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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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인생의 책 한 권쯤은 저마다 품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에게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그런 책입니다. 정의가 무엇이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 줍니다. 앞날이 불투명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도 그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한 생명을 키우고 있는 지금에도 저에겐 변함없는 인생의 책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인생에도 품을 수 있는 책 한 권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용기가 되어주는 그런 책이지요.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설레었습니다. 인생의 책을 품게 해준 작가이다 보니 후속 작품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파수꾼>은 최근에 씌여진 작품이 아니더군요. <파수꾼>이 세상에 나오게 된 탄생비화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원래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되기 전에 씌여진 작품으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담당 변호사에게 우연히 원고가 발견되면서 55년 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하퍼 리의 후속 작품을 기다려왔던 분들에게는 <파수꾼>이란 작품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파수꾼의 원고가 작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발견하고 올해 전 세계 동시 발매되기까지 <파수꾼>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관계자분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그런 호기심을 품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재미있게도 어릴 적 말괄량이 스카웃이 아닌 성장한 스카웃, 진 루이즈가 등장해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되기 전에 쓴 작품인데도 마치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 작품처럼 읽힙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걸 작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독자들로서는 흥미로운 점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앨라배마 주, 흑인 인권 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격동의 시기입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스카웃이 휴가차 고향으로 오게 되고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파수꾼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진 루이즈는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실존은 살아있는 양심이었겠죠. 그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가 그녀가 아는 진실이었으니까요.

 

믿었던 사람이 실망을 시킨다면 그것은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산시킨다고 진 루이즈는 말합니다. 사실 인간 실존의 뿌리는 한없이 나약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은 고통스러운 힘든 여정입니다. 그 힘든 여정 앞에 양심과 신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지속되어야 할 삶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포기하고 도망갈 수 없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무엇과 맞서 싸워야겠지요. 한 번뿐인 인생,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할 수 있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각자의 삶에 파수꾼을 세워야겠죠. 하지만 진 루이즈는 파수꾼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가르쳐 주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주는 파수꾼을요. 진 루이즈에게 아버지 애티커스는 파수꾼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치가 곧 어린 스카웃에게는 성경 말씀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삼촌은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고,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도전하고 맞서 싸워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에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나는 네가 강박 관념 때문에 우쭐대면서 저지르는 그 성가신 잘못 좀 그만했으면 해. 네가 계속 그러면 우리는 따분해 죽을 지경이 될 거야, 그러니 그건 좀 멀리하자.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본문 372쪽)

 

그렇게 삶은 도전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진 루이즈가 맞서 싸우는 세계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부조리한 사회였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던져 악을 쓰고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분명 있었겠지요. 그리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는 자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큰 그림을 그려본다면 어쩌면 당시의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벽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1950년대 노예해방과 인종차별 문제는 시대의 과제였습니다. 지금에야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 소설로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에 맞선다는 것은 저자가 보여준 삶에 대한 도전이고 결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자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문제에 대해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겠지요. 시간이 흘러 과거를 추억할 수 있겠지만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매 순간 각자의 양심에 따라 후회 없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파수꾼>은 5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뒤늦게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지만 현실은 55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여전히 우리에겐 맞서 싸워야 하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 멀어져 가는 남과 북의 관계, 우리 사회의 갑질 문제, 책임지지 않는 사회 등 소통하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습니다. 어떤 방법이 되었든 각자의 양심을 가지고 후회 없이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는 우리 자신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진정한 어른이 될까요? 진 루이즈는 그 답을 관계의 균형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날 것으로서의 '나'와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 균형을 찾아갈 때 우리는 좀 더 달라진 '나'를 찾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의 어린 스카웃에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회적 일원으로서 균형을 찾아가는 진 루이즈를 보게 됩니다. <파수꾼>은 성장과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데 멋진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세계가 교란되지 않기 바라면서, 나를 위해 애써 그것을 보존하려 하는 사람을 짓밟고 싶었다. 그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것은 비행기와 같은 듯하다. 그들은 저항력이고 우리는 추진력이어서, 우리는 함께 그것을 날게 만든다. 우리가 너무 많으면 머리가 무겁고, 그들이 너무 많으면 꼬리가 무겁다. 그것은 균형의 문제다. 나는 아빠에게 이길 수 없고, 아빠와 한편이 될 수도 없다. (본문 391쪽)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우리, 물질적인 것에 눈이 멀어 있는 우리. 어쩌면 나도 우리도 눈을 뜬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여전히 다듬어져야 하고 비뚤어지고 부족한 자신이 보입니다. 우리 각자 양심은 지키며 살아야겠지요. 나만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걱정해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아끼는 독자로서 전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독자로서도 영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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