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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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너무  빠르게 읽는 내 악습을 고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집어들었던 책이다.

아~ 모순이다^^
책을 천천히 읽자고 설파하는 이 책을,  
한자리에서 두서너 시간 들여 뚝딱 읽어버리고 덮었다.
내 악습이 고질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책 내용이 그리 많은 시간을 요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말을 잠깐 들어보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뿐이었다는 사람에게는, 유감스럽지만 이 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실천편'에서는 저도 모르게 지나치고 읽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212쪽)


저자가 예상했던 딱 그만큼의 인상이었다.^^
천천히 읽자는 이야기는 '소유냐, 존재냐'를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일테다.
그러나 '실천편'에서는 '아~ 작가가 이런 장치를 삽입하는구나'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억지스러운 느낌(또는 비약한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이 드는 표현을 종종 만난다. 그 억지스러움은 작가의 불친절이나 미숙함으로 대개 오해받기가 일쑤인데, 사실은 어떤 풍부함을 뒤집어쓴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히라노가 예를 든 텍스트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 작가의 '마음'이라는 소설이다. 나도 읽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히라노가 인용하는 몇 페이지만으로도 히라노가 설명하고 싶은 것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인용문을 읽다가 소설 안에서 '형'이 주인공이 "선생님"으로 부르며 따르는 사람을 놓고 "에고이스트는 안 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생각은 뻔뻔한 생각이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도 이 대사는 참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 대목을 히라노는 이렇게 지적한다.


형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선생님'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을 곧 '에고이스트'라고 말할 수 있으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사람의 존재 의의를 '유익성'의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적 인간관이다. 형은 이 시대에 보급되고 있던 그러한 사고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동시에 이미 그후 일본의 궤적을 알고 있는 우리 현대의 독자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제공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의 맹아까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08~109쪽)


음. 그렇구나. 억지스러워보이는 데에 비밀이 숨겨 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이번 독서의 소득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카프카의 '다리'라는 단편을 만난 것이다. 카프카에게 이런 절묘한 콩트작이 있는줄 몰랐었다. 작품 자체도, 이것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도 참 마음에 들었다. 나만의 해석을 만들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소설은 매직 미러 같은 존재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 그 안에 있는 작자가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 비춰지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150쪽)


이 책은 고등학생들에게 선물해야 딱 좋을 책이다. 독서 홍수에 내몰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서의 즐거움과 천천히 읽는데서 나오는 독서의 힘이니까. 덤으로 언어영역 점수도 올라가고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히라노는 철학서를 읽는 방법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영락없이 언어영역 수업 같다.^^


책 205쪽

진짜 고등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충고도 있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간단한 것을 몰라서 고통스러워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국어 점수가 별로 좋지 않았다....그런데 어느날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본문과 문제를 하나의 연속된 문장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시험은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문장을 독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자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문장을 인용하여 그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발상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자 내 국어 성적은 순식간에 상승했다.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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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슐르 미루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 만남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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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이 시지에의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인 소녀」를 보면, 발자크의 '위르실 미루에'라는 소설이 등장 인물들의 삶에 미친 큰 힘이 나온다. 그것이 궁금하여 발자크의 장광설 문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번역본을 하나 샀다. 어문학사에서 나온 최○○님 번역본이었는데, 이 번역은 읽는 사람을 몹시 힘빠지게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벌구이(직역한 상태)만 하고 손을 대지 않고 출판했다..라는 인상을 주었다. 아니면, 대학원생들에게 1장씩 맡겨서 번역해오라고 숙제를 내 준다음, 수합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송스런 상상까지 들었다. 한 대사 안에서 '당신'과 '너'가 혼용하고,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에서도 '당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한국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엉성한 번역인데다가 오타도 허다하다. 동의할 수 없는 번역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18쪽 첫 단락은 주어를 '크레미에르 부인'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내가 읽기에는 '마쌩 부인'인 것 같다. 나는 최○○님께서 이 책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매우 창피하게 여기실 것 같다. 

서사가 탄탄하게 진행되는 힘이 아니었다면, 읽다가 던졌을 것이다. 다이 시지에의 책에 나오는 중국어 번역은, 등장 인물들이 감탄할 정도로 좋았다고 나오는데, 한국어 번역본은 왜 이렇지 모르겠다.T.T 다른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앞서 말한대로, 스토리가 몹시 탄탄하다.  인물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어떤 경지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위르실 미루에'라는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그녀가 받은 교육의 묘사 때문에 그마저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유산 상속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욕심, 시기, 음모, 어리석음..... 들이, '돈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게 만든다. 작품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노레라는 부자는 비교적 평범해서(그렇게 악착같지 않아서), 누구나를 대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에게 연민과 공포를 더 줄 수도 있으리라.

허접한 번역으로 읽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책의 절반 정도만 章별로 줄거리를 나열해 본다. (줄거리를 알고 읽으면, 훨씬 수월할 것 같다.)


1. 불안스러워진 상속인 

첫 장면은 1829년 프랑스 느무르 지방. 60세 가량의 '미노레 르브로'라는, 느무르의 부자가 파리에서 돌아올 그의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를 마중하려 가다가, 중간에 성당으로 길을 바꾸고 있는 장면이다.  그의 아저씨(미노레 박사)가 성당 미사에 참석한 일이 그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첫 장이라서,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계셔서, 그들의 관계와 대강의 인물됨을 파악하느라 나는 정신이 없다.


*미노레 박사 : 평소에는 신앙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요사이 신부와 친하게 지내고 있음.상속할 재산 때문에, 교회에 재산을 희사하고 죽을까봐 상속대상자인 세 집안에서는 벌벌벌 떨고 있는 듯.
*미노레 르브로 - 느무르 지방의 역마차 회사를 소유한 부자. 느무르 부부(미노레 르브로와 젤리 르브로)와 그들의 과다한 애정 때문에 건실하지 못하게 자라나는 그의 아들 데지레가 가장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고 있음.
*크레미에르 디오니스: 느무르의 징세인, 공증인. 예민하고 위선적인 사람.
*디오니스 부인: 미노레 박사의 조카딸쯤...
*구삘: 크레미에르 디오니스 씨의 수석 서기. 방탕하고 향락적인, 27살의 숏다리 청년. 추한 외모에 곱추임. 지방 신문을 혼자서 발간할 정도로 지식이 많고 이해관계에 밝음. 돈 때문에 데지레에게 접근하여 우정을 유지하고 있음.
*마쌩-치안 재판소의 서기. 큰 딸과 부인을 자기 업무처리를 하는데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탐욕스러운 부르조아.
*마쌩부인-미노레 박사의 모계 혈통의 증손녀.
*미루에- 제목에 등장하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는데, 아직까지는 별 정보 없다. 늙은 미루에 박사(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상속 대상자들이 과다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와 가까이 지내는 젊은 처녀라는 정도. 그래서 다른 상속인들이 그녀에게 매우 분노하고 있는 듯.



2. 상속재산을 가진 아저씨

느무르 지방의 가계도가 소개되고 있는데, 너무 복잡해서 족보 제작자들도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어서, 나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미노레家, 크레미에르家, 르부로家, 마쌩家 네 집안이 느무르 지방의 주된 부르조아 집안이다.이 집안들이 혼인관계로 얼키고 설켜 있다. 이 복잡한 모든 혈통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은 하나라는 저자의 설명은 아마도 집안들 간의 싸움이 우습게 펼쳐질 예정이기 때문인가? 그리고 상속 재산을 가진 아저씨인 미노레 박사에 대한 정보가 속속 펼쳐지고 있다. 

*미노레 박사-의사, 대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홍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 은퇴 시점에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기로 함. 병원장, 황제의 주치의, 과학원의 회원 같은 유수한 경력 때문에 상당한 재산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실제로 그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음. 은퇴를 결심하고 있던1813년, 우연히 느무르에 왔을 때, 미노레-르브로(박사의 큰형의 아들이기도 한, 역마차 회사 주인)의 도움으로 느무르에 집을 구입. 1815년 느무르에 내려왔을 때 10개월짜리 여자애를 데려옴.
*유르쓜르 미루에 - 박사의 죽은 부인 이름이기도 하지만, 박사가 돌보고 있는 고아 여자 아이의 이름이기도 함.

느무르에 내려 온 후, 상속인들은 박사에게 열심히 찾아다녔고, 박사는 세 사람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준다.(마쌩부부에게는 만프랑, 크레미에르 부부에게는 직장과 보증금, 미노레 르브로에게는 데지레가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도움) 그러나, 그 후로는 그들을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

3. 박사의 친구들

첫번째 친구는 샤쁘롱 신부. 무신론자인 미노레 박사가 샤쁘롱 신부와 절친하게 된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1)극단끼리는 통한다.(2)비슷한 실력의 놀이에 대한 취미와 비슷한 정도의 다양한 교양. 샤쁘롱 신부는 신앙과 관계없는 선행을 베풀기 때문에 덕망이 자자하다. 정작 본인은 늘 기운 옷을 입어야할 정도라서, 마을 사람들이 종종 새옷을 가져다 놓곤 하지만, 그 새옷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물질에 관심이 없는 양반이다. 오죽하면, 나쁜 인간들이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돈을 받아낸 후, 그 돈으로 땅을 살 지경이다.

박사의 두번째 친구는 드 조르디 씨이다. 스웨덴 왕실 부대의 전직 대위. 육군사관학교의 전직 교수. 미노레 박사가 수집 중인 신문과 잡지를 구독. 심하게 슬픈 푸른 눈의 노총각. 애연가였지만, 유르쓜르 때문에 담배를 끊다. 우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 노총각의 과거가 궁금해지는구먼.

박사의 세번째 친구는 봉그랑 씨. 과거에는 소송대리인이었고 지금은 느무르의 치안판사. 지혜와 학식이 풍부하고 관찰력이 예민한 사람. 45세의 나이에 홀아비가 된 그는 데르빌(빠리에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음)이란 아들을 하나 두고 있음. 교활해 보일 정도로 명석하며, 말할 때 침을 많이 튀기는 다변가임.^^

세 상속인들은 박사의 건강과 어린 유르쓜르를 저주하며,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재산이 상속될는지,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김칫국을 열심히 마시고 있다.

4. 젤리

젤리(미노레-르부로의 부인)는 마르고 키가 작은, 하지만 강단있어 보이는 여성이다. 미노레가 부자가 된 데에는 이 여자의 능력과 사람 부리는 능력이 한 몫 했으리라. 남편을 휘어잡고 그의 재산들과 하인들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는 그런 여자이다.  
아들을 찾으러 갔던 남편이 성당으로 온 것을 추궁하러 왔던 젤리는, 미노레 박사가 무척 경건한 모습으로 성당 미사에 참석한 것을 보고 상속재산이 위험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그녀의 아들 데지레가 멋지게 차려 입고 도착한다. 마침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유르쓜르를 보고 데지레는 홀딱 반한다. 사람들은 유르쓜르가 무신론자였던 박사를 개종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이제 상속인으로 자처하던 세 부부가 그 자격을 박탈당했음을 감지한다. 박사의 개종이 상속재산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겠다. 개종자들은 재산을 전부 성당에 희사라도 한단 말인가?

5. 유르쓜르
 
 드디어 박사가 기르고 있던 고아 처녀의 정체가 밝혀진다. 박사에게는 처남이 하나 있었는데, 그 처남이 죽으면서 자신의 딸을 박사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유르쓜르는 박사의 조카이다. 박사는 유르쓜르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양육했으며, 그 양육에는 박사의 현명한 세 친구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유르쓜르는 참으로 현명하고 선하며 신앙심 깊은 처녀로 자라났다.

미노레 박사의 유산을 둘러싸고..

이제 끊없는 암투가 벌어진다....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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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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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질병의 통역사라는 제목에 빠져, 책을 펴들고 나서
단편 세 편을 읽고, 멈추었다. 빨리 읽어버리기 싫어서이다.
그리고 가을 내내 천천히 읽었다.

소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일은 오랜만이다.
내가 만약에 글을 쓴다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이런 보석 같은 책을 만나다니,여러 종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올 가을은 아름다웠다고 해야겠다. 

 



 「잠시 동안의 일」 - 어떤 부부. 같은 집에 살지만 남과 다를 바 없이 사는 어떤 부부. 며칠 동안 저녁 1시간씩 정전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난데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 그들의 어그러짐은 아이의 사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한 때 푹 빠져 있었던 드라마 '연애시대'와 같은 설정이다. 그 드라마를 보고도 한참을 울었는데, 드라마의 원작 소설자가 아마도 이 단편에서 모티프를 얻은 건 아닐까. 별거를 결심했던 그녀는 마음을 돌리게 될까?


 「섹시 (Sexy)」- 저 단어...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저것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면? 또 달라질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뻔한 설정에 뻔한 깨달음에 뻔한 결말이었는데도 마음이 아릿해졌다. 어떤 직장녀가 유부남의 정부가 된다.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운 생활이 그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고독과 권태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환영하게 만들지 않던가. 그 유부남은 그녀에게 섹시하다고 했는데, 그 말은 그녀에게 세상 어떤 말보다도 감미롭게 들린다. 그녀가 다시 섹시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친구의 조카에게서이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너무나 생경해서,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물어야 했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불현듯 그녀는 정부 노릇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깨닫는다.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토닥토닥....고독하고 권태로운 도시 생활이 그녀를 경박한 애정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아이의 말을 통해 뭔가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있었으니까.... 그녀는 이제 한층 더 인생에 한 걸음 다가섰고 더 깊어졌다.  으아~ 곱지 않은 소재지만, 참 곱게 써진 소설이다.





 「질병의 통역사」-  다스 부인은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28살의 나이에는 벌써 세 아이의 엄마이다. 남편은 그녀의 불행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할 남자일 것이다. 젊은 여자가 엉겁결에 결혼하여, 집안일과 아이들에 매여, 피곤하면서도 권태로운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스 씨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잠깐 묵으러 왔던 남편의 친구가 그녀를 덮쳤을(?) 때, 그녀는 이미 '될 대로 되어라'라는 마음이 들 만큼 삶에 지쳤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두번째 아이는 바로 그 남자의 아이였고, 다스 부인은 그 비밀을 8년째 혼자 간직해왔다. 그런데, 인도 여행을 하는 중 관광안내인인 카파시 씨에게 그 비밀을 털어놓는다. 의사와 언어가 다른 환자를 위해 통역을 한다는 '질병통역사'라는 카파시 씨의 특이한 직업에 끌려서 말이다. '질병통역사'란 자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자신에게 통역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증상을 이야기한다. 가끔 자신의 생활 전체에 대해, 아이에 대해 살의를 느낀다고... 카파시 씨는 당황스럽다. 하지만 정곡을 찔러 보기로 한다.  "다스 부인,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고통입니까? 죄책감입니까?"
다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뛰어간다. 아이를 안고 머리를 빗겨준다. 다스 부인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거에 매어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 죄책감이든 고통이든 그것이 현재를 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아들'인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이라는 것? 그 아이는 내 아이라는 것? 
8년 동안 혼자 아프고 무서운 비밀을 간직해 온 다스 부인의 고통에 공감이 되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젊은 여자가 '가정'이라는 신성하고 무거운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다스 부인의 답답함, 우울, 죄책감, 분노, 허탈함....이런 것들이, 여자를 단지 모성애의 화신으로 여기는 흑백사진같은 관념으로부터 벗겨내 주는 소설이다. 그렇지만 또, 어머니이게 만드는 여성의 그 무엇과 아이들의 그 무엇에 대해 경외심이 들게도 해 준다.   
  


 「진짜 수위 (두르완)」- 플로베르가 쓴 글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마음 밑바닥을 잘 드러내 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능력은 자족의 능력이다.


 「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 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뉴스로밖에 들을 수 없고,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화날 만큼 자세히 배워야 하는 이민 2세들... 미국에 가 있는 막둥이 생각이 나서 우울해졌다.  내가 서울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서울 사람들을 어려워하게 되었다. 그들과의 사귐은 묘한 상처를 남긴다. 그들의 첫인상은 환한 미소와 절묘한 맞장구이다. 그것은 무뚝뚝한 남도 문화에서 자란 내게는 거의 벽이 없는 친밀함의 표시였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나도 그런 마음으로 대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들이 내게 두고 있는 묘한 거리감에 충격을 받는다. 그들이 정해 놓은 심리적 선을 나는 결코 밟을 수 없는 것이다. 표정없는 첫만남으로 시작해서, 깊은 속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는 남도의 교제 문화와는 너무도 달라서, 나는 서울 사람들이 평범한 대인관계에서도 서비스직종에 있는 사람들처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피르자다 씨는 자신을 초대한 릴리아의 집에 갈 때마다 어린 릴리아에게 과자를 주는데, 쌩큐라고 인사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그 대사를 아주 절감했다. "아니 왜 생큐라고 말하지? 은행의 출납 계원도 생큐라고 하고, 가게의 점원도 생큐라고 하고, 대출 기간이 지난 책을 돌려주어도 도서관 사서가 내게 생큐라고 하고, 국제 전화 교환원도 내 전화를 다카에 연결시키려다 실패하자 생큐라고 말해요.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죽어 묻히게 된다면, 내 장례식에서도 생큐라고 할 겁니다"(148쪽)
서울사람들과의 친교에서 늘 상처를 받는 나도,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는 국제뉴스를 볼 뿐이고, 학교에서는 늘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만 공부해야 하는 릴리아도 이 대사가 풍기는 쓸쓸함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센 아주머니의 집」 - 엘리엇은 방과후에는 센 아주머니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센 아주머니는 교수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살지만, 아직까지 운전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전이란 미국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잖는가. 운전을 잘 하게 된다는 것은 거기에 잘 적응을 한다는 것이고, 운전을 잘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운전 때문에 센 아주머니는 엘리엇을 돌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엘리엇의 어머니가 최상의 베이비(?)시터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센 아주머니가 엘리엇에게 끼친 그 유현함들을....엘리엇은 평생 잊을 수 있을까?







「축복받은 집」-이런 결혼도 있다. 서로 충분히 알기도 전에, 상대의 어떠함을 자신이 견딜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도 전에 그냥 해지는 결혼. 넉 달 전에 처음 만나 두 달 전에 결혼한 산지브와 트윙클 커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연애 한 번 해 본적 없는 숫기 없고 조용한 청년 산지브와 말솜씨 좋고 표정이 풍부해서 사람들에게 '와우~'라는 감탄사를 듣는 트윙클. 연애 두 달 동안은 서로의 공통점만 보이던 그들은 서로 잘 살 수 있을까?^^ 집들이를 준비하기 위해 청소를 해 나가는 와중에 그 집에 전에 살던 사람이 놔두고 간 물건이 속속 출현한다. 모두 기독교 냄새가 나는(진짜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런 물건을 집안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들이라서, 우직한 산지브는 그런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트윙클은 무슨 숨은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그 물건들을 찾아나가고 정성스레 전시해서 집알이 온 손님들에게까지 그 놀이의 즐거움을 전염시킨다. 서로 너무 다른 이 부부 앞으로 많이 싸우겠지만, 또 서로 톱니바퀴 맞물리듯이 살아갈 것 같다. 축복받은 집이란 그런 집일 것이다. 시끄러운 집^^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 - 29세의 비비 할다르는  내가 보기에는 간질 환자인 듯 싶다. 종종 일어나는 간질 발작 때문에 '신부수업-결혼-출산' 같은 인도 여성의 일반적인 삶을 가지지 못하고, 갖가지 치료법의 희생양이 되어 있다. 그녀의 보호자는 그녀의 사촌 할다르와 그의 아내인데, 비비를 결혼시키면 나을 것이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비비를 결혼시킬 일에는 아주 소극적이다. 그리고 노동력을 사용하고, 감금하고, 그들의 아이가 생겼을 때는 철저하게 격리시킨다. 비비가 인간다운(?)삶을 살게 된 것은 보호자라고 자처하는 할다르 부부가 비비를 버리고 이사를 가버린 후이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아, 경탄할 만한 생활력을 발휘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비가 이렇게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독자인 나도차도 예상못했던 일이라 신이 났다.^^ 할다르 부부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좀 모자란 듯 해요...라는 기준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주 폭력적인 생각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이 단편집의 마지막에 실린 소설이다. 대부분의 단편집은 첫소설만 멋지고, 나머지는 힘이 빠져있는 것이 많은데, 이 책은 마지막에 실린 단편마저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벵갈 청년이 런던을 거쳐 미국에 온다. 미국이란 '모두들 자신이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영국식 예의는 기대할 수 없는'곳 아닌가. 거기서 만난 하숙집 주인 크로프트 부인은 아주 인상적이다. 이 벵갈 청년에게 미국인이 달에 깃발을 꽂은 일에 대해서 '대단합니다'라고 칭찬을 해야지만, 자기 방으로 올라가게 하니, 나는 처음에 아주 미국식 자부심으로 가득찬 할머니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지금 연세가 100이 넘은 할머니이다. 남편없이 40년동안 피아노레슨을 하며서 자녀들을 길러낸 후, 여전히 혼자 살고 있는 여성이다. 그 사실을 알고 다소 충격을 받은 이 청년은 할머니에게 더 자상해지지만, 본국에서 아내가 왔기 때문에, 그 하숙집을 떠난다. 그러나 아내를 데리고도 다시 한 번 방문하고, 그 뒤로도 자주 방문하고, 또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는 큰 슬픔을 맛본다. 부인이 살아온 세월, 부인이 견녀낸 1세기 가까운 시간...그것도 씩씩하게 버텨온 이 여인이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는 이 청년에게 준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누군가는 말했다. 훌륭하게 산다는 것은 허상이라고... 산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거라고.... 크로프트 부인이 견뎌낸 1세기 가까운 세월이나, 낯선 대륙에 자신의 가정을 만들어 정착한 '나'의 삶은 모두가 다 '달에 깃발을 꽂은'것 만큼이나 훌륭한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소설 마지막 몇 문단을 인용해 본다.




몇 년 안에 아들은 졸업을 하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리라. 하지만 아들에게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낙나가는 따뜻하고 강인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준다. 아들이 낙담할 때마다, 아버지도 세 대륙을 건너뛰며 살아 남았는데 네가 극복하지 못할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 나는 나의 업적이 평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출세하기 위하여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고 또 내가 첫 번째로 진출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여행한 그 모든 거리, 내가 해온 그 모든 식사,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 내가 잠잤던 그 모든 방 등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것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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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내가 이 책을 읽으리라곤 나조차도 예상못한 일이다.
나에게 '한눈에 반하는 낭만적 사랑'이란
아랍어만큼이나 낯선 것인데다가,
Botton과의 첫만남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이었는데, 무지무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완독한 후,
'이 사람은 내 취향이 아니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책장을 덮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왜 집어들었던 걸까.
직장동료 미니씨가 '잘 읽히지 않아요'라고 했던 말이 우선 자극제가 되었다. 낭만적 사랑을 숭배할 나이의 미혼 여성에게 잘 읽히지 않는 책이란, 그냥 단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했고,
나는 어떤 식으로든 반추력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했다.  


2.
이 책의 한국판 제목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다.
나는 글의 제목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인데,
물론 출판사 쪽에서 '사랑에 대하여'이런 류의 평범한 제목보다는
이런 선정적(?)인 제목을 더 좋아했겠지만,
그럼에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그러단 말인가....라는 의문에 매달리는
한 젊은 철학자의 진지한 표정이 떠오른단 말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Botton을 글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겠다.
큭큭대면서 즐겁게 읽었다. 시치미떼는 듯 하면서도 정확한 묘사에 감탄하면서....

모든 것을 규정하고 언어화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이 이성과잉의 남자(이런 점에서 철학자보다는 물리학자가 훨씬 현실 적응력이 빠를겠다는 선입견이 생겨버렸다.)가
욕망에 이성을 굴복당하는 것도 ,
욕망의 전 과정에서  자의식의 잔소리를 선명하게 느껴가는 것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문학적인 괴물에 대해 이렇게 비문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니....
당신의 그 과학적 탐구정신에 박수를 보내는 바임.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치열하게 이성적으로 따져서 알게 되었는가? 클로이가 앨리스이고, 앨리스는 또 누구이고, 그 모든 여자로도 당신의 갈망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그래서 사랑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이고, 당신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지금의 고통이 덜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얻고 싶은 어떤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사랑에 대한 나의 냉소병이 고쳐진 것도 아니지만,
사랑의 상처를 겪은 한 남자가 이 글쓰기를 통해,
뭔가 정리를 해냈다는 점이 부러웠다.
눈에 확 띄는 통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격언일지라도
그것을 그냥 아는 것과 제대로 아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12쪽- 단지 우리 둘 다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0쪽-내 짐수레에는 독자적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내 짐수레를 권했다.--ㅋㅋㅋ 이 무슨 귀여운 변명이람.
22쪽-나 자신의 용서할 수 없는 감정적 미성숙 때문이기도 했다.
23쪽-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도-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나도 클로이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던 내 욕망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심,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 을 상대에게서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66쪽- Crucho Marx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101쪽 -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어떤 그림은 우리의 멱살을 쥐는 반면, 다른 그림은 아루먼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122쪽-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143쪽, 149쪽-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있을 뿐이다.
156쪽 - 결국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늘 낙인을 찍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늘 단순한 "나"일  뿐이며, 낙인 찍혀진 부분들 사이를 쉽게, 다른 사람들의 선입관이 부가하는 제한 없이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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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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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멋진 단편집을 만났다.
그래서 지금 사실 좀 흥분되어 있다^^
8개의 단편들이 모두 다 아름답다.
욕설이나 섹스 묘사는 낯설어서 즐기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뒷부분의 단편들은
앞쪽 것들보다는 덜 흥분한 채로 읽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도
소설 전체가 가지는 울림에 방해되지 않았다.


작가들이란
평범하지 않은 감수성과 관찰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할 때,
‘시각’에만 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으니,
‘청각 관찰력과 청각 감수성’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또는 '촉각 관찰력과 촉각 감수성'이라는 것도...
‘앨리슨’의 울음을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322쪽)서는
거의 탄성을 지를 뻔했다.

현대에 와서는 모든 감각 중에 '시각'이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 듯 한다.
모든 매체가 '시각'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제왕의 허접함과 평민들의 위대함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도
김중혁 님에게 박수를.....

시각으로든 청각으로든 촉각으로든 둔하고 거친 나로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그들이 글을 써내고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산다.



내가 지금 '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가지며 산다는 것
(이 소설의 어법을 빌리자면 비트가 있다는 것)
이 어떤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구별한다는데 말이다.
「무용지물 박물관」의 ‘메이비’나,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의 ‘이눅’은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무엇이 그들을 카이로스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이눅 씨의 대사 하나가
마음에 콕 박혔다.


“우와, 정말 잘 붙들었네요....  잘 붙들었잖아요....이런 걸 붙들어야 되는데, 전부 금방 지나가잖아요.”(61쪽)


「바나나 주식회사」,「회색 괴물」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일회용품이기 때문에,
인생은 타자기나 자전거처럼 후진은 불가능하고,
앞으로만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붙듦의 기술’이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익히려고 할 때는,
우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출발의 공포를 떨쳐 내는 것과 같다.
출발의 공포란 다름아닌 절대 속도의 공포이다.
시각은 내게 절대 속도의 존재를 알려 준다.
살면서 잘 뛰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냔 말이다.
재능이 없는 내가 뛰기 시작해도 메달권 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출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와 전력질주는 상관없는 말이다.
나는 내 속도로 전력질주하면 되는 거라고, 그게 빠르거나 느리거나 상관없는 거라고 깨닫는 순간 출발할 수 있다.
숙제는 '자기 스피드'를 찾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각이 주는 절대 속도의 정보가 아니라
촉각이 주는 '자기 스피드'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바람의 느낌이다.






녀석의 말대로 빠르거나 느리거나 그런 게 소용없는 거라면 뭐, 어떻게 뛰어도 상관없는 거니까. 그냥 전력질주하면 되는 거니까. 내 스피드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255쪽)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위치 이동'이다.

8개의 단편들 중에서 가장 많이 손때를 많이 묻힌 작품은 단연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이다.  「에스키모....」의 '지도남'(지도를 좋아하니까 내가 붙여준 별명이다)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원인이야 다르지만,
그도 나도 정말 많이 지쳐 있다.
세상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지만,
나는 그 중 가장 유력한 후보가 '자책감'과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일까?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지 않을까? (87쪽)


지도남이 어렸을 때부터 그린 모든 지도의 중앙점에는
그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지도남이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빌라를 왼쪽 귀퉁이에 그려놓고,
다시 지도를 그려보려고 시도하지만,
방향과 거리를 가늠해내지 못한다.
단지 중심점을 이동했을 뿐인데.
위치 이동은 특히, 중심에서 내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위치를 조금 옮겨보기만 해도, 특히 중앙점에서 내려오기만 해도
그는 좀더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은 '잘 뛰어야 한다'라는 부담감을 떨쳐버리는 것과도 같다. '자기 스피드를 찾'기만 하면 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지도남의 삼촌은 그에게 '툴레'로 오라고 한다.
 '세상의 끝'이란 뜻을 가졌단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훌륭하게 살고 싶었던 그에게
삼촌은



에스키모들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99쪽)


이라고 말한다.
사실 절대속도라든지, 훌륭함이라든지 이런 건
허상이지 않을까.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속도로 현재를 살아가고
현재의 그 어떤 순간들을
잘 붙들어 내는 기술을 터득하며 진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컴퓨터에서 글을 쓸 때처럼, 언제든지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의 어떤 정점들을 붙들 생각을 못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타자기로 글쓰는 것과 같단 말이다.
조금은 느린 속도로, 아니 자기만의 스피드로
진정을 다해
한 자 한 자 기록할 일이다.
일회용 인생인 나도
문득
타자기를 사서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아직도 이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고,
이 글에 대한 글을 10장 정도는 더 쓰고 싶은데,
컴퓨터에 글을 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져서
이만 멈춘다....^^


아참...
꼭 적어 놓고 싶은 문장이 있다.
나는 책에서 '작가의 말'을 아주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읽어본 작가 후기 중, 이것이 최고이다.
꼭 옮겨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나는 레고 블럭이다. 나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이뤄진 덩어리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블럭은, 지금 어디에선가 하얀 종이나 텅빈 모니터를 앞에 두고 뭔가를 쓰려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뭔가를 쓰기 위해 허공 앞에 앉은 모든 동지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영감 받았고 영향 받았으며, 그들의 문장과 생각과 철학을 디제이처럼 리믹스해 왔다. 그래도 된다면, 나의 가장 중요한 레고 블럭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377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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