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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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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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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5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또 그 알아듣지 못할 말을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주었다. 사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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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3 혐오는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눈앞의 화면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상상하는 모습이, 더 정확 히 말하자면 자신이 추상화한 개념의 모습이 그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화면을 본다는 것은 자신도 지금껏 알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에 있는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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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5 "우리는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습니다. 죽고 나면 땅으로 돌아가서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됩니다. 그게 우리 방식입니다."
참나무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게 원래 자연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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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5 그러나 씨앗은 살아남을 것이다. 수많은 씨앗 중 하나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것 이다.
하나만 있으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위해서, 우리는 기다린다. 지평선 너머에서 더럽고 거대한 기계의 날개 소리 대신 꽃가루가 날아오는 날을.
바람을 타고 우리가 뿌린 씨앗이 춤추며 돌아오는 날을.
그런 날이 정말로 온다면, 바로 그날 세상은, 인간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땅과 바다는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고, 사람과 자연은 햇살 속에 하늘을 향해 함께 자라나게 될 것 이다.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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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불사 연구소는 98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이 아니었다면 일상적으로 흔한 연구소, 연구소의 98주년 행사,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이겠거니 하지만 사실은 영생불사 연구소의 직원들은 진짜 영생불사하는 사람들이었고, 과장이 말단이라 하였을 때도 의아하면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 했지만 과장 밑으로 영생불사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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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지고 가야 할 먹고사는 걱정, 밥줄에 대한 집착이 무섭고, 그 집착이 앞으로 198주년, 298주년, 398주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연구소라는 곳에 발목 잡힌 채 끝없이 허덕여야 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슬 프고 무서웠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영생불사를 하건 안 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딱히 위안이 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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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불사하는 사람이어도, 영생불사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먹고사는 걱정은 똑같다는 것은 얼마나 웃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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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8개의 단편소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Maria, Gratia Plena] 였다.
마약범죄를 옳다고 미화하는 것도, 과거가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혼자만 살아남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서 폭력이란, 그것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얼마나 이다지도 잔인한 것인지 보여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라 생각하면 마약범죄를 일삼은 범죄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를 떼어놓고 이 사회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 모두 과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 곱씹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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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0 신이 남성이라면, 여성이 느끼는 일상적 위협을 절대로 이 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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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에서 일어난 위협은 삶을 송두리째 뽑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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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맞닿아있는 사회적 문제를 때로는 직관적으로, 때로는 작가님만의 감각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질문과 생각들을 남기게 한다.
소설들을 읽으며 공포를 넘어 참담하지만,
씨앗 하나, 그 하나가 희망을 바라보고 애도하고 다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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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