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자는 가장 완벽한 노예가 된다 ㅣ 시대철학 3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지음 / 비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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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에 적힌 지은이 이름을 두 번 봤습니다.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출간일은 2026년 8월이고요. 인세는 어디로 송금하는 건지 잠깐 궁금해졌는데, 띠지에 박힌 문장을 읽고는 그런 농담이 쑥 들어가더군요. "사람들은 그를 믿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절망 속에서 붙잡고 싶은 기적을 믿은 것이다."


비원에서 나온 시대철학 시리즈의 세 번째 책입니다. 시리즈라고 해도 권마다 다루는 인물과 주제가 따로인 구성 같아서, 앞 권을 안 봤어도 이 책 하나로 읽는 데 걸리는 건 없었어요.


판형은 손에 쥐기 편한 작은 크기입니다. 가방에 넣어도 표 안 나는 핸드북두께인데 내용은 영 가볍지가 않아서, 무게중심이 좀 이상한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프롤로그 첫 단락에서 글쓴이는 라스푸틴을 악마라 부르는 기존의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먼저 선을 긋습니다. 무너지는 제국 바깥에서 침입한 재앙이라기엔 이미 안에서부터 곪아 있던 자리에 스며든 하나의 증상에 가까웠다고요. 로마노프 왕조가 그를 불러들인 게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둔 순간 그의 자리가 저절로 마련됐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옵니다. 어떤 시대는 광인을 낳지 않는다, 다만 광인이 앉을 의자를 미리 비워둘 뿐이다.


의자를 미리 비워둔다는 말.


책의 논지는 여기서 거의 다 나온 셈인 거 같아요. 삼켜지는 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판단을 오래전에 멈췄다는 것이고, 판단이 멈춘 자리에 관습이, 관습이 무력해진 자리에 불안이, 불안이 임계점을 넘은 자리에 누군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어선다는 흐름입니다. 그 목소리가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배가 시작된다고요. 흔들리는 자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는 언제나 신처럼 보이는 법이라는 문장이 뒤에 붙는데, 이건 궁정 얘기로만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아스피린 대목이었어요. 황태자 알렉세이의 몸에서 피가 멎지 않을 때 궁정에 불려온 건 당대 유럽에서 가장 훈련된 의사들이었고, 1899년에 나온 아스피린은 근대 이성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일부 의학 사학자들이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혈우병 환자에게 이 신약을 처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서술이 이어지고, 사실이었다면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는 그 약이 출혈을 더 악화시키는 독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당대 최고 지성들이 신뢰한 신약이 도리어 독약이 될 수도 있었던 셈이라고요.


낡은 정답을 신봉하는 자들은 그 정답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는 문장으로 이 장면을 받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회사 생각이 좀 났습니다. 십 년 전에 만든 양식, 그때는 최선이었던 절차, 지금은 아무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는데 아무도 안 건드리는 것들.


상식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붙드는지에 대한 설명도 서늘했어요. 편하기 때문이라고요. 상식을 따르는 한 결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하면 되고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면 된다는 겁니다. 상식이 개인의 판단을 집단의 익명성 속으로 녹여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잘못돼도 나 혼자 잘못한 게 아니고 실패해도 나 혼자 실패한 게 아니니까요.


책임은 나누고 판단은 없는 회의. 제가 앉아 있던 자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상식을 버리라는 얘기로 몰고 가지는 않습니다. 상식을 도구로 대하라고 권하는 쪽이에요. 도구란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어긋나면 내려놓고 다른 걸 찾는 것인데, 신봉은 도구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태도라고요. 자신이 도구를 쥐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도구가 그들의 정신을 쥐고 있다는 문장이 장 제목을 받아주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게 밀어붙였다가 한 번 잡아주는 리듬이 책 전체에 깔려 있어서, 읽는 동안 멀미가 나지 않았습니다.


2장은 온도가 달라집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감추고 싶은 밑바닥이 하나씩 있고, 그 방을 지나치는 습관이 오래되면 어느 순간 방의 주인이 내가 아닌 그 방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도입이에요.


로마노프 왕조의 가장 치명적인 비밀이 황태자의 혈우병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꺼냅니다. 제국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려 했고, 은폐하려 할수록 비밀이 왕조의 심장을 더 강하게 조여왔다고요. 감추어진 결핍이 더는 의학의 문제가 아닌 제국 전체의 명운을 가르는 약점이 되었고, 결국 그 틈새로 한 사람이 스며들어 제국의 영혼을 거머쥐었다는 정리입니다. 감추는 자는 언제나 감춤의 대가를 치르고, 그 무게는 처음엔 작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감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무너뜨린다는 대목이 뒤따르고요.


걱정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와 그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돈이 걱정되면 정말 돈만의 문제인지, 관계가 불안하면 정말 그 사람만의 문제인지 한 겹 더 벗겨볼 필요가 있다고요. 그 아래엔 무너져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이나, 결국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오래된 예감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걱정의 옷을 한 겹씩 벗겨보면 그 안에는 대개 훨씬 어리고 훨씬 상처받은 자신이 앉아 있다는 문장에서, 마흔 후반 아재도 별수 없이 조용해집니다.


여기서 결핍을 직시한다는 게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고 분명히 해둡니다. 없앨 수 있는 게 아니고 없애려 애쓸수록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되니, 그 자리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요. 인정하는 순간 결핍은 나를 뒤에서 조종하던 자리에서 물러나 내 앞에 놓인 하나의 사실이 되고, 사실 앞에서는 대응이 가능하다는 설명. 이 구분이 제일 쓸모 있었어요.


자신의 결핍을 아는 사람은 그걸 채워주겠다고 다가오는 얼굴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뭇거릴 수 있다고 합니다. 머뭇거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가장 조용한 근력이라고요.


권력을 정의하는 대목도 좋았습니다. 지위도 재산도 완력도 아니고 결핍의 지도를 손에 쥔 자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특권이라는 것. 그런데 바로 브레이크를 걸어요. 이 지도가 타인을 지배하는 도구로만 쓰이는 걸 경계한다고, 지도의 진짜 쓸모는 자유에 있다고 못을 박습니다. 목차 어투만 보면 조종술 강의처럼 보이는데 본문은 계속 이런 식으로 방향을 되돌려놓습니다.


5장에 가면 아예 독자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남에게 정답을 묻는다고, 타인의 시선에 부합하는 선택일까 세상이 정해둔 궤도에서 벗어나는 건 아닐까 홀로 걸으면 비웃지 않을까 하는 물음들 밑바닥에는 하나의 목소리가 흐른다고요. 누가 나 대신 결정해주었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 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목소리.


그리고 이 습관이 무서운 이유를 짚는데, 결과가 나쁠 때가 아니라 결과가 좋을 때라고 합니다. 결과가 나쁘면 상대를 원망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올 기회를 얻지만, 좋으면 그 결정을 내려준 사람의 안목에 더 매달리게 된다고요. 한 번의 성공적인 조언은 열 번의 예속을 부른다는 문장.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에게 묻는 대신 그 사람 얼굴을 먼저 떠올리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결정을 미루거나 회피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얹혀 가는 삶은 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피로하다고요.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가장 오래 아프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 부분은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굴 하나쯤 떠올릴 것 같습니다.


다만 정답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게 아무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그어둡니다. 여전히 묻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 경험에 귀를 기울인다고요. 대신 물음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 대신 답해달라는 물음이었고, 지금은 내가 놓치고 있는 각도를 알려달라는 물음이라고. 앞쪽은 결정권을 넘기고 뒤쪽은 결정권을 지킨 채 시야만 넓힌다는 구분인데, 사소해 보여도 삶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오답을 견디는 근육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을 구걸하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답이 무섭기 때문이고, 오답이 무섭지 않은 사람은 남의 답지를 훔쳐볼 이유가 없다고요. 그러니 훈련은 정답을 잘 찾는 능력을 기르는 쪽보다 오답을 담담하게 감당하는 태도를 기르는 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오답을 자주 겪는 사람이 큰 정답에 가까이 가는 걸 여러 번 봤다는 문장도요.


의외로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책이 역사를 함부로 주무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을 다룰 때도 개전 초기의 혼선과 보급 문제를 짚은 다음, 전쟁 내내 낡은 전술만 고집한 건 아니라고 덧붙여요. 1915년 대후퇴 이후 전술과 조직을 다시 정비했고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는 새로운 전술로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고요. 라스푸틴의 영향력을 말할 때도 그렇습니다. 황후가 그의 의견을 황제에게 전달한 건 사실이지만 니콜라이 2세가 군사적 결정마다 그의 축복을 구했던 건 아니고, 실제 작전 결정의 상당 부분은 참모총장 알렉세예프가 맡았으며 황제가 그의 뜻과 반대로 움직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적어둡니다. 영적 위안을 구한 것과 군사적 판단권을 넘긴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구분하면서요.


이런 자리에서 슬쩍 과장하고 넘어가면 읽는 사람 입장에서 나머지 주장도 믿기 어려워지는데, 그걸 안 하네요.


솔직하게 걸린 부분도 있었습니다. 목차와 본문의 온도 차이예요. 목차는 온통 명령형입니다. 도덕이라는 족쇄를 끊어내라, 자비 없는 공포를 심어라, 더 미친 광기로 압도하라. 이것만 보면 라스푸틴의 수법을 따라 하라는 책인가 싶어지는데, 막상 본문은 자기 밑바닥을 들여다보라는 조용한 권유에 훨씬 가깝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이미 이 책은 라스푸틴을 옹호하려고 쓰이지 않았고 미화할 생각도 없다고 못을 박아두기까지 했고요. 서점에서 목차만 훑어본 사람은 이 책을 완전히 다른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지은이 표기도 계속 걸렸습니다. 본문의 화자는 라스푸틴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며 "나는 그를 하나의 거울로 세워두고 싶다"고 말하는 시선이라, 인물 본인의 회고로 읽히지는 않아요. 콘셉트라는 건 알겠는데 저 같은 독자는 첫 페이지 열 때까지 좀 헷갈립니다.


그래도 프롤로그에서 제일 마음에 든 문장은 이거였어요. 이 여정의 끝에서 어떤 정답도 건네지 않을 것이라고, 정답을 건네는 순간 자신 역시 또 다른 라스푸틴이 되기 때문이라고요. 대신 함께 질문을 오래 붙들어보자고 청합니다. 질문을 오래 붙드는 힘, 그것이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유일한 자산이라는 말.


자기계발 서가에 놓인 책이 정답을 안 주겠다고 선언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책장에 꽂아두고 한 챕터씩 다시 꺼내 볼 만한 책 같아요. 챕터마다 독립적으로 끝나는 구성이라 순서대로 안 읽어도 되고, 무엇보다 문장이 짧고 단단해서 아무 데나 펼쳐도 읽힙니다. 다만 편안한 독서를 기대하고 집으면 좀 당황할 수 있습니다. 첫 페이지를 덮는 독자가 조금은 불편해지기를 조용히 바란다고 본인이 미리 경고를 해두는 책이니까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백 년 전 궁정 이야기가 회의실 이야기로 계속 번지는 게 신기했어요.


5장 끝에 이런 당부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주 작은 한 가지라도 좋으니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정해보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정한 밤은 어제와는 다른 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요. 대단한 결단도 아니고 저녁 메뉴 정도여도 된다는 뜻으로 읽혀서, 이건 해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네요. 아침에 얇은 겉옷 하나 걸치게 되는 이맘때에, 남의 답지 훔쳐보던 습관 한 겹 벗겨보라는 책을 만난 건 나쁘지 않은 타이밍인 거 같습니다. 여기 나온 것들 하나씩 실천해 봐야겠어요. 일단 오늘 저녁부터 제가 정해보겠습니다. 물론 집에서 최종 승인은 따로 받아야겠지만요.


광인은 시대가 낳는 게 아니고 비워둔 의자에 앉을 뿐이라는 문장에서 출발해, 남의 정답에 기대는 내 습관까지 조용히 들춰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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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상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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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잠든 사람의 꿈속으로 의사가 걸어 들어갑니다.


이 한 줄만 보고는 반신반의했어요. 이런 설정은 대개 결말에서 편의대로 비틀리니까요. 그런데 상권을 다 읽는 동안 이 소설은 한 번도 자기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희귀질환 '이레스'. 같은 날, 도쿄 서부에서, 네 명이 동시에 잠에 빠집니다. 일본 최대 규모의 신경·정신질환 전문병원에 근무하는 신경내과 의사 시키나 아이가 그중 세 명의 주치의를 맡아요. 세 명. 네 명이 아니라. 나머지 한 명은 왜 아이한테 오지 않는지, 그 질문이 상권 내내 따라다닙니다.


제1장 제목이 '드넓은 몽환의 하늘'입니다. 첫 번째 환자는 한쪽 눈을 잃은 여성이고, 그의 몽환 세계는 조종석이에요. 하늘을 향해 있던 사람이 하늘을 잃었을 때 그 사람 속에 남는 풍경이 어떤 모양인지를, 작가는 설명하지 않고 그냥 공간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여기서 이 소설의 문법을 이해했습니다. 세계의 형태가 곧 그 사람이 가장 붙들고 있던 것이라는 문법. 그러니까 꿈속을 돌아다니는 일이 그대로 진료가 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변호사입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남자의 무죄를 주장했던 사람이고, 그의 세계는 당연하게도 법정이고요. 조종석 옆에 법정이 놓이니 규칙이 우연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게다가 이 변호사 쪽에서 현실의 연쇄살인으로 슬쩍 다리가 놓여요. 이때부터 소설이 두 겹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안에서는 영혼을 찾고, 바깥에서는 범인을 찾고.


제가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면서 보았던 부분은 조종석이 나오는 대목이었어요.


사람이 잠들어 있는 동안 속에 남아 있는 게 결국 자기가 제일 잘하던 일의 풍경이라는 것. 그게 이상하게 오래 걸렸습니다. 마흔 몇 해쯤 살고 나면 주변에 자기 조종석에서 내려온 사람이 꽤 많아져요. 하던 일이 없어졌거나, 몸이 안 따라주게 됐거나, 자리에서 밀려났거나. 겉으로는 다들 멀쩡히 출근하는데 속에는 그 조종석이 아직 그대로 있겠구나 싶어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소설은 그걸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냥 그 사람 세계가 그렇게 생겼다고 보여줄 뿐인데.


세계관을 떠받치는 말들은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 영혼을 뜻하는 마부이, 마부이를 몸으로 되돌리는 의식인 마부이구미, 그리고 몽환의 세계마다 나타나는 기묘한 존재 쿠쿠루. 이 단어들이 이국적인 장식으로만 쓰이지 않는 게 좋았어요. 주인공의 할머니가 오키나와의 영능력자 유타였다는 설정과 맞물리면서, 의학과 주술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진료실 안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이라는 인물도 캐릭터 성격을 보면, 23년 전의 사건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기억이 환자의 꿈속을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올라와요. 남을 구하러 들어간 세계에서 자기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구조라, 진료 장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주인공 이야기가 됩니다.


응원하는 마음 반, 답답한 마음 반이었습니다. 자기 것도 감당 안 되는 상태로 남부터 꺼내러 들어가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나무랄 일인가 싶기도 했고요. 저도 회사에서 제일 힘들 때 오히려 남의 일을 더 떠맡은 적이 있는데, 도망인 걸 알면서도 그 편이 버티기 쉬웠으니까. 아이한테 잔소리하고 싶다가도 결국은 이해하게 됩니다.


맛보기로 하나 꼽자면 잠든 환자 곁에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는 장면들이에요. 화려한 꿈속 모험보다 이 정적인 장면들이 오래 남았습니다. 낫게 할 수 없는 사람 옆에 매일 앉는 일이 어떤 마음인지를, 소설이 상권 내내 조용히 묻는 거 같습니다.


후반부 끊김이 상당히 얄궂습니다. 하권을 빨리 보고 싶게 만드는, OTT 드라마 엔딩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음 편 궁금해서 결국 한 편 더 누르게 되는 그 기분 아시죠. 저는 상권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그 밤에 하권을 폈습니다. 피곤에 쩔어 월요일병 생기지 않는 날이면 그래도 좀 더 늦게 자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인물들이 자기 감정을 말로 꽤 길게 풀어내는 편이라, 건조한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면 촉촉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읽는 때는 여러 날 이어서 시간을 낼 수 있을 때가 좋습니다. 띄엄띄엄 읽으면 환자별 세계가 서로 겹쳐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치넨 미키토가 2020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에 올린 작품이고,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나왔습니다.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고 그게 상하권으로 두 권이에요. 받아 들었을 땐 좀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읽으면 속도가 붙습니다. 표지 두 장이 나란히 놓였을 때 한 장면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돼 있어서 꽂아두는 재미도 있고요.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가 더 궁금한 분이라면 맞으실 겁니다. 설정을 끝까지 지키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도요. 서점에서 상권만 집을까 망설이고 계시다면, 그냥 두 권 다 데려오세요. 상권 마지막 장의 그 끊김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밤공기가 선선해지면 두꺼운 책 한 질이 괜히 반갑더라고요. 창문 조금 열어두고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하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마저 풀어보겠습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꿈에 갇힌 사람들에게, 데리러 가겠다고 말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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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 딸이 기록한, 70세 원모씨 관찰 일기
정아름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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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부터 짚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연한 살구빛과 흰색이 위아래로 나뉜 바탕에 초록 글씨가 큼직하게 올라앉았고, 아래쪽에는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린 남자가 몇 개의 선으로만 그려져 있어요. 띠지에 적힌 말은 "아 출근하지마까". 웃자고 고른 문구일 텐데, 아침마다 비슷한 소리를 속으로 삼켜본 사람에게는 그리 가볍게 읽히지 않습니다. 이 한 권의 성격이 표지에서 벌써 드러납니다. 웃기면서 동시에 목이 좀 뻐근해지는 쪽이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울산에서 오래 방송 일을 해온 정아름 작가가 1957년생 아버지 '원모씨'를 관찰해 적은 가족 에세이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평범한 편이라 손에 쥐고 술술 넘기기 좋았습니다.


첫 장은 새벽 5시에서 출발합니다. 올해 일흔인 아버지는 약 40년을 가구점 사장으로, 약 8년을 주상복합 경비원으로 살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으니 출근 경력만 어림잡아 50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매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합니다. 가구점 시절에는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경비원이 된 뒤에는 그만두고 싶다고요. 그러면서도 겁이 많아 진짜로는 못 그만두는 사나이라고 딸은 적어 둡니다. 이불 정리, 물통째 들이켜는 보리차, 세안과 세두, 성모마리아상 앞에 쪼그려 앉아 넘기는 명언 달력까지 이어지는 아침이 꽤 자세히 묘사되는데, 저자는 그 흐름을 "첫 블록만 건드리면 연이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아빠의 루틴은 시작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연쇄적으로 반응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챕터 끝에 놓인 한 줄, 가장 무서운 사람은 그냥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에서 잠깐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이 이렇게 담백하게 쓰이는 걸 오랜만에 봤어요.


중간쯤 가면 결이 한 번 꺾입니다. 생방송을 앞두고 분주하던 어느 날, 딸에게 아버지의 문자가 한 통 날아옵니다. 평소에도 툭툭 던지던 종류의 말이었고, 그날은 딸도 화부터 났습니다. 분노 섞인 답을 보내놓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행복한 척을 했다고 솔직하게 써 놨더군요. 나중에야 그게 지금 마음이 힘드니 토닥여 달라는 신호였음을 알아차리는 장면에서, 이 책이 유머로만 굴러가는 기록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저자는 자신의 우울을 비에 젖은 무거운 솜옷에 비유하는데, 아버지와 딸이 같은 기질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그 대목에서 조용히 확인됩니다. 결론이 거창하지 않은 점도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연락이 오면 화내지 말고 회 한 접시 사 드려야겠다는 정도로 닫아요.


네 번째 장은 아예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요. 지금은 20년 가까이 술을 끊어낸 단주인이라는 문장이 바로 뒤에 붙습니다. 화목해 보인다는 댓글을 많이 받지만 사실 진작 찢어졌어야 할 가족이었다는 술회, 부모에게 이혼 서류를 직접 출력해 건넸던 청소년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한 문장을 옮겨 둡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 봤기에, 별일 없는 가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 서로를 향해 소리치지 않고,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저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회복의 방식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는 단주 모임에, 어머니는 성당에, 두 자매는 조금 일찍 독립해 부담을 덜면서 각자의 몫을 졌고, 그렇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달라졌다고만 적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서로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좀 나아진다고, 나도 그랬다고 건네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위로였습니다.

후반부에는 2024년 8월, 40년 동안 지켜온 가구점을 접던 날이 나옵니다. 재고를 다 팔아야 문을 닫을 수 있는 업종이라 한 달간 매장 세일을 했고, 오래 함께한 가구들이 하나둘 주인을 찾아갔다고 해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답합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거지." 작은 등에 장롱을 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던 세월이 그 한마디에 눌려 있습니다. 딸은 자신이 가구점 딸이자 부모의 치열한 삶의 수혜자였다고 뒤늦게 적고, 목구멍에 커다란 복숭아 씨앗이 걸린 것처럼 뻐근해진다는 말로 감정을 대신합니다. 그러고는 존댓말로 바꿔 감사 인사를 남기고 챕터를 닫아요.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원래 짧은 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여서인지 한 꼭지가 두세 쪽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더 들여다보고 싶은 대목이 금세 지나갑니다. 특히 알코올 중독을 지나온 시간이나 폐업을 결정하기까지의 망설임은 조금 더 길게 읽고 싶었어요. 아버지 본인의 목소리가 별지 인터뷰 정도로 한정된 것도 살짝 걸렸습니다. 관찰 일기라는 제목에 충실한 선택이긴 하지만, 원모씨가 직접 풀어낸 문장이 몇 편 섞였다면 입체감이 더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부모가 아직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청춘을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자식들에게, 질문을 미루지 말라고 알려주는 쪽이에요. 명절에 안부 몇 마디로 끝나는 대화가 익숙한 분이라면, 서로 표현이 서툴러 오래 오해만 쌓인 집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부모 세대의 성실을 답답함으로만 기억해온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는 것으로 정리되는 책이 많은데, 이 도서는 읽은 뒤에 전화를 한 통 걸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9월 끝자락,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부모님 목소리가 전보다 자주 궁금해지는데, 그 마음을 미루지 말라고 등을 떠미는 책을 만난 셈입니다. 곧 찾아올 명절에 어른들과 마주 앉기 전에 읽어두면 대화의 결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 50년을 출근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딸이 대신 기록해준, 웃다가 목이 뻐근해지는 가족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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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전부를 걸어보세요 -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유일한 길
박가을 지음, 김윤지 그림 / 체인지업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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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파란색이 이렇게 선명한 표지는 오랜만입니다. 채도 높은 바탕 위로 연둣빛 책등이 비스듬히 겹쳐 있고, 초록 동그라미가 여기저기 튀어 있어요. 서점 매대에 놓이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디자인입니다. 그런데 아래쪽 띠에 적힌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라는 한 줄과 7년이라는 숫자를 마주하고 나면, 안에 담긴 이야기가 이 밝기와는 다른 온도겠구나 싶어집니다. 판형은 손에 부담 없이 들어오는 보통 크기고 두께도 편안해서, 표지가 주는 인상과 달리 읽는 속도는 꽤 순합니다.


<독서에 전부를 걸어보세요>는 박가을 작가가 스물여섯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멈춰 선 뒤 7년을 책으로 건너온 기록입니다.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열 번 넘게 오갔고,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던 시절에 붙잡은 것이 책이었다고 해요. 그림은 김윤지 작가가 맡았고 체인지업북스에서 나왔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오래 머문 곳은 1장의 한 꼭지였습니다. 오랜 친구가 보내온 카톡이 이렇게 적혀 있어요. "가을아, 건강 괜찮아? 만나자. 너희 집으로 갈게. 잠깐이라도 보자." 저자는 몸이 안 좋다며 거절하고, 그 답장을 보내고도 한참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친구 이름이 화면에 뜨면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는 문장, 연락처를 몇 사람만 남기고 다 지워버렸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이어집니다. 아픈 사람이 세상과 끊기는 과정은 대개 이렇게 조용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같은 꼭지 후반부가 뒤집힙니다. 소식이 끊기자 어머니에게, 동생 SNS에까지 안부를 물은 친구가 있었고, 저자보다 더 많이 운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날 출국해야 했던 친구는 울면서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 그 어머니가 대신 빈소를 찾아와 손을 잡으며 "C가 꼭 가달라고 해서 왔어. 힘내렴."이라고 말합니다. 앞쪽에서 사람을 피하던 사람이 뒤쪽에서는 사람 때문에 버텼다고 적어요. 이 낙차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이 책의 힘인 것 같습니다.


방법론은 3장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원 북, 원 액션'. 한 권을 읽으면 실천할 한 가지를 정해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에요. 솔직히 이런 이름이 붙은 독서법에는 조금 심드렁한 편인데, 저자가 실패담을 먼저 적어둔 대목에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완독하고 나면 좋은 구절을 전부 실천하려 했다가 금방 지쳐 오래가지 못했고, 그 뒤로는 욕심을 덜어내고 한 권에서 한 가지만 확실하게 했다는 것. 잘된 이야기보다 이런 문장이 더 미덥습니다.


예시도 구체적입니다. <사피엔스>에서 뽑은 구절을 저자는 '어제 경험한 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만 기록하기'라는 한 줄 행동으로 바꿔 놓습니다. 거대한 통찰이 손에 잡히는 크기로 내려오는 장면이라 설득력이 있었어요. 같은 장에는 앙드레 지드의 말도 놓여 있습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저자가 하려는 말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어머니가 건넨 "너는 책을 가슴으로 읽었잖아."라는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독서를 스스로 치켜세우는 대신 늘 곁 사람의 입을 빌려 오는 화법이라, 자기계발서 특유의 들뜬 기운이 적어요.


오래 일해 온 사람으로서 눈길이 가장 오래 간 곳은 4장의 병실 장면이었습니다. 회진 때 주치의 뒤를 따르던 전임의가, 회진이 끝난 뒤 혼자 다시 찾아와 환자의 상태와 마음을 물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조직에서는 환자 한 사람보다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적어 두었어요. 그 문장이 병원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독자라면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게 됩니다. 이어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나오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무기력한 체념처럼 보여도 실은 강한 의지라는 해석이 붙습니다. 저자는 바틀비가 특정한 일이 싫었다기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구조 자체를 거부한 인물에 가깝다고 읽어냅니다.


같은 꼭지 뒤쪽에 실무적인 제안이 두 가지 나옵니다. A와 B 중 고르라는 조건 앞에서 "혹시 C라는 방법은 가능할까요?"라고 묻는 것, 규칙 밖에 예외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 다만 이 대목에서는 생각이 조금 갈렸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묻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지거든요. 신뢰가 없는 자리에서 꺼낸 예외 요청은 종종 더 좁은 답으로 돌아옵니다. 저자는 용기의 문제로 정리했는데, 조직 안에서는 타이밍과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은 책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물어볼 문장을 미리 갖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다 싶었어요.


김윤지 작가의 그림도 이 책에서 몫이 큽니다. 파란 이불을 뒤집어쓴 인물이 고양이와 앉아 "이불 밖은 위험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앞쪽에 있고, 뒤쪽에는 물가에 발을 담근 채 책을 펼친 인물 곁에 "내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꼭 같이 와서 읽어야지"라는 한 줄이 놓입니다. 닫힌 방에서 열린 물가로 나오기까지의 거리가 그림만 따라가도 보입니다.


한 가지 더 짚자면, 소개된 마흔 권의 해석이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를 세운다는 쪽으로 모입니다. 고전을 오래 읽어온 분께는 다소 빠르게 느껴질 수 있어요. 대신 이 책은 작품 해설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책을 어떻게 썼는지를 보여주려는 쪽이라, 그 목적에는 맞게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읽고 정리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가 있는데, 이 책은 읽은 뒤에 무엇을 바꿨는지를 계속 되물어 오더군요. 각 꼭지 끝에 독자가 직접 채우도록 비워둔 빈 줄이 그 질문을 대신합니다. 그 줄을 빈칸으로 남겨둔 채 책장을 덮는다면, 저자가 가장 아쉬워할 독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요즘입니다. 두꺼운 책을 붙들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분주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읽지 않기에는 저녁이 길어진 계절이에요. 이런 시기에 한 권에서 한 가지만 가져가자는 제안은 부담 없이 받아들일 만합니다. 올해가 석 달쯤 남았으니, 남은 시간에 문장 하나씩만 삶으로 옮겨봐도 꽤 달라져 있을 겁니다.


많이 읽었는지를 묻는 대신 오늘 무엇을 바꿨는지를 묻는 책, 7년의 공백을 건너온 사람이 건네는 조용한 독서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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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ㅣ 열린책들 테마 컬렉션 : 호러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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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은 바탕에 금색 선이 한 바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해골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둘레를 까마귀들이 맴돌아요. 옆쪽으로 깃털과 열쇠와 눈이 작게 박혀 있는데, 겁을 주려고 만든 표지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조용히 잠가 둔 상자에 가까웠어요. 판형은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데 하드커버라 손목에 제법 실립니다. 이 조합이 묘했습니다. 서둘러 넘기기 어렵게 만들어 둔 물건 같아요.


열린책들에서 내놓은 <테마 컬렉션>의 호러 편입니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묶여 나왔고 번역은 김석희 선생이 맡았어요. 아서 래컴의 삽화가 곳곳에 들어가 있는데, 「구덩이와 진자」에 붙은 재판관들과 촛불 그림은 본문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록작은 열두 편이고, 역자는 후기에서 이 책의 취향이 공포 쪽과 논리 쪽으로 갈린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읽어 가다 보면 그 말이 맞다 싶으면서도, 두 갈래의 뿌리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셔가의 붕괴」는 사건이 시작되기까지 꽤 오래 걸립니다. 서술자는 친구의 저택 앞에 서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그 이유를 붙들고 늘어져요. 창문 몇 개의 위치를 달리 배치하면 이 느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호수에 비친 저택을 내려다보며 확인까지 해 봅니다.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더 가라앉았지요. 그러면서 이런 문장을 적어 둡니다. 공포에 바탕을 둔 감정에는 그런 역설적인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첫 장에서 이미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무서움의 출처가 저 집 바깥에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뒤로 가면 어셔가라는 말이 건물과 핏줄을 함께 가리킨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러니 집이 무너진다는 말은 처음부터 사람이 무너진다는 뜻이었어요. 정면 지붕에서 시작된 균열이 벽을 타고 지그재그로 내려와 탁한 물속으로 사라진다는 대목은 두 번 읽었습니다. 다시 만난 로더릭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거미줄처럼 성긴 머리카락과 이상하게 빛나는 눈이 먼저 나오고, 반가워하다가 금세 식어 버리는 태도가 이어집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처음 보는 사람 같다는 감각을 포는 정확하게 붙잡아 냈어요.


「구덩이와 진자」는 첫 문장부터 결이 다릅니다. 나는 아팠다, 로 시작해요. 앞의 작품이 여러 장을 들여 만든 분위기를 이 작품은 한 문장으로 지나갑니다. 종교재판의 선고를 듣는 장면에서 출발해 감각이 하나씩 꺼져 가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재판관들의 얇고 흰 입술 같은 것이 잠깐 남았다가 그것마저 흐려집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대목을 이 소설의 중심으로 봤습니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고통이어서, 그는 차라리 무감각 쪽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어 해요.


눈을 떴을 때 이 사람을 붙든 두려움의 정체가 공백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볼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그를 떨게 만들어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벽에 표시를 하고 걸음을 세어 감방 둘레를 재기 시작합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잽니다. 나중에 그 계산이 두 배 가까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왼쪽에 벽을 두고 출발했다가 오른쪽에 두고 끝냈기 때문이었어요. 어둠이 사람의 감각을 어떻게 비틀어 놓는지를 포는 이런 방식으로 증명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갇힌 공간의 크기를 끝까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 책에서 가장 사람다운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서술자는 내일 죽습니다. 믿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며 먼저 선을 긋고, 훗날 자기보다 냉정한 누군가가 이 일을 평범한 인과로 정리해 버릴 거라고 예고해요. 실제로 그런 인물이 책 뒤쪽의 「모르그가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에 등장하니, 열두 편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구성입니다. 어린 시절 동물을 유난히 아꼈다는 회상으로 시작해 술과 함께 무너지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사건 자체는 옮기기 어려운 내용이라 여기서는 접어 둘게요.


다만 한 대목은 적어 두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하게 되는 충동이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금지가 동기가 되는 마음이지요. 이 논리는 「구덩이와 진자」에서 희망이 고통을 키우던 구조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불이 난 집 벽에 남은 고양이 형상을 두고 화학적인 설명을 붙이는 장면도 결이 비슷해요. 머리로는 납득이 되는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 둡니다. 서술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설명해요. 감각을 전부 잃었다고 해 놓고 그 상태를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는 식이라, 논리를 따지며 읽으면 걸리는 자리가 생깁니다. 1840년대 문장이라 수식도 길고요. 속도가 붙는 책은 아닙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신간을 여러 권 만나다 보면 빠르게 읽고 정리하는 습관이 붙는데, 이 한 권에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어요. 무게와 두께가 먼저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일찍 떨어지는 계절에 잘 맞는 책이었어요. 요란하게 겁을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어서, 조용한 시간에 한 편씩 꺼내 읽기에 알맞습니다. 다 읽고 나면 금색 테두리를 한 번 쓸어 보게 되는 마감이기도 하고요.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펼쳤다가, 자기 마음을 끝까지 들여다보려 한 사람들의 기록을 읽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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