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괴이 사전 : 전설편 ㅣ 세계 괴이 사전
에이토에후 지음, 현정수 옮김, 아사자토 이츠키 감수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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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고 한동안은 펼치지 않고 표지만 봤어요. 괴담과 공포를 다룬다고 들었는데, 라벤더빛 바탕에 형광 오렌지와 민트그린이 겹쳐진 그림은 무섭기는커녕 흥겨웠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뜬 고대 석상, 석조 성채, 배를 감아쥔 촉수가 한 화면에 빼곡한데도 어둡게 가라앉은 구석이 없습니다. 표지에 적힌 한 줄,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해지는 700항목 이상의 신비한 전설!"이 그 색감과 잘 어울렸어요. 480쪽의 두께를 손으로 가늠하면서, 며칠에 끝낼 도서는 아니고 계절 하나를 같이 보낼 한 권이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목차를 보면 챕터 제목 대신 국가 이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아시아에서 시작해 오세아니아와 남북아메리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지나 태평양과 남극, 북극까지. 그러니까 이 사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궁금한 나라를 펼쳐 한 항목씩 주워 담는 방식으로 읽게 됩니다. 항목 하나가 반 단 남짓이어서 짧게 읽고 덮기에도 좋아요. 대신 항목 끝마다 다른 항목을 참조하라는 안내가 붙어 있어서, 태국 이야기를 읽다가 순다랜드로 넘어가고 거기서 무 대륙까지 끌려가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한국 독자라면 대한민국·북한 섹션을 먼저 펼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거인 할망이 치마에 담아 옮긴 흙이 한라산이 되고 배탈로 인해 백두산과 압록강이 생겼다는 이야기, 주몽과 단군의 건국 서사, 쇠를 먹으며 몸집을 키운 불가사리, 밀양 아랑각에 얽힌 아랑의 원한, 호랑감투를 쓴 도깨비 설화, 삼성혈의 세 신, 그리고 해와 달의 빛을 되돌린 연오랑과 세오녀까지 실려 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남의 눈으로 다시 읽는 감각이 묘하게 새로웠어요. 무엇보다 주몽과 박혁거세 항목을 나란히 두고 천제의 후손을 건국 시조로 삼는 구조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해둔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만 표기에서 손을 멈춘 곳이 있었습니다. 제주 삼성혈의 구멍 이름을 한자로는 모흥혈로 적어놓고 한글은 다르게 옮겨두었고, 할망 항목에는 설문대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방대한 분량을 한 권에 담는 과정에서 생긴 빈틈이겠지만, 우리 이야기라서 더 눈에 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 항목의 끝에는 이즈모 지방에 전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남고 다른 쪽에서는 지워진 이야기라는 뜻이죠. 이 한 줄을 읽고 나니 뒤에서 만나는 비슷한 대목들이 다르게 보였어요. 가이아나 편에는 아라와크족 계열 선주민의 문화와 전설이 유럽 각국의 지배를 거치며 상실되어 버렸다고 적혀 있고, 앤티가바부다 편은 전해지는 전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분홍빛 모래 해변 소개로 채워집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국기인 부즈카시는 내전이 길어지며 존속이 위태롭다는 문장으로 닫히고, 이스라엘의 열 부족은 기록에서 모습을 감춘 채 여행자들의 증언만 남아 있습니다. 700항목이 넘는 이 목록은 남아 있는 이야기의 카탈로그이면서, 사라진 자리를 드러내는 명부이기도 하더군요.


물론 판정하지 않고 다 담아두는 태도가 늘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콰도르 발디비아 토기가 조몬 토기와 닮았으니 조몬인이 태평양을 건너갔을지 모른다는 설, 히브리어와 일본 신사의 구조가 비슷하다며 열 부족이 일본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유공조론 같은 항목이 다른 전승들과 같은 무게로 나란히 놓여 있어요. 어디까지나 소문과 설로 옮겨 적는 형식이긴 하지만, 학계에서 근거가 약하다고 정리된 주장과 오래된 구전을 구분 없이 배열하면 읽는 쪽에서 헷갈릴 여지가 생깁니다. 항목마다 한두 줄이라도 신뢰도의 결을 달리 표시해줬다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그럼에도 이 책을 계속 펼치게 만든 힘은 겁주기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주 돌하르방 항목은 경계를 지키던 주술적 석상을 설명하다가, 표정이 온화하고 사랑스러우며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준다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요.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마녀는 겨울이면 모두 북쪽으로 떠나 홀로 남겨지곤 했기에, 스스로 열매로 변신해 사람과 동물과 새를 마을에 붙잡아 둡니다. 그 열매에는 "열매를 먹으면 파타고니아로 돌아오게 된다"라는 전승이 따라붙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전쟁터로 예고된 메기도의 언덕조차, 스물다섯 겹의 파괴와 재생을 품은 채 오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이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어요. 전설이 사람을 위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사전은 낯선 지명들을 통해 계속 알려줍니다.


뒷부분에 끼어 있는 짧은 칼럼들도 국가별 나열의 리듬을 잘 끊어줍니다. 전설의 검을 다룬 글은 쿠사나기와 엑스칼리버에서 출발해 아론다이트와 갈라틴, 아스칼론, 칼라드볼그, 발뭉, 클라브 솔라스를 훑고 이렇게 닫혀요. 오랜 시간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이어져가기에, 이것들은 전설의 검인지도 모른다. 전설을 옛날에 있었던 무엇이 아니라 지금도 옮겨지는 무엇으로 슬쩍 밀어두는 문장입니다. 지도에만 있는 장소를 모아둔 칼럼은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저작권 대책으로 창작된 뉴욕주의 가공 마을, 이십일 세기에 실재하지 않음이 판명된 샌디 섬, 구글맵에 나타났다가 같은 해에 지워진 영국의 아글턴, 일본의 지도 앱에 잠시 출현했던 정체불명의 역.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일이 먼 옛날의 미신에만 속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평소에 들여다보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문장이 이 한 권 전체의 성격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도서인데, 서평용으로 건네받은 책들 가운데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조금씩 읽은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완독을 목표로 쥐면 버거운 대신, 국가 하나를 펼쳐 항목 두세 개만 읽고 덮어도 그날 몫의 독서가 채워지는 종류였거든요. 이야기를 만드는 분들에게는 자료집으로서 값을 하겠고, 세계사나 지리에 흥미가 있는 학생에게도 입구가 되어줄 만합니다. 여행을 자주 떠나기 어려운 형편에 지도만 자꾸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특히 오래 붙들 책이겠어요. 다만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집어든다면 결이 어긋날 수 있습니다. 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화사와 민속지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매 한 마리마다 여권이 발급되는 아랍에미리트의 사정이나 파타고니아 로고에 담긴 산의 실루엣 같은 항목까지 들어와 있으니까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두툼한 사전 한 권을 책상 한쪽에 세워두고, 마음 가는 나라를 골라 몇 항목씩 읽어 나가는 일은 꽤 어울리는 소일거리예요.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아직 펼치지 않은 대륙이 여러 곳 남아 있다는 점도 든든합니다.


세계 곳곳의 전설을 모은 두툼한 목록이면서, 이야기가 남은 자리와 사라진 자리를 함께 보여주는 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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