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1890~1918) 오스트리아> 편

에곤쉴레의 작품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기 시작할 때가 민음사세계문학전집 [인간실격]의 표지를 보고 포스팅할때였습니다.

상당히 독특한 드로잉 기법의 그림이라 다른 예술그림과는 많이 달랐고, 특히 내면의 자화상이라는 측면에서 감상하니 초췌하고 몰골이 앙상한 그림조차 천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에곤 실레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고, 액자 테이블도 구입했습니다.


민음사세계문학을 한권 한권 읽을때마다 표지의 명화 작품을 공부해나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책속의 감상작품

* 다나에(클림트의 ‘다나에‘영감)
* 앉아있는 남성누드
* 자화상(1910)
* 자화상(1911)
* 삼중자화상
* 여성 누드
* 검은 스타킹을 입은 여자
* 뒤엉켜 누운 두 소녀
* 예술가가 활동을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 포옹
* 죽음과 소녀


‘19금‘ 에곤 실레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123쪽


어린 실레는 오스트리아 툴른 역장이었던 아버지 아돌프 실레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당시에 그린 그림이 온통 기차, 철로, 신호등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 고통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성병인 매독을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레의 어머니 마리아에게까지 감염되어 아이가 사산되는 불행을 겪습니다.
이어 실레가 세 살이 되던 1893년 열 살이던 누이 엘비라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사망하죠.(...)
1905년 아버지는 고통 속에서 사망합니다.(...)

죽음을 부르는 ‘성(性)‘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그렇게 실레는 어린 나이에 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됩니다. 이는 아마 의식 깊숙한 곳에 숨어 젊은 날의 그를 마구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레는 이로 인한 고통과 불안을 자신만의 예술을 꽃피우는 영감의 원천으로 승화시킵니다.-125쪽


실레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매우 직설적인 드로잉에서 큰 영감을 얻습니다. - 128쪽

그는 클림트, 코코슈카, 그리고 반고흐, 뭉크와 같은 표현주의 선배들에게서 배운 것을 영감의 호수 바닥까지 끌고 들어갑니다.-129쪽


평생 100여 점의 자화상을 ‘쓴‘ 에곤 실레, 그의 자화상은 마치 일기 같습니다. -133쪽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 중 한 명을 소개해줍니다. 열일곱살의 ‘발레리에 노이칠‘입니다. 애칭으로 ‘발리‘라 불리던 그녀는 실레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때부터 약 4년간 동거하며 실레의 뮤즈이자, 전속모델이 되어줍니다. 집안일부터 실레의 그림을 판매, 관리하는 것까지 도맡으며 실레가 예술 작업에만 전념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돕죠. 생애 처음으로 뮤즈를 만난 실레는 ‘19금 꽃‘을 활짝 피우며 폭발적으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직설적으로 드러난 여성의 중요 부위, 그것을 넘어 자위 행위를 하는 모습, 동성애 장면까지 사회적으로 성과 관련해 금기시되고 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136쪽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레의 그림을 외설로 보았습니다. 1912년에는 미성년자 유괴와 풍기문란혐의로 실레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 136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유럽 전역에서 스페인 독감이 불어닥칩니다. 무려 2,3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 저주의 인플루엔자였죠. 실레의 그의 아내 역시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정상의 자리에서 마음껏 꽃을 피우려 했던 스물여덟의 실레는 배속 아이와 함께 사망한 아내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다 3일 후 역시 허무하게 져버립니다. -142쪽


실레는 클림트의 제자이자 후배입니다.(...)

클림트의 예술관과 프로이트 이론에 영향을 받아 성적 본능, 죽음의 공포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요.(...)

또한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드로잉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입니다. - 14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