틀랜드섬에서 실려온 석회암 벽면에는 화석이 된 굴 껍데기와 새우의 흔적이 박혀 있어서, 태고의 바다가 도심 한복판에 그대로 남은 형국이었다고 해요. 오래된 것은 정말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시시피강 편은 읽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1856년 겨울 마거릿 가너가 얼어붙은 오하이오강을 건너 잠깐 자유의 공기를 마셨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남쪽으로 압송된 과정이 나옵니다. 법정은 그녀에게 도망 노예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붙였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는 이유로요. 같은 물줄기가 누구에게는 교역로였고 누구에게는 탈출로였으며 또 누구에게는 끌려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이 한 챕터에 겹쳐 있습니다.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이 대목은 각자 읽어야 할 자리 같습니다.


마지막 부의 '가라앉는 도시'에서 책은 현재로 착지합니다. 상하이가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관측된 해가 1921년이고, 1950년대에는 연간 10센티미터씩 내려앉았으며, 1800년대 후반 이래 3미터 넘게 침하했다고 합니다. 건물의 무게와 지하수 추출이 원인이었습니다. 상하이라는 이름이 바다 위 또는 바다에서 솟아오른다는 뜻을 품고 있는데 해발고도는 기껏해야 3~4미터라는 설명도 붙습니다. 이름과 실제 사이의 간격이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이 장에서 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건 진흙과 모래를 두고 갈린 세 입장이었습니다. 항만 당국에게 퇴적물은 치워야 할 장애물이었고, 중국 당국은 군함의 입항을 막아주는 천연 장벽으로 여겼고, 농부들은 하늘이 내린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작은 개울과 운하를 타고 다니며 대나무 장대로 강바닥의 흙을 퍼 올려 바구니에 담아 비옥한 표층토로 썼다고 해요. 그 바구니 옆에 1930년대 준설선이 퍼낸 4,000만 톤이라는 숫자가 놓입니다. 같은 흙인데 보는 자리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저자는 그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끼워 넣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토사가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흐름 속에서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은 적응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퇴적이든 침식이든 고정된 구조물이나 사람의 정착지가 들어선 곳에서만 비로소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고요. 재난이라는 말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었습니다. 무언가를 한자리에 붙들어 두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위기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니까요. 서울의 복개천이 떠올랐습니다. 양징방 하천이 1900년대 초에 매립되어 거리가 되었고 지금은 옌안루의 일부로 남아 있다는 대목에서요. 근대화되는 도시들이 물길을 덮은 방식은 대륙을 가리지 않고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읽으면서 아쉬운 지점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나일강의 상징을 만든 주체가 엘리트였다고 분석하고, 제국의 준설 광고와 훗날의 '자연과의 전쟁' 구호를 나란히 놓아 비판의 균형을 잡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강가에서 매일 물을 지고 밭을 갈던 사람들이 그 상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상대적으로 얇게 다뤄집니다. 기록이 남지 않은 쪽의 목소리를 복원하기 어렵다는 사정은 알겠지만,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는 데 들인 공력만큼 아래쪽 자리에도 지면이 갔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상하이 농부들의 바구니가 등장하는 짧은 대목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며칠 안에 읽고 정리하는 리듬에 익숙해지는데, 이 한 권은 그 리듬을 아예 놓게 만들었습니다. 일부러 늦춘 게 아니라 늦춰질 수밖에 없었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책을 붙들고 앉아 있는 시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께가 부담이 아니라 여유로 바뀌는 순간이 분명히 옵니다.


기후위기나 물 부족 같은 말이 뉴스에서 너무 자주 들려서 무감해진 분이라면, 이 책이 그 말들에 다시 부피를 입혀 줄 겁니다. 세계사를 연대기로 외우다 지친 경우에도 강이라는 렌즈 하나가 꽤 시원한 통로가 되어 줍니다. 물론 한 강을 세 장씩 끌고 가는 구성이라 처음 백 페이지는 호흡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 구간만 넘기면 나머지는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9월 중순, 아침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이맘때가 이런 책과 잘 맞습니다. 여름의 조급함이 한 발 물러나고 아직 겨울의 무게는 오지 않은 시기니까요. 일곱 개의 강을 다 건넌 다음에도 책장에 그대로 꽂아 둘 생각입니다. 계절이 한 번 더 바뀌면 다뉴브강이나 니제르강 편을 다시 펼쳐 볼 것 같아서요.


강을 따라 인류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며 동시에 숭배해 온 오래된 모순을 마주하게 되는 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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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의 행복 - 오래 건강하게 산 어른들에게 배우는 삶의 기술
정세희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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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에서 먼저 눈에 걸린 건 색이었어요. 짙은 남색 위에 산호색 동심원이 손으로 그은 듯 몇 겹 겹쳐 있고, 아래쪽으로는 초록 세로선이 물결처럼 깔려 있습니다. 백 세라는 말 옆에 으레 놓이는 누런 빛깔이 없더군요. 다 지나온 삶을 정리해 보여주는 표정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쪽에 무게를 둔 배색이었습니다. 아래쪽에 인물 사진 없이 열다섯 사람의 이름만 나란히 적혀 있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00세의 행복>은 중앙일보 기자 세 명이 백 명 가까운 장수 어른을 직접 만나 기록한 책입니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양복 주머니와 가방 속까지 들여다봤다고 하니, 인터뷰라는 말보다 관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취재였겠습니다. 마음, 몸, 관계, 삶의 주도권이라는 네 개의 부에 열다섯 편이 담겼고,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이 지켜온 원칙 다섯 가지가 붙습니다.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라 부담 없이 넘어가는 분량이고, 실제로도 편안하게 읽혔어요.


첫 편의 시작이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뭘 먹어야 100세까지 건강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앞세우고 105세 철학자의 냉장고를 털러 갑니다. 특별한 음식이 나올 줄 알았다는 기대까지 그대로 적어두었더군요. 그런데 냉장고에서 나온 건 미리 썬 양파와 당근, 시금치와 깻잎무침 정도였습니다. 아침 식단은 수십 년째 똑같습니다. 우유 반 잔, 호박죽 반 접시, 계란 반숙, 찐 감자, 드레싱 없는 채소샐러드에 제철 과일. 바꿀 이유가 없고 아침에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20대 땐 맨날 똑같은 거 먹으면 무슨 맛일까 했어요. 그런데 습관이 참 무서워요. 내 것이 돼버리면 지루하지도 질리지도 않고, 그 이상의 것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니 불만이 없죠."


절제를 미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대목의 미덕입니다. 그냥 습관의 속성을 말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고정된 규율로 버티는 것도 아닙니다. 위가 약해진 뒤로는 커피를 한 잔에서 반 잔으로 줄였고, 공복을 길게 두는 요즘 흐름과 달리 저녁은 일부러 늦게 먹습니다. 공백이 길면 칼로리가 모자라 지친다는 게 본인의 설명이었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맞춰 평생 지킨 습관도 고쳐 쓰는 사람의 태도가 여기서 읽힙니다. 몸이야 늙었다면 늙었겠죠, 그런데 인간적으로 늙었는가 물으면 달라진다는 말도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백 년을 살아보니 노인이 된다는 건 스스로 늙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먼저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는 관찰은, 그 뒤로도 오래 남았습니다.


재미있는 건 4부에 실린 93세 조선 기술자 편에서 거의 같은 구조를 다시 만난다는 점이에요. 비서가 그의 건강 비결로 규칙적인 생활을 꼽으면서 철학자 칸트에 버금간다고 했다는데, 아침상이 실제로 평생 고정입니다. 사과 3분의 1쪽, 버터와 잼 바른 모닝빵에 하몽 한 조각, 콘플레이크와 우유 조금, 계란 하나. 스무 살에 유럽에서 빵 맛을 알고 난 뒤로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호박죽과 모닝빵이라는 전혀 다른 상차림이 같은 원리로 굴러가고 있었어요.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데 판단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 에필로그 제목이 '장수는 유전이 아니라 시스템'인 이유가 서로 다른 두 집의 밥상에서 겹쳐 보입니다.


이 어른의 이야기에서 제 예상을 빗나간 대목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 세운 경제개발계획을 직접 만든 당사자인데, 이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곰탕도 60년 우려 먹으면 맛이 안 난다고요. 자기 최대 업적을 스스로 낡았다고 진단하는 사람의 말투에는 미련이 없었습니다. 실버타운 이야기도 뜻밖이었어요. 해외 고객 미팅과 강연으로 여전히 바쁜 사람이 그곳에서는 자기 이력을 철저히 숨겼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만큼은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는 문장 하나가 앞의 화려한 이력을 전부 상대화합니다. 병원에 다녀오는 줄 안 동료들 사이에서 몸 약한 어르신으로 불렸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났고요. 낯선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슬쩍 식사 자리에 부르는 게 요즘 낙이라는데, 이유는 짧습니다. 다 같이 잘 살면 좋으니까.


그런데 이 책에서 제일 오래 붙잡고 있었던 편은 3부에 있습니다. 1924년생 어머니와 1946년생 아들의 이야기인데, 서술 방식이 앞과 완전히 다릅니다. 아들의 1인칭으로 시작하고, 첫 문장이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입니다. 요양원 입소 신청서를 세 번 썼고 세 번 다 찢었다고 해요. 그를 무조건 효자로 세우지 않는 것이 이 챕터의 미덕입니다. 그도 79세 노인이었고, 1년 만에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질 정도로 힘에 부쳤으며, 노인네가 노인네를 부양하는 것이라고 자기 처지를 그대로 말합니다. 아내와 함께 365일 긴장 상태였다는 서술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 집을 지탱한 것도 결국 반복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6시, 거실의 옷걸이에는 옷 대신 가사판이 걸립니다. 아들이 대형 달력 뒷면에 유행가 서른다섯 곡을 하나하나 베껴 적은 것이고, 어머니가 다음 것을 찾으면 아들이 태극기 봉 끝으로 가사를 짚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질 때도 노래만큼은 남아 있었다고 해요. 잠들기 전에는 화투판을 펼쳐 같은 그림을 맞추며 옛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사이 섬망 증세가 누그러졌고 아들의 기력도 돌아왔습니다.


"하도 시달려서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을 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노래가 아니었다면 벌써 스트레스받아서 죽었을 테니 노래가 나를 살린 거죠."


요양원 입소를 앞둔 저녁,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첫 물음이 "복희야, 너 점심은 먹었냐?"였다고 합니다. 세 그릇이나 배부르게 먹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좋아하셨다고요. 백 살 엄니는 기어코 여든 아들을 또 키워내고 있었다. 책의 이 한 문장 앞에서 돌봄의 방향을 한쪽으로만 생각해온 제 짐작이 헐거워졌습니다.


아쉬움도 없지는 않았어요.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말이나 역할을 놓지 않으면 나이를 잊는다는 제목은 든든하게 읽히지만, 그 태도가 가능하려면 일정을 챙겨주는 사람과 선택할 수 있는 거처 같은 조건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합니다. 부양 부담이 곧 생계 문제로 이어지는 집이라면 노래 교실에 주 세 번 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을 테고요. 책이 노노부양의 현황을 별도 기사로 얹어 개인의 사연을 사회 현상으로 넓혀둔 점은 신뢰가 갔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조건의 차이를 짚어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이 책이 개인의 습관 쪽에 집중하기로 한 선택이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60세 넘어 고독하게 사는 사람은 대체로 이기주의자가 많다는 진단도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한 세기를 건너온 사람의 관찰이니 가볍게 넘길 말은 아니지만, 관계가 끊기는 이유가 사람 됨됨이만은 아닐 겁니다. 이 대목은 동의보다 질문으로 남겨두었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정리가 빠른 책과 한동안 곁에 두게 되는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습니다. 저속노화니 장수 식단이니 하는 말이 넘치는 요즘에, 백 세를 넘긴 당사자들의 선택이 정작 그 유행과 어긋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이 도서의 정직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결국 남는 건 거창한 비결이 아니라 아침마다 되풀이되는 사소한 일들이었어요. 밥상 하나, 노래 한 곡, 화투 한 판.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 이 책을 읽은 게 맞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 지는 시각이 눈에 띄게 당겨지는 요즘, 오래 산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남은 시간을 늘리는 일보다 그 시간에 무엇을 되풀이할지가 먼저라는 걸, 백 세 어른들의 평범한 아침상이 조용히 알려줍니다.


오래 살기 위해 산 사람은 없었고, 되풀이할 것이 있었던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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