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번째 감정 "분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을 다룹니다.

저에게 있어 최고로 손꼽히는 소설이라 반가워서 글을 옮겨봅니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제가 읽은 이 책은 발췌본입니다.

"기하학적"이라고 불리는 스피노자의 생소한 서술방식이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어 일부를 발췌했다고 되어있네요.


1부에서는 부록을, 2부는 제외, 3부와 5부는 서문을, 4부는 서문과 부록을 발췌했습니다만,

전체를 다 읽지 못해도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진면목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에티카에서 "분노"에 대한 문장이 있는데, 얼핏 공감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반드시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경우 아니더라도, 우린 때때로 분노를 느끼니까요.

그런데, [죄와벌] 을 통해 아하~분노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또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럼 강신주의 책에서 인용한 문장들을 한번 볼께요.


"노파의 집을 찾아냈을 때,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름 본 순간부터 억누를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중략...) - 291쪽


"그가 느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은 소중한 추억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근성,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부여한 가치를 탐욕스러운 노파에게 철저히 부정되었다는 자괴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295쪽



"자신과 유사한 대상,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 그것은 돈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돈이 없어 자신의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어느 퇴역 관리, 자신에게 돈을 보내느라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봉변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여동생 두냐, 전당포 노파가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복여동생 등,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수치심을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게 된다." - 291쪽


"체제에 돌려야 할 분노를 인간에게 돌리고는 전전긍긍하는 개인, 그래서 한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무기력해지는 인간, 더 냉정하게 자본주의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전당포 노파에게, 혹은 자신에게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라스콜리니코프이자 도스토옙스키의 한계였던 것이다." - 296쪽



분노는 최소한의 연대의식, 혹은 유대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중략....)


불량배를 만나 무릎까지 꿀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량배에 분노하기보다는 단지 수치심만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나 애인이 불량배를 만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그 불량배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중략....)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중략....)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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