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장도연·장성규·장항준이 들려주는 가장 사적인 근현대사 실황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
SBS〈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제작팀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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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방송으로는 ‘지존파 납치 살인사건’ 딱 한 편을 시청했는데,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의 진행과 TV 뉴스나 신문기사로는 알 수 없는 이면의 이야기를 다루는 점이 흥미로웠다. 나는 관심있는 사건이 있으면 비슷비슷한 기사들을 모조리 찾아보고 방송이나 유튜브, SNS 등을 들여다 보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견해를 살펴보는 것을 즐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참 재미있다. 다루는 사건들이 가볍거나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서 극단적이고 잔혹하면서도 애잔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어서 몰입감이 엄청나다.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에서는 불과 50여년 전의 여성 인권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방적인 정조 강요와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성폭행 피해 여성에게 행실 운운하며 2차 가해를 행하는 것은 여전하다. 씁쓸한 일이다.
특별히 더 흥미진진했던 이야기는 공작명 KT 납치 사건,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 1992 휴거 소동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된 적이 있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분이 다리를 절게 한 것은 고문 때문이 아니라 의문의 교통사고였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여름날 온몸이 결박당하고 눈도 가려진 채로 배 밑바닥에 던져져 보낸 시간은 그야말로 극한의 공포였을텐데도 ‘나보다 더 좋은 대신이 나올 때까지 내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는 인터뷰 기록에 숙연해졌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읽고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빈민들에게 가해졌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불우했지만 꿈을 위해 정진했던 선량한 청년이 하루아침에 살인 범죄자가 되어 사라진 것이 안타깝고 딱하다. 정부와 언론이 결탁하여 만들어낸 가짜 뉴스는 그와 그의 가족을 두 번 죽인 셈이기도 하다.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은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자주 언급되었다. 술잔이 비었는데도 눈치 채지 못해 얼른 잔을 채워주지 않으면 ‘야, 서진 룸살롱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하는 식이다. 하지만 처참했던 사건 현장에 대해 알게된다면 누구라도 가볍게 농담으로 입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조폭 간의 계획된 패싸움이 아니라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무시무시한 살육의 주범은 뜻밖에도 또 선량한 20대 청년이다. 폭력조직에 몸을 담은 것은 본인의 선택이었고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사형집행 전까지 속죄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반드시 도왔다는 그는 범죄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것이다.

1992년에 나는 대학생이었다. 지방에 살고 있었고 종교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먼 산 불구경 하듯 휴거 뉴스를 지켜봤다. 1992년 10월 28일이 다가오자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뭐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했던 것 같다. 평소처럼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친구들과 웃으며 헤어졌다. '내일 보자. 볼 수 있다면.'이라는 장난스런 인사를 주고 받았다. 휴거를 준비하며 전재산을 교회에 바쳤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최근, 방송에 자주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한국사 강사가 역사 왜곡 등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다. 달달 외우게 하던 역사 공부와는 달리 재미있는 요소들을 강조한 스토리텔링으로 흥미진진하게 역사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강의 방식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던 것 같다. 학창시절에 역사에 흥미가 없었던 나로서는 뜻밖에도 재미있게 근현대사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것에 이 책을 읽은 의의가 있다. 구어체로 적힌 문장은 자연스럽지 않으면 읽기가 힘든데 이 책은 빼어난 문장력 덕분에 술술 읽힌다. 이 한 권에서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길 바란다.

#동아시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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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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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이어말한다
이길보라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영화감독, 글을 쓰는 사람, 차별과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는 그가 그저 주장하는 사람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변을 빈틈없이 살펴 본질을 꿰뚫어 보고, 질문을 던지고, 세심하게 듣고, 무엇보다 행동하는 사람이다. 목표를 향해 꺾이지 않고 차곡차곡 나아가는 사람이다. 유난스럽다거나 예민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한쪽 눈을 감고 지나친 것들, 안위를 위하여 슬그머니 내려놓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길보라 작가는 코다(KODA)이다. 코다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로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뜻한다. ’농문화와 청문화 사이의 교집합‘인 코다로서 그녀가 가지는 자존감, 코다 자긍심은 솔직히 뜻밖이었다.
농인을 접할 일은 많지 않았다. 1990년대 말에 통신사 광고로 화려하게 TV에 등장한 한 여배우의 부모님이 농인이라는 기사를 읽고 ’저런, 안됐다‘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유명해졌으니 부모를 부양할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장애인 수영심판 자격을 취득하고 수원에서 열리는 장애인 수영대회에 심판 실습을 나갔다. 비장애인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연마하고 대회에 참가했을 선수들과 끊임없이 선수들을 다독이며 격려하는 지도자들에게 감동했다. 농인 선수가 출발대에 섰을 때 한 여자 코치님이 출발심판 옆에서 수어를 하고 출발신호를 보내는 것을 보고 “멋있어요.”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그 자체의 답답함보다도 편견과 제도의 허점으로 알 권리에서 소외되는 것이 더 큰 불편함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수어통역이 제공되는 방송에서 귀퉁이에 조그맣게 등장하는 수어통역사의 표정과 손짓이 크나큰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다.
몇 년 전, 2년 넘게 광화문역에서 내려 출근하면서 장애인 단체가 이동권 보장을 주장하며 역내에서 어렵게 투쟁하는 것을 보고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무지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 그러면서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눈과 귀를 크게 열어야겠다는 것을 그리고 미력하나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무겁게 깨닫는다.

#이길보라 #동아시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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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문학동네 청소년 53
전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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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밖에서나의룸메이트에게

제목을 처음 보고는 ‘궤도’나 ‘룸메이트’가 어떤 은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우주기지, 인공위성, 지구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SF소설인가 하고 읽다 보니 아, 이 소설에 점점이 박힌 주제는 ‘사랑’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잔잔히 내리지만 어느새 강하게 젖어드는 봄비처럼 가슴이 뻐근하게 묵직해지는 사랑 이야기이다.
우주공학 최정상 연구단체이자 기업인 제네시스에서 운영하는 우주항공특별교육센터. 입학조건은 부모나 후견인이 없어야 하고 12세에서 15세 사이이며 제네시스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부모나 후견인이 없다는 건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의 아이들에게는 제네시스가 그들의 세계인 것이다. 작은 세계에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섯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깊은 고독, 그리움, 애틋함이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드물게도 모든 등장인물이 매력적이다.
감정을 사용하는 단계가 1에서 10까지라면 나는 1에서 10까지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높은 단계는 희미해지다 사라지고, 이제는 한 6,7까지만 사용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뜻밖에 이 소설을 읽고 눈물이 났다. 출근길 전철 안이라 애써 감정을 추슬렀지만 혼자 있었더라면 아마 내키는 대로 한참을 울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말의 유래는 생각 사(思), 헤아릴 량(量)일 거라고 생각한다며 생각하는 양이 자꾸만 많아지는 게 사랑 아니겠냐고 오래 전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SF소설을 찾는 학생에게도 사랑 이야기를 찾는 학생에게도 권하면 좋겠다. 그리고 전삼혜 작가님의 다른 소설도 찾아서 읽어야겠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진 내게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는 아득한 별처럼 개념으로만 존재했지. 하지만 넌 달랐어. 네 이름은 다른 단어와 달랐어. 모두가 자기 일에 열중하는 이유가 사실은 외로워서인 이곳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 간신히 찾아낸 이 자리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인 이곳에서, 푸르지만 그만큼 차가운 별 지구에서 나에게 온기가 되어 준 사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 그건 너의 이름이야.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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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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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사람들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소설.
새해를 이틀 앞둔 날, 별 볼 일 없는 도시의 39세 주민이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권총을 들고 들어간 곳은 현금 없이 운영되는 은행이었고, 경찰이 출동하자 놀라 도망치다가 한 아파트의 오픈하우스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허술한 은행강도는 8명의 인질을 잡은 인질범이 되어 버린다. 인질들은 조금씩 모자라거나 중2병을 호되게 앓는 것처럼 보인다. 결코 한 공간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이들은 과연 무사히 새해를 맞을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스톡홀름이 자주 언급된다. 우리나라의 서울처럼 잘난 사람들이 모이는 대도시의 의미 말고도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며칠 몸과 마음이 시달려서인지 초반에는 속도가 나질 않았는데 3분의 1을 지나면 책장을 술술 넘기게 된다. 유쾌하면서도 예리한 심리묘사 덕에 오쿠다 히데오를 떠올리기도 했다. 노인일거라 생각했던 작가가 실제로는 81년생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작가가 그려낸 노인들에 유독 깊게 공감했던 까닭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개운하다'고 소리내어 말했다. 내 자신이 맘에 들지 않지만 이런 나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랬다.
원작을 최대한 살려서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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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보랏빛 에디션F 8
히구치 이치요 지음, 유윤한 옮김 / 궁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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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보랏빛

히구치 이치요는 1872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삶을 마감한 여성 작가로 일본 지폐 5천엔의 인물이기도 하다. 1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나이 어린 여성의 소설이 신기하게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감동을 던져준다.
이 책에는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과 작가 본인의 일기가 일부 수록되어 있다. 여섯 편의 소설에서는 가난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삶을 견디면서도 변화를 갈망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섣달그믐>에서는 어린 나이에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주인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도 형편이 나쁜 외삼촌 댁을 도우려고 하는 미네가, 작가의 수작으로 평가 받는 <키재기>에서는 이름난 유녀의 동생으로 언젠가는 언니와 같은 길이 예정된 미도리가 등장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미도리의 학교며 동네 친구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또래들 사이에서도 집안의 돈으로 계급이 나뉘는 현상과 각각의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흐린 강>에서는 도도하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지만 사랑에 마음 약해지는 유녀 리키의 복잡한 감정을 잘 그려냈다. 작가의 소설에 유독 유곽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히구치 이치요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유곽 근처에서 잡화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사흘밤>에서는 부유한 남편의 열렬한 구애로 결혼했지만 출산 후 찬밥 신세로 전락한 세키가 등장하는데 남편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지만.....(현재도 세상의 평판과 내 가족의 안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백 년 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표제 소설인 <해질녘 보랏빛>은 미완의 작품답게 분량이 매우 짧지만 이대로도 하나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왜 하필 미완의 작품을 표제 소설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차별을 견디면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할머니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내가 5, 6세였을 때, 시골의 우리 동네에는 식모 언니가 몇 명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지금으로 치면 입주 도우미로 일했는데 기껏해야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의 나이였을 것이다.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담장 너머로 ‘홍도야 우지마라’ 같은 노래가 젓가락 장단소리와 함께 들려오기도 했다. 
특히 맨 뒤에 수록된 작가의 일기가 좋았는데 내일을 걱정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던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이해가 되고 어떤 심정으로 소설을 지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일기를 태워버리라는 말이 작가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하는데 언니의 말을 따르지 않은 막내동생의 결단에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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