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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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멋진 단편집을 만났다.
그래서 지금 사실 좀 흥분되어 있다^^
8개의 단편들이 모두 다 아름답다.
욕설이나 섹스 묘사는 낯설어서 즐기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뒷부분의 단편들은
앞쪽 것들보다는 덜 흥분한 채로 읽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도
소설 전체가 가지는 울림에 방해되지 않았다.


작가들이란
평범하지 않은 감수성과 관찰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할 때,
‘시각’에만 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으니,
‘청각 관찰력과 청각 감수성’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또는 '촉각 관찰력과 촉각 감수성'이라는 것도...
‘앨리슨’의 울음을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322쪽)서는
거의 탄성을 지를 뻔했다.

현대에 와서는 모든 감각 중에 '시각'이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 듯 한다.
모든 매체가 '시각'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제왕의 허접함과 평민들의 위대함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도
김중혁 님에게 박수를.....

시각으로든 청각으로든 촉각으로든 둔하고 거친 나로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그들이 글을 써내고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산다.



내가 지금 '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가지며 산다는 것
(이 소설의 어법을 빌리자면 비트가 있다는 것)
이 어떤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구별한다는데 말이다.
「무용지물 박물관」의 ‘메이비’나,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의 ‘이눅’은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무엇이 그들을 카이로스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이눅 씨의 대사 하나가
마음에 콕 박혔다.


“우와, 정말 잘 붙들었네요....  잘 붙들었잖아요....이런 걸 붙들어야 되는데, 전부 금방 지나가잖아요.”(61쪽)


「바나나 주식회사」,「회색 괴물」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일회용품이기 때문에,
인생은 타자기나 자전거처럼 후진은 불가능하고,
앞으로만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붙듦의 기술’이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익히려고 할 때는,
우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출발의 공포를 떨쳐 내는 것과 같다.
출발의 공포란 다름아닌 절대 속도의 공포이다.
시각은 내게 절대 속도의 존재를 알려 준다.
살면서 잘 뛰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냔 말이다.
재능이 없는 내가 뛰기 시작해도 메달권 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출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와 전력질주는 상관없는 말이다.
나는 내 속도로 전력질주하면 되는 거라고, 그게 빠르거나 느리거나 상관없는 거라고 깨닫는 순간 출발할 수 있다.
숙제는 '자기 스피드'를 찾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각이 주는 절대 속도의 정보가 아니라
촉각이 주는 '자기 스피드'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바람의 느낌이다.






녀석의 말대로 빠르거나 느리거나 그런 게 소용없는 거라면 뭐, 어떻게 뛰어도 상관없는 거니까. 그냥 전력질주하면 되는 거니까. 내 스피드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255쪽)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위치 이동'이다.

8개의 단편들 중에서 가장 많이 손때를 많이 묻힌 작품은 단연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이다.  「에스키모....」의 '지도남'(지도를 좋아하니까 내가 붙여준 별명이다)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원인이야 다르지만,
그도 나도 정말 많이 지쳐 있다.
세상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지만,
나는 그 중 가장 유력한 후보가 '자책감'과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단단히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일까?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지 않을까? (87쪽)


지도남이 어렸을 때부터 그린 모든 지도의 중앙점에는
그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지도남이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빌라를 왼쪽 귀퉁이에 그려놓고,
다시 지도를 그려보려고 시도하지만,
방향과 거리를 가늠해내지 못한다.
단지 중심점을 이동했을 뿐인데.
위치 이동은 특히, 중심에서 내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위치를 조금 옮겨보기만 해도, 특히 중앙점에서 내려오기만 해도
그는 좀더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은 '잘 뛰어야 한다'라는 부담감을 떨쳐버리는 것과도 같다. '자기 스피드를 찾'기만 하면 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지도남의 삼촌은 그에게 '툴레'로 오라고 한다.
 '세상의 끝'이란 뜻을 가졌단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훌륭하게 살고 싶었던 그에게
삼촌은



에스키모들에게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필요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99쪽)


이라고 말한다.
사실 절대속도라든지, 훌륭함이라든지 이런 건
허상이지 않을까.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속도로 현재를 살아가고
현재의 그 어떤 순간들을
잘 붙들어 내는 기술을 터득하며 진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컴퓨터에서 글을 쓸 때처럼, 언제든지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의 어떤 정점들을 붙들 생각을 못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타자기로 글쓰는 것과 같단 말이다.
조금은 느린 속도로, 아니 자기만의 스피드로
진정을 다해
한 자 한 자 기록할 일이다.
일회용 인생인 나도
문득
타자기를 사서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아직도 이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고,
이 글에 대한 글을 10장 정도는 더 쓰고 싶은데,
컴퓨터에 글을 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져서
이만 멈춘다....^^


아참...
꼭 적어 놓고 싶은 문장이 있다.
나는 책에서 '작가의 말'을 아주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읽어본 작가 후기 중, 이것이 최고이다.
꼭 옮겨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나는 레고 블럭이다. 나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이뤄진 덩어리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블럭은, 지금 어디에선가 하얀 종이나 텅빈 모니터를 앞에 두고 뭔가를 쓰려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뭔가를 쓰기 위해 허공 앞에 앉은 모든 동지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영감 받았고 영향 받았으며, 그들의 문장과 생각과 철학을 디제이처럼 리믹스해 왔다. 그래도 된다면, 나의 가장 중요한 레고 블럭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377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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