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새벽 4시 반 - 최고의 대학이 청춘에게 들려주는 성공 습관
웨이슈잉 지음, 이정은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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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는 청춘은 아프다!!!

하버드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도 인상적이고, 누구의 권유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다른 대학에서 볼 수 없는 학풍과 교내 시설 등 다큐 프로에서 흔히 다루는 풍경이기도 하지요. 늦은 나이에도 학구열을 불태우시는 교수들도 하버드 하면 떠올리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하버드라는 타이틀이 주는 권력이나 명예가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세를 볼 때면 가히 왜 명문 출신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 교수들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책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산교육을 체험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버드 학생들은 공부만 잘 할 것 같은데, 인성적인 부분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하버드 교수들은 먼저 '사람'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전문적 훈련을 거친 인재만이 사회의 엘리트이며 사회 각층에서 봉사하며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세대에 걸친 하버드의 엘리트가 길러진 대학 교육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버드 새벽 4시 반>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어 집어 들게 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성공의 노하우나 공부 비법, 하버드 학생들의 삶의 자세 등은 전에도 충분히 들어왔고, 익히 상상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한 분야에 열정을 쏟는 것이나, 능력이 아닌 자신감에 기초하여 배우려는 남다른 적극적인 자세, 독립적으로 사고하기,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 문제에 당면해 스스로 답을 찾기, 똑같은 과제를 두고도 창의적으로 생각할 줄 하는 유용성과 주어진 시간을 가치있게 쓸 줄 아는 지혜 등 굳이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성공한 삶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하버드생들은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겠고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없거나 필요하기에 배워야 하는 모습이겠지요. 그 차이를 인정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 속에서 하버드 학생들처럼 삶을 대하고, 과제를 수행하고, 노력하고,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버드는 지금까지 여덟 명의 미국 대통령, 마흔 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서른 명의 퓰리처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해요. 이 기록은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요. 지금도 변함없는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인재들이 하버드에서 배출될 것입니다. 분명 하버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하버드 학생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입니다. 시간을 버리면 시간도 나를 버린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볼 때면 마치 시간이 넘쳐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루를 다 쓰고도 눈을 뜨면 또 하루를 맞이하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하면 좋은 일도 내일로 미루게 되지요. 오늘만 날인가? 내일 해도 괜찮겠지, 하고 으레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늘어나는 법이 없다는 말이 가슴에 꽂힙니다.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겠지요. 하버드 학생들은 그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익히 알고 있기에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고 하네요. 시간만큼 공평한 자원도 없습니다. 돈과 권력 등 불평등한 사회에 시간만은 가장 공평한 자원입니다. 시간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갈리겠지요. 왜 시간의 고수가 되어야 하고 1분 1초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1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바로 그 1분이 모여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된다. 언제나 1분의 시간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삶의 의미와 시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짧은 시간마저도 우리의 소중한 인생의 조각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본문 199쪽)

 

우리는 늘 보여지는 결과에 주목하지요. 누군가가 하버드에 들어갔다면 하버드라는 타이틀이 먼저 들어올 것이고, 누군가 일에 성공했다면 그 이후 찾아올 경제적 부에 관심을 두지요. 화려한 이력에 감탄하기도 바빠요.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이면에 감추어진 그들의 피와 땀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공하기 위해 어떤 목표를 두고 어떻게 공부해왔는지 그들의 숨은 열정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과 성취가 절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다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노력을 기울였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겠습니다. '새벽 4시 반'은 누군가에게는 곤히 자고 있을 시간입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대낮과 같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시간의 의미가 너무나 다르게 흐르는 하버드의 풍경입니다. 각자의 새벽 풍경은 어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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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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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인데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작년 길벗어린이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우연히 들렸다가 이 그림책이 전 세계 여러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 출간된 것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좋은 그림책은 어디에서든 통하는구나 싶었거든요. '강아지 똥'을 읽으며 느꼈던 가슴 뭉클함을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니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기쁨을 선생님은 느끼셨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이신 이오덕 선생님과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 두 분이서 30년간 편지로 나눈 우정을 담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동문학가 두 분이 나눈 서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사뭇 기대하게 되는데요,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대표 작가 두 분이 편지로 나눈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일 텐데 내내 건강이며 끼니며 살아갈 걱정에 우리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동화는 그에게 먹는 것보다 입는 것보다 가장 소중한 자유였던 것 같습니다. 동화를 쓰는 것이 곧 사는 것이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말합니다. '머리도 싹싹 깎아버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옷도, 속옷 겉옷 필요 없이 자루처럼 하나만 입고 음식도 하루 세 끼는 너무 많아요.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말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앉아 있고 싶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아마 오래오래 앉아 글을 쓰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글을 조금도 쓸 수 없는 날이면 몸이 아픈 것보다도 마음으로 아파하셨던 분이니까요. 편지 곳곳에 아동문학에 대한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보아도 보통 애정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동문학의 구원은 곧 인간이 구원받는 것과 견주어 말합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성인 문학가들보다 노력하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고 있듯이 아동문학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있으니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동문학도 온 생애를 바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224)
그래서였을까요. ​두 분의 아름다운 편지를 통해 무엇보다 작품의 진정성과 작품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솔직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 느끼지 못 했을 진짜 속마음을 통해서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모르고 읽었다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느꼈겠지만 작품에 녹아든 작가의 시대적 고민과 애환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서도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생활에서 도피한다는 것,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이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제 동화가 무척 어둡다고들 직접 말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꿈같은 얘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본문 159쪽)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껴집니다. 서로의 건강을 그 무엇보다 제일로 걱정하는 것에서부터 날씨 이야기, 동네 사람들 이야기, 일 이야기, 마음속에 담고 있는 생각,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정성껏 답변하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권정생 선생의 동네 마을 할머니의 죽음 앞에 눈시울을 적셨던 이야기도 그렇고, 아동 문협에서 회비를 독촉했다던 권정생 선생의 편지에 이오덕 선생은 만일 권 선생님한테 그런 것을 요구한다면 그런 회에는 탈퇴해 버리지요. 문협이란 단체가 그만한 혜택을 특수한 화원에게 베풀어 주지 못한다면 그런 단체에는 나 자신도 들어 있고 싶지 않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부끄럽고 가증스러운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에서 가히 어른다운 모습도 엿보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해 보게 됩니다.
어느 글에선가 읽었는데,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묻어난다고 합니다.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의 서간집을 통해 아동문학사의 큰 획을 그었던 두 분의 인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30년이란 긴 세월동안 건강과 끼니를 걱정해 주는 진정한 벗을 만나기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동화를 쓰려고 했던 일에 대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배려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여전히 척박한 출판계 현실 속에서 아동문학의 맥을 유지하려 애쓰신 두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고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두 선생님의 바람처럼 동화를 통해 많은 동심들이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두 분 다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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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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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배웠던 철학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철학은 삶에서 이해하고 느끼고 실천하는 것인데, 그때는 모든 과목이 암기 과목처럼 외우고 머릿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어느 사상가가 어떤 말을 남겼는지가 철학을 아는 전부였던 것 같다. 지금에서는 사상가가 했던 말 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어려운 철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고, 삶에 철학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시험에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재미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 수학도 시험 생각만 하면 지금도 머리 아프지만 우리 삶과 수학이 전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과학도 경제도 역사도 살다 보니 모르는 것보다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철학은 더욱 그렇다. 삶이 자꾸만 물음표 같을 때 철학은 느낌표가 되어주곤 한다. 삶은 정해진 룰도 없을뿐더러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달려가는 마라톤과도 같다. 그런 삶에 철학은 일상에 질문을 던지게 하고, 가야 할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치거나 잊고 있던 소소한 것들을 만나게 해주고 지루한 일상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며 소중한 것들을 품게 해준다. 일상 속에서 나의 삶을 가치있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 삶도 한층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철학이 밥은 먹여주진 않겠지만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겠다. 니체에게 삶을 배웠으며, 니체처럼 살고자 하는 철학자 이진우 교수님의 책 <니체의 인생 강의>는 우리가 인생에 무엇을 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니체의 시선과 니체의 마음으로 삶을 들려준다.
왜 니체일까, 무엇이 그토록 저자의 삶을 움직였을까​? 그에게 있어 삶은 사상이고, 사상이 곧 삶이었다. 그래서 왜 니체인지의 대답은 이상적이지 않고 거창하지 않은 데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한다면 왜 니체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 위대한 가치, 강철과 같은 관습과 규범 같은 것을 이겨내고 삶을 가볍게 만드는 힘,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아는 것, 자신의 약점에 유머로 포장할 줄 아는 위트,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가 우리 삶을 가볍고 유쾌하게 만든다. 무거운 중력을 극복해 나가는 힘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오고, 자신을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도 자기 자신을 아는 데서 온다. 절망과 허무의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부딪히겠지만 그 답은 자기 내부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니체를 아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 허무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100년 뒤에 찾아올 무시무시한 손님을 내가 지금 말하노라. 그것은 다름 아닌 허무주의다." 신은 죽었다며 돌직구를 날리고, 수많은 상징과 기호와 개념들을 정립한 니체의 사상이 궁극에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삶을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신이 죽은 시대에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므로 초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사물이 우리와 함께 영원회귀를 하고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우리,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신은 죽었다고 외치면서까지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의미 없는 존재가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 의미 없는 존재가 의미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줄 안다" (본문 50쪽)

 
저자의 구어체 덕분인지, 아니면 니체처럼 살고자 하는 저자의 진심이 책에 묻어나서인지 어렵다는 니체의 사상이 조금은 쉽게 다가온다. ​복잡하고 어려운 지적 허세는 다 걷어내고 니체에게서 배운 저자만의 삶의 노하우를 듣는 기분이랄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내가 지금 순종만 하는 낙타인지, 자신의 길을 갈 거라 포효하는 사자인지, 삶을 놀이하는 어린아이인지, 내가 저항하고 있는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나의 고통과 짐은 무엇인지, 수많은 물음표를 가슴에 품게 된다. 살면서 하나하나 답을 찾고 싶다. 죽을 때까지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삶에 질문을 던진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사유하는 동안 충분히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느꼈을 테니까 말이다. 니체의 삶은 말해준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은 결과에 있지 않고 운명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에 있음을.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우울이 뭔지도 몰랐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할 때도 있고, 자신을 그런 상황에 놓아보기도 한다. 외부 환경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꼴이다. 허무의 시대, 신이 죽은 시대에 우리가 대처하는 법은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지 않다. 아모르파티(amor fati),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운명을 수용해야 한다. 운명을 뛰어넘을 정도의 용기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인간의 실존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에 제거하려고 애쓰기 보다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이 절망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니체의 위로가 아닐까 싶다.
살면서 니체를 몰라도 좋았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알기 때문에 더 이해되고 생각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변화를 추구하고,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신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내일 거울 앞에 앉은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를 꿈꾼다. 욕망에 이끌리는 삶과 적당한 삶의 무게를 조율하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거울 앞에 있기를. 가볍게 춤을 추듯 인생을 연기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살고 있기를 마음속에 품는다.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I am as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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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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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난 혼자임을 알았어요.
그 아름다운 새는 날아가 버리고,
난 썰렁한 방 안에서 홀로 벽난로에 불을 지폈지요.
그래도 좋지 않나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길지 않은 나의 인생에도 그 시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책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 무엇도 뚜렷한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던 그때,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 꿈을 펼치는 것이 전쟁과도 같던 그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그때, 이 책은 위로였고 막연하게 마음속으로 품었던 불안과 고민들을 글로 보여주던 책이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여운이 너무나 강렬하여 친구들끼리 하루키 붐이 일었던 적도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책을 돌려보며 인상 깊은 구절들을 서로 나누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서로가 해소해 주던 때였지요. 지금은 아스란히 추억이 되어버렸고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책을 읽으며 쉽게 그때의 감정에 젖어드는 것을 보면 이야기가 주는 깊은 여운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명으로 출간된 이래 베스트셀러를 지켜오던 이 작품이 <노르웨이 숲>이라는 원제와 같은 제목으로 새롭게 번역이 되어 새로운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깊은 고뇌와 상처와 아픔이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청춘의 아픔을 대변하는 시대의 소설​답게 청춘 하면 제일 먼저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키를 이해하려면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960년대 말 고도성장기 일본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유독 하루키 소설을 두고 공감 했다랄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랄지 평을 두고도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1960년대 말의 일본을 배경으로 했다고 해서 이야기가 시대적인 아픔에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앓고 사랑을 알아가던 스무 살의 청춘들의 삶과 고독과 상처, 상실과 허무를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친구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공유한 와타나베와 나오코, 항상 셋이었던 그들이 둘이 되었을 때 사랑은 위로가 되어주지 못 합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고 말지요. 그리고 방황하는 청춘들은 이제 어딘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한없이 나약한 실존임을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게 되겠지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하고.
와타나베가 그랬듯 우리는 모두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원래 청춘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청춘이라고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먼지만 한 가시 같아도, 그게 내 상처이고 내 삶일 때에는 우주보다도 더 아픈 것이겠지요. 청춘이라서 아파야 하고, 싸워야 하고, 그래서 얻은 사랑이라면 좀 더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의 청춘들도 그렇게 그 시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나의 청춘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고요.
"우리들은 확실히 자신의 삐뚤어짐에 잘 순응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삐뚤어짐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적절하게 자기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없어서 또 그러한 것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디언들이 머리에다 그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지요. 그리고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겁니다."
사회적 시각인 비뚤어짐을 치유하고 거부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실은 자신의 실존임을 진정으로 고민했던 청춘들이 있어서 사실은 나의 청춘이 외롭지 않았고 힘든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은 청춘들에게 보내는 비밀 이야기를 담은 편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깊은 밤 왠지 모를 쓸쓸함이 엄습해 오는 방 안에서 조금씩 꺼내보며 그때의 나를 만나게 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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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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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인생의 책 한 권쯤은 저마다 품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에게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그런 책입니다. 정의가 무엇이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 줍니다. 앞날이 불투명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도 그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한 생명을 키우고 있는 지금에도 저에겐 변함없는 인생의 책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인생에도 품을 수 있는 책 한 권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용기가 되어주는 그런 책이지요.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설레었습니다. 인생의 책을 품게 해준 작가이다 보니 후속 작품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파수꾼>은 최근에 씌여진 작품이 아니더군요. <파수꾼>이 세상에 나오게 된 탄생비화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원래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되기 전에 씌여진 작품으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담당 변호사에게 우연히 원고가 발견되면서 55년 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하퍼 리의 후속 작품을 기다려왔던 분들에게는 <파수꾼>이란 작품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파수꾼의 원고가 작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발견하고 올해 전 세계 동시 발매되기까지 <파수꾼>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관계자분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그런 호기심을 품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재미있게도 어릴 적 말괄량이 스카웃이 아닌 성장한 스카웃, 진 루이즈가 등장해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되기 전에 쓴 작품인데도 마치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 작품처럼 읽힙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걸 작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독자들로서는 흥미로운 점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앨라배마 주, 흑인 인권 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격동의 시기입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스카웃이 휴가차 고향으로 오게 되고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파수꾼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진 루이즈는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실존은 살아있는 양심이었겠죠. 그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가 그녀가 아는 진실이었으니까요.

 

믿었던 사람이 실망을 시킨다면 그것은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산시킨다고 진 루이즈는 말합니다. 사실 인간 실존의 뿌리는 한없이 나약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은 고통스러운 힘든 여정입니다. 그 힘든 여정 앞에 양심과 신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지속되어야 할 삶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포기하고 도망갈 수 없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무엇과 맞서 싸워야겠지요. 한 번뿐인 인생,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할 수 있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각자의 삶에 파수꾼을 세워야겠죠. 하지만 진 루이즈는 파수꾼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가르쳐 주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주는 파수꾼을요. 진 루이즈에게 아버지 애티커스는 파수꾼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치가 곧 어린 스카웃에게는 성경 말씀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삼촌은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고,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도전하고 맞서 싸워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에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나는 네가 강박 관념 때문에 우쭐대면서 저지르는 그 성가신 잘못 좀 그만했으면 해. 네가 계속 그러면 우리는 따분해 죽을 지경이 될 거야, 그러니 그건 좀 멀리하자.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본문 372쪽)

 

그렇게 삶은 도전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진 루이즈가 맞서 싸우는 세계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부조리한 사회였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던져 악을 쓰고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분명 있었겠지요. 그리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는 자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큰 그림을 그려본다면 어쩌면 당시의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벽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1950년대 노예해방과 인종차별 문제는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지금에야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 소설로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에 맞선다는 것은 저자가 보여준 삶에 대한 도전이고 결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자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문제에 대해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겠지요. 시간이 흘러 과거를 추억할 수 있겠지만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매 순간 각자의 양심에 따라 후회 없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파수꾼>은 5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뒤늦게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지만 현실은 55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여전히 우리에겐 맞서 싸워야 하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 멀어져 가는 남과 북의 관계, 우리 사회의 갑질 문제, 책임지지 않는 사회 등 소통하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습니다. 어떤 방법이 되었든 각자의 양심을 가지고 후회 없이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는 우리 자신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진정한 어른이 될까요? 진 루이즈는 그 답을 관계의 균형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날 것으로서의 '나'와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 균형을 찾아갈 때 우리는 좀 더 달라진 '나'를 찾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의 어린 스카웃에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회적 일원으로서 균형을 찾아가는 진 루이즈를 보게 됩니다. <파수꾼>은 성장과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데 멋진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세계가 교란되지 않기 바라면서, 나를 위해 애써 그것을 보존하려 하는 사람을 짓밟고 싶었다. 그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것은 비행기와 같은 듯하다. 그들은 저항력이고 우리는 추진력이어서, 우리는 함께 그것을 날게 만든다. 우리가 너무 많으면 머리가 무겁고, 그들이 너무 많으면 꼬리가 무겁다. 그것은 균형의 문제다. 나는 아빠에게 이길 수 없고, 아빠와 한편이 될 수도 없다. (본문 391쪽)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우리, 물질적인 것에 눈이 멀어 있는 우리. 어쩌면 나도 우리도 눈을 뜬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여전히 다듬어져야 하고 비뚤어지고 부족한 자신이 보입니다. 우리 각자 양심은 지키며 살아야겠지요. 나만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걱정해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아끼는 독자로서 전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독자로서도 영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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