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보랏빛 에디션F 8
히구치 이치요 지음, 유윤한 옮김 / 궁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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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보랏빛

히구치 이치요는 1872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삶을 마감한 여성 작가로 일본 지폐 5천엔의 인물이기도 하다. 1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나이 어린 여성의 소설이 신기하게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감동을 던져준다.
이 책에는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과 작가 본인의 일기가 일부 수록되어 있다. 여섯 편의 소설에서는 가난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삶을 견디면서도 변화를 갈망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섣달그믐>에서는 어린 나이에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주인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도 형편이 나쁜 외삼촌 댁을 도우려고 하는 미네가, 작가의 수작으로 평가 받는 <키재기>에서는 이름난 유녀의 동생으로 언젠가는 언니와 같은 길이 예정된 미도리가 등장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미도리의 학교며 동네 친구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또래들 사이에서도 집안의 돈으로 계급이 나뉘는 현상과 각각의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흐린 강>에서는 도도하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지만 사랑에 마음 약해지는 유녀 리키의 복잡한 감정을 잘 그려냈다. 작가의 소설에 유독 유곽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히구치 이치요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유곽 근처에서 잡화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사흘밤>에서는 부유한 남편의 열렬한 구애로 결혼했지만 출산 후 찬밥 신세로 전락한 세키가 등장하는데 남편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지만.....(현재도 세상의 평판과 내 가족의 안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백 년 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표제 소설인 <해질녘 보랏빛>은 미완의 작품답게 분량이 매우 짧지만 이대로도 하나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왜 하필 미완의 작품을 표제 소설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차별을 견디면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할머니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내가 5, 6세였을 때, 시골의 우리 동네에는 식모 언니가 몇 명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지금으로 치면 입주 도우미로 일했는데 기껏해야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의 나이였을 것이다.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담장 너머로 ‘홍도야 우지마라’ 같은 노래가 젓가락 장단소리와 함께 들려오기도 했다. 
특히 맨 뒤에 수록된 작가의 일기가 좋았는데 내일을 걱정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던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이해가 되고 어떤 심정으로 소설을 지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일기를 태워버리라는 말이 작가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하는데 언니의 말을 따르지 않은 막내동생의 결단에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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