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가가 있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런 작가다. 그의 소설은 삶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익숙한 일상에 작은 틈
을 만들고, 그 틈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가호』를 읽으면서도 그
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평소에
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용히 떠오른다.
하루키의 작품에는 세상에 완전히 섞이지 못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때로 외로움을 느끼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히며, 자신이 무엇을 원
하는지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는 않는다. 우리 역시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살아가는 듯 보여도 마음속에는 말로 설명하
기 어려운 공허함이나 막연한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 이
유는 어쩌면 그런 감정들을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삶의 한 부
분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 하루가 문
득 그리워지기도 하고, 기쁜 순간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사소
한 일처럼 보이는 일이 오래 마음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감정들을 충분히 들여다보
기보다 빨리 정리하고 다음 일로 넘어가려 한다. 슬픔에는 이유를 찾고, 불안에는 해결책을 마련
하며, 설명되지 않는 마음은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반드시 모든 감
정에 이름을 붙이거나 하나의 의미로 정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이해하는 것보
다 그 감정이 머물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을 아쉬워하
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붙잡으려 하고, 일어나지
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느라 정작 지금 눈앞에 놓인 것들을 놓치곤 한다. 나 역시 해야 할 일
을 해내느라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해도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
는지는 잊기 쉽다. 일과 책임에 집중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거
나, 내 생각만으로 상황을 판단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일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모든 순간
에 완벽할 수는 없고, 아무리 애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일에 분명한 이
유가 있는 것도 아니며,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 두어야 하는 일도 있다. 삶은 생각보다 많
은 것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둔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일
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것들을 안고서도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일인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내가 살아가는 속도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는 데
익숙하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다음 목표를 세우고,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
히 움직인다.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성실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맡은 일을
다하고 책임을 지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마음을 쏟다 보면 정작 내 마
음이 어디쯤 와 있는지는 살피지 못할 때가 있다. 몸은 하루의 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지쳐 있거나, 오래전부터 외면해 온 감정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뒤처진 마음을 기다려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다
른 세계에 머물다가 돌아오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해결되지 않은 고민은 그대로 남아 있고
내일 해야 할 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당장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두르지 않고 문장을 따라가며, 평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
던 감과 마주할 수 있다. 그렇게 잠시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때
가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즐거움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설렘도 좋지
만, 익숙한 작가의 문장 속에서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은 더욱 특별하
다. 작가가 내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고, 내가 겪는 문제에 직접적인 해답을 줄 수도 없
다. 하지만 어떤 문장은 내가 느끼고도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을 대신 말해 주고, 어떤 이야
기는 혼자만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문장과 감정이 한동안 마음에 남는 이유일 것이다.
『가호』를 읽으며 다시 생각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분명한 방향과 결론이 필요한 것
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어떤 선택이 옳은지 확
신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서둘러 답을 찾으려 하지만,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할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고,
끝내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확실함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좋은 책은 어쩌면 길을 알려 주기보다 잠시 쉬어 갈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
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잠깐 쉬었다고 해서 길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
다.
『가호』를 덮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고, 살아가면서 마주
할 고민과 걱정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든 것을 서둘러 이해하려 하지 않고, 때
로는 멈추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것들을 모두 붙잡을 수는 없겠
지만, 적어도 그 곁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조금 더 천천히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