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 - 타인의 고통이, 떠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양재화 지음 / 어떤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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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독서모임에서는 ‘나만 읽을 책을 골라 읽기‘를 하고 있다. 멤버별로 순서가 있다. 나는 몽골 소설인 《에리옌》을 골랐고, 그 다음은 매거진 B를 읽었고, 이번에는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을 읽는다.

원래 수필? ……안 읽는다. 여행기? ……안 읽는다. 그러니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읽을 책이 아니었다. 독서모임에서 회원들이 책을 고르면 이런 점이 좋다. 나는 존재조차 몰랐던 책들을 읽게 된다. 매거진 B, 이 책, 다음 책인 《경성의 아파트》까지. 다 몰랐던 책이다.



그러니 ‘다크투어‘는 이 이름조차 처음이었다. 고백컨대 ‘다크‘와 ‘투어‘는 한국어에서 영어 그대로 많이 쓰는 단어고, 특히 ‘다크‘는…… 유감스러운 쓰임도 있다. 그래서 약간 의심의 눈초리로 책제목을 읽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무지몽매한 인간이여.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게 왜 이토록 많은가? 많아서 재밌는 거지만.

이 책의 ‘다크투어‘는 20세기에 일어난 학살 관련 장소를 여행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 폴란드, 캄보디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칠레와 아르헨티나, 그리고 한국.

아르메니아에서 학살이 있었음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한국인이 많이 아는 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나 제주일 뿐이고, 실은 그마저도 잘 모르고……. 나도 그런 한국인이어서 내심 부끄러웠다. 어쨌거나 이런 사람은 맞기에 1장(아르메니아)이 아닌 2장(폴란드)에서 이 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저자 양재화는 신파적이지 않았다. 한껏 감정을 담지도 않았다. 담담하고 담백한 문체로 여행기를 써내려갔다.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 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쓰는 내용은 좀 견디기 힘들었지만, 저자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수필을 잘 안 읽어서 그렇다고 저자를 두둔하겠다.

이게 첫 번째 장점이고, 두 번째 장점은 주제에 걸맞는 책을 효과적으로 인용했다는 점. 인용한 문장들은 읽는 내내 내 머리를 마구 쳐서 다 검색해보고 있었다. 절판된 책도 많고 구할 길이 없는 책도 있어서 가슴이 좀 서늘했다.

세 번째로 내가 이런 학살 사건을 두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나은지 생각하게 했다. 허영과 냉소 사이의 역겹지 않고 견딜 만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세 번째 장점을 조금 더 말하고 싶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터널은 10미터 남짓이나 될까 말까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앞이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자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이어서 사라예보 포위 기간에 보스니아 군인이었다는 가이드가 뒷마당에 그림지도 한 장을 놓고 당시의 전황을 설명했지만, 사실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800미터에 이르는 땅굴을 걸어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기를? 쫄깃하고 짜릿한 전쟁 엔터테인먼트를? 가이드가 설명하는 내내 "나는 네 상처를 이해해"라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대던 중년의 호주 남자와 영상을 시청하는 내내 온갗 아는 체를 하면서 "어차피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도대체 왜 멀쩡한 건물들을 죄다 파괴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라고 투덜대는 젊은 미국 여자 때문에 더 아찔해졌다. 나는, 이 사람들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여기에 온 것일까. 나로 인해 생전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나라의 역사 강의를, 그것도 어설픈 내 통역을 통해 띄엄띄엄 듣게 된 엄마가 "나는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겠고 지루하다"고 한 말이 나를 포함해 그곳에 '비장하게' 모인 사람들의 어떤 반응보다 가장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_174~175p



나는 하지 않으련다. 내 일도 아닌 남의 나라 남의 민족 학살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관심을 가지며 무척 비장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이 사건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동정과 애도를 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를. 이런 부류의 허영을 품지 않으련다. 담백하지도 않고, 진실되지도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사실 진정 내 일처럼 여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한 남의 일처럼 덤덤하고 담백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허영을.


그러나 이런 허영심을 갖기 쉽고, 덤덤하고 담백하면 되려 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며 비난 받기 쉽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느꼈듯이 묻고 싶다. 나는 너의 상처를 이해한다고 계속 말하는 사람이나 온갖 아는 척을 다 하는 사람한테 진실성이 느껴지나? 그 사람들은 그저 이런 나에 취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되려 기만적이다. 특히 보스니아 내전처럼 같은 유럽인데도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이유 및 기타 다른 이유로 침묵한 서방세계를 보면서. 유감이니, 애도니, 뭐니 잘 떠들지만 사실은 사건을 진심으로 슬프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랬던 거겠지.


그렇다고 냉소로 일관하며 무관심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학살 앞에서 과장된 공감과 동정을 내놓는 사람은 많지만, 냉소적인 사람은 많이 없으므로 구체적인 예는 들지 못하겠다. 피해자를 욕보이는 발언을 인터넷에 표출하는 그런 사람들 빼고. 그게 냉소인가?


진실되지 않은 격한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절제하다가 되려 그런 것을 애도하는 피해자와 유족들, 다크투어를 떠나서 과한 감정을 보이는 사람들을 비웃게 되고 마는 것을 경계한다. 아예 무덤덤하게 여기는 것도 경계한다. 나는 감정을 강하게 터뜨리며 인터넷에 글 몇 줄 쓰고 그걸로 모든 일을 다 마친 것처럼 돌아서고 싶지 않다. 분노와 성찰은 일회성이 아니며 계속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잔잔한 슬픔을 안고 삶을 지속하는 것처럼. 장례식장의 유족이 장례식 내내 울지는 않는 것처럼.




여담.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대출해 읽었다가 좋아서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알라딘엔 전자책이 없어서 타 서점에서 구매했기 때문에 구매한 사람 리뷰로 뜨지는 않지만, 진짜 구매했다. 종이책도, 전자책도 다 내 손으로 만져 봤다.


이 책에서 다룬 학살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늘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반복되지 않도록. 반복될 것 같으면 목소리를 내서 막을 수 있도록. 부끄럽게도 잘 알지 못하고, 생각도 않고 살았던 게 사실이다.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결 편안하게 발 들일 수 있는 책이다. 다른 책으로 다리를 놔 주는 일에도 능하다(그야 인용한 문장이 죽여주니까.) '다크투어'로 검색하면 다른 책들이 나온다. 시간을 두고 그 책들도 읽어야지 싶다.




내가 견지할 만한 온도를 찾기 위해 내 태도를 다듬으며 허영과 냉소 사이의 역겹지 않고 견딜 만한 지점을 찾는 일이 지난하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어떤 갈등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어떤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 P5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넓게는 인간사의 ‘어두운’ 측면, 곧 죽음과 비극에 관련된 역사적 장소를 여행하는 모든 형태를 의미하고, 좁게는 단순한 재미나 호기심보다는 좀 더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이나 학살 현장 또는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던 장소를 찾아 그 사건을 기리며 교훈을 되새기는 여행을 말한다. - P7

공감도 학습이 필요한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훌륭한 선생이다. - P13

아르메니아인들이 하치카르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의 또 다른 상징은 아라라트산이다. 이 해발 5,137미터의 휴화산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이자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가 표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야페테의 후손 하이크는 아르메니아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브랜디의 이름으로 쓰일 만큼 친숙한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아라라트산은 튀르키예의 영토에 속해 손에 잡힐 듯 보여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 P35

1894~1896년, 첫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던 시기가 사진 기술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수천, 수만 단위의 학살이 수없이 자행됐을 것이다. 단지 이때의 학살은 사진 증거로 남아 ‘첫’ 학살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P38

튀르키예는 지금까지도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전쟁 와중에 벌어진, 양측 모두 피해를 입은 불행한 사건이라 주장하고 있다. 학살이 대부분 현재 튀르키예 영토 내에서 일어났기에 희생자 유해 발굴이나 조사 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수천, 수만 권의 연구 논문과 서적으로 쓰이고 다큐멘터리와 영화와 드라마로 재현되며 전 세계인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것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의 ‘대재앙’은 철저하게 잊히고 묻혔다. - P39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지참하라는 권고 또는 명령이 되풀이됐다. 호송대원들은 특히 금, 보석, 모피, 그 밖의 귀중품을 챙기라고 강조했고,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유대인 농부들에게는 작은 가축들까지 가져가라고 주문했다. 그들은 "공모의 분위기를 풍기며 ‘모든 물건이 너희들에게 다 쓸모가 있을 거야’라고 우물거리곤 했다".34 물품들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압수되어 ‘카나다(캐나다)’라는 은어로 불리는 창고로 보내졌다. 제3제국이 손쉽게 자원을 강탈하는 수법이었다. - P66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 P68

수용소를 정의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삶의 부정이 아니라는 것, 죽음도 피해자의 숫자도 전혀 수용소의 공포를 다 말해 주지 못한다는 것, 수용소에서 침탈된 존엄은 삶의 존엄이 아니라 죽음의 존엄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주장된 바 있다. (……)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시체들이 생산됐던 것이다. 죽음을 갖지 못한 시체들, 죽음이 연쇄 생산의 재료로 전락해 버린 비인간들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합당하고 또 널리 인정받는 해석에 따르면, 바로 이런 죽음의 격하야말로 아우슈비츠의 특유한 죄악을 이루는 것이며 그 공포에 걸맞은 이름이 된다. - P72

이는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마저 떠넘기려는 시도며, 그럼으로써 친위대의 양심의 가책을 더는 일이었다. 레비는 이를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라고 일갈한다. - P74

"따라서 파괴에 대한 중립적 태도는 무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고 합리화할 수 있는 전략의 결과였다. 중립은 타인을 돕는 위험과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면서, 면전에서 상해를 가하는 가해자들을 편드는 도덕적 부담도 지지 않는 안전한 노선이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은, 유대인의 위험과 고통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다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안전한 대응방식이었다." "그들은 단지 세금을 납부하고, 지역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예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뿐이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민족의 3분의 1이 사라지는 사이에 평범한 이웃들은 그렇게 방관함으로써 그 과정을 도왔다. - P78

학자들은 어떤 나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 전통이 뿌리 깊을수록, 경제가 피폐하고 국가체계가 붕괴되어 있을수록, 시민사회의 발달 수준이 낮을수록 유대인의 희생이 컸다는 점을 지적한다. - P82

스나이더의 논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건강한 민주국가 체계를 세우는 문제는 다시 시민의식의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가 학살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P85

그러한 일들은 어느 날 우주에서 떨어진 미치광이 몇 명이 저지른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 P87

이들이 가난을 가장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적극적으로 전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은 톤레사프에 떨어지는 노을뿐 아니라 그 비참함을 보러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이다. - P108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가 한 나라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설계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한 나라의 지식인층을 전부 죽이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 실험은 1970년대 중후반 캄보디아에서 실제로 벌어졌고, 그 설계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교사였다가 총을 든 군인이었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가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단행한 3년 8개월간, 캄보디아의 교사 80퍼센트와 의사 95퍼센트가 처형당하거나 아사 또는 병사해 사라졌다.69 기존의 론 놀 정부에서 일했던, 고등교육을 받은 관료와 다른 전문가도 마찬가지였다(정작 폴 포트 자신을 비롯해 당의 핵심 간부들은 프랑스 유학파로 일부는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 P112

정규교육은 고사하고 글도 깨치지 못한 하급 간부와 말단 군사들은 상부의 지침을 구두로 전달받고 부족한 부분은 제멋대로 해석해 집행했다. 어떤 마을에선 죄가 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어떤 마을에선 가벼운 경고로 그쳤다. 크메르루주군이 프놈펜 시내를 장악했을 때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하는 군사들을 본 한 상급 간부가 했다는 말은 이 상황을 잘 요약한다. "그저 어른 없는 빈집에 사나흘 동안 10대 아이들만 남겨 둔 격이지요." 물론 이러한 청년들의 객기와 무지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은 폴 포트를 비롯한 당 지도부였다. 그들은 ‘순수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그에 걸맞은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선호했다. - P124

아우슈비츠에서 줄무늬 옷을 입은, 거의 모두 백인인 수용자들 사진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었다. 심지어 얼핏 나와 닮은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긴장하거나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사태를 잘 몰랐을 아이들 중에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이마저 있었다. 나는 무엇을 상상했던 걸까? 관상에 불운을 타고난 별세계 인종? 나는 그제야 ‘희생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사람들을 나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각자의 우주를 품은 한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내 사진이 그 자리에 있었대도, 내가 그들 중 한 명이었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 P128

나로 인해 생전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나라의 역사 강의를, 그것도 어설픈 내 통역을 통해 띄엄띄엄 듣게 된 엄마가 "나는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겠고 지루하다"고 한 말이 나를 포함해 그곳에 ‘비장하게’ 모인 사람들의 어떤 반응보다 가장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 P175

손택은 서방세계에 사라예보의 참상을 부지런히 알렸으나 달라지는 것이 없는 현실에 끊임없이 분노했다. 그는 여러 글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과 인종청소를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서방세계가 그토록 철저히 묵과한 이유를 지적했다. 그것은 이 학살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이슬람교도기 때문이라고, 즉 서구가 이슬람을 바라보는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 보스니아를 은연중에 유럽의 바깥, 곧 자신들과 거리가 먼 비문명 세계이자 일종의 야만적 세계로 여기는 태도 때문이라고 손택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사라예보에 주둔했던 유엔군 사령관조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이곳 사람들은 세르비아계나 보스니아계나 모두 미쳤다’는 식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편견과 무관심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했다. - P176

‘이중 살인’이란 말은 희생자의 목숨을 빼앗고 장례의 존엄마저 박탈했다는 의미지만, 나아가 희생자 가족들에게서 애도를 앗아 감으로써 희생자만이 아니라 남은 가족들의 미래와 영혼까지 파괴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218

내게 4.3사건은 일종의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때까지 다녀온 세계의 제노사이드 현장 또는 기념관에서는 마음 한편으로 열심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두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나는 유대인도 집시도 심지어 유럽인조차도 아니었다. 사라예보와 모스타르에서 나는 이슬람교도도 가톨릭교도도 세르비아정교도도 아니었다. 킬링필드에서, 앞서 언급했듯이 나와 비슷한 얼굴을 보고 가장 큰 위기를 맞긴 했지만, 역시나 나는 가난하고 모든 면에서 뒤처진 공산국가의 국민이 아니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나는 또 한번 위기를 맞았지만, 그와 같은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이 다시 들어서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는, 4.3사건은 그 어떤 핑계로도 벗어날 구멍이 없었다. 그것은 발단부터 전개 과정, 결말, 이후의 취급까지 너무나 한국적인 학살이었고, 언제든 미친바람을 타고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참극이었다. - P248

학살의 발단이 남로당의 무장봉기임을 강조하는 ‘4.3사건’이라는 명칭은 제주도민들의 본격적인 저항이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도민 여섯 명이 사망한 3.1발포사건에서 비롯됐음을, 즉 학살의 발단에 대한 책임 또한 미군정에 있음을 가리려는 전략으로 느껴진다. - P256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조사를 통해 밝혀진 진상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제주도에서 좌익 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맞지만 제주도민 모두가 당원이나 정치 세력은 아니며 제주도의 좌익 운동에는 일제로부터 유난히 혹독한 수탈을 입은 제주의 역사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2) 미군정에 대한 반감 역시 친일 경찰·관리의 승계와 콜레라 창궐, 흉작에도 계속된 곡식 공출 그리고 직접적으로 육지 경찰들에 의한 3.1발포사건에서 기인했다, (3) 4.3무장봉기에 대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으며 제주도당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 P260

모든 학살의 아픔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렇게 내 여행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 책의 첫 장 아르메니아로 이어진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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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27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고라니 상, 진짜로 산 거 믿어요. ㅋㅋㅋㅋ 이 책 궁금하네요.

책식동물 2023-08-27 23: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뭔가... 이 책은 뭔가... 내가 진짜 내돈내산했다는 걸 너무 강조하고 싶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수필에 갖고 있는 기준이 박완서 미만 상대안함...인데(왜냐면 수필, 에세이 중 이게뭐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이 책... 좋았어요 근데 아마 저자의 태도가 어쨌든 담담하긴 하고 아감벤이나 손택이나 레비 등등 인용 및 언급이 많아서 그런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