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사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4%에 불과하단다.(...)
어쩌면 앎과 무지 사이의 이 기묘한 비율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안다는 건 더 광대한 무지의 영역을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158쪽


이전에 글쓰기는 정착민들의 것이었다.
크고 우아한 서재를 가진 자들, 지식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자들, 천재성으로 무장하고 창백한 자의식으로 넘치는 이들의 몫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서재도 지식도 자의식도 필요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다. 그저 필요할 때 참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디지털 노마드다. - 175쪽


책을 보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에요. 책을 보려면 집중해야 돼요. 명상을 해보면 ‘마음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사방팔방 날뛰고 있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되죠. 책을 읽어도 똑같은 깨달음이 일어나요.(....)
그뿐 아니라 책 속에서 자신에 대해 엄청 많이 알게 돼요. 잘 따져보면 책에 담긴 내용이 다 나에 대한 것이에요. 나랑 무관한 건 하나도 없죠. 그걸 느끼게 되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길이 있구나!, 하는 것도 깨닫게 되죠. - 210쪽


책을 읽고 글을 쓰라고 하면 ‘공부를 생업으로 할 생각이 없는데 그걸 왜 읽어요?‘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이게 공부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내가 육체노동을 하든 공무원이 되든 혹은 택배를 하든 공부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존감이 생깁니까?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할 수 있어요. 진실한 태도를 만들어 내는 힘, 그게 바로 집중력이고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힘과 지혜는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건 일생을 살아가면서 늘 꺼내쓸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을 확보하는 거예요. -216쪽


가장 큰 문제는 사유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현대인은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사법고시 같은 어려운 일들은 기꺼이 해냅니다.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거죠. 하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해요. 자기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내팽기치는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추상의 영역이 아니고 바로 내 행동과 일상과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라고 할 수 있어요.-245쪽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라는 게 판명되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청년들에겐 그보다 더 멋진 비전이 없었던 거죠. 근데 제가 특히 마르크스의 글에서 감동받았던 건 문체의 역동성이었어요. 철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 깝깝하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연상하는데 와 ~ 마르크스의 문체는 정말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어요. 특히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이 그랬던 거 같아요. 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 욕망을 불러 일으켰죠. 아마 이념이나 대의보다 그런 역동성이 민주화의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 248쪽


그럼 이런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패턴을 다시 그려야겠죠.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인거죠.자본주의는 그런식으로 사람들을 유도하는 데는 도가 텄으니까 다 거기에 걸려드는거죠. 일단 그런 구조를 철저하게 성찰을 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요. 거기에선 애착과 분노, 그리고 각종 질병밖엔 안 생깁니다. 창조가 아니라 파괴 혹은 퇴행이 일어나죠. 그래서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욕망이 치달리는 걸 멈추게 하려면 일단 나의 동선을 그 반대방향으로 틀어야 합니다. 그러면 욕망도 재구성되구요. 그러다보면 욕망과 행동이 일치되는 때가 오겠죠. - 253쪽


이건 정말 우주의 이치예요. 인생은 결국 관계와 배움, 두 가지가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관계만 있으면 갈등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배움만 있으면 너무 적막하죠. 상생상극의 현장을 통과하면서 순간 인생과 세계에 대해 깨달아 가고, 그럴 때만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자유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비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자가 그랬고, 부처, 노자, 소크라테스 등등 인류의 현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결국 그게 인류 전체의 비전이 되었어요. - 257쪽


특히 고전에는 이미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탐색과 방향이 다 있거든요. 그걸 길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그 길을 열어 놓았으니, 그걸 적극 활용하는 거죠.
소크라테스, 융, 니체와 스피노자, 사주명리학과 <주역> 등등. 이런 거울을 가지고 내 질문과 번뇌를 투사해보는거죠. 그러면 ‘아, 이 방향이 잘못됐구나.‘ ‘전혀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구나.‘ 그런 깨우침이 있으면 저절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 262쪽


늘 그렇듯이, 마지막 완성의 최고 걸림돌은 자의식이죠. 그 자의식의 장벽을 넘는 것도 철학이고 수행입니다. 현대인은 특히나 자의식의 비만이 심각한 수준이라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적 탐구란 ‘자아를 굶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굶긴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자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훈련, 그게 바로 ‘에세이-하라‘의 핵심입니다. 이런 글쓰기가 아니면 언제 그런 요상하고 괴상한 자기자신과 마주치겠으며, 그런 자신과 대결을 해보겠습니까? 괴로울수록 즐기세요. 은근 재미집니다. -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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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책은 보통 이론편과 실전편으로 나뉘는 것이 많다.
이 책도 1부는 이론편, 2부는 실전편으로 되어 있다.
글쓰기 분야에 대한 책은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대개 1부의 이론편은 재미있으나, 2부 실전편에서는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 흐지부지 읽게 마련이다. 물론 실전편을 참고삼아 직접 논술문제를 풀듯이 연습해 보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고미숙 작가의 이 책은 용두사미가 되지 않아서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 일관성과 내용의 충실함을 유지하는 느낌이 좋았고, 글쓰기라는 것이 그저 연습을 통하여 잘 쓰게 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서 얼마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그 배움이 바로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라는 관점을 열어주었다.

말하자면 읽는 것에서 끝나면 그것은 나 개인만의 단절이고 소외이지만, 쓰는 것은 어쨌든 독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점에서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신영복 선생님이 <담론>에서 하신 말씀,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전해져 이 땅을 밟는 것이라 하셨다.
한평생 머리에서 머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배움이 가슴을 울리는 사람이 있기도, 극히 드물지만 뜨거운 가슴에서 느낀 공감을 발로 뛰어다니며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삼중주는 읽기만 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쓰기가 전제되어야지만 읽기에서 방심한 디테일을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에 그저 보고 나서, 아하~ 그렇네..그렇구나..하고 덮으면 내 마음의 내밀한 부분과 한번도 대화해보지 못한 채 언제나 그저..그런 것이 될 뿐이다.



이 책의 제목. 읽는다는 것은 거룩함이고, 쓰는 것은 통쾌함이다는 말. 책의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관통하며 섬세히 배어있다. 고미숙 작가의 농익은 내공이 돋보이는 책이자, 열하일기에서 읽은 그녀의 깊이가 녹슬지 않았구나. 하는 기쁜 마음이 드는 책이다.


첨단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디지털화 되어 갈수록 인간은 더더욱 소외되기에 나의 존재에 대해, 서로의 관계에 대해 궁구할 것이다.
책이란 것,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몸이 자본주의의 욕망과 쾌락에 노예가 될 때 ‘멈출 줄 아는‘ 지혜를 가져다 주고, 소비와 향락에, 인정욕과 성공욕구에 감긴 쇠사슬을 끊어, 우리에게 조르바의 자유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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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5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