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를 통해 <에티카>를 통독한 회원이 말했다.
˝내 독서의 이력은 에티카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천개의 고원>에 흠뻑 빠진 한 청년은 말했다. ˝이젠 철학을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삶의 행로를 바꾼 한 중년은 ˝이제 니체를 읽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책이 주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
그 기쁨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실로 거룩한 체험이다. 나 또한 기꺼이 간증을 해본다면,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보면 지식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 모든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 83쪽


책이 아니고는 타자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니고는 자신을 온통 뒤흔들어대는 욕망의 배치와 유래를 가늠할 도리가 없다.
책이 아니고는 타자의 심연에 가닿을 방법이 없다.
- 95쪽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 쾌락인데, 그것은 계속 강도를 높여 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갈애에 빠지게 된다. 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고. 바로 그렇다.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벗이란 본디 그런 존재다.
이익과 권력의 장에서는 벗이 아니라 라이벌을 만난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곳에서는 연인 아니면 연적을 만난다. 전투적 경쟁심도 감정의 파토스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곧 친구다. 권력투쟁에 지칠 때, 사업이 망해갈 때, 연인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때 우리는 친구를 찾는다. 권위, 재물, 격정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그 자체로 힐링과 멘토링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 그게 곧 벗이다. -101쪽


그렇게 많은 도서관이 있고, 대학보다 훨씬 수준 높은 강의가 진행되어도, 그리고 또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또 배우는데도 듣는 사람은 계속 듣기만 하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 말하기만 한다.
무엇 때문인가? 간단하다.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라는 이치를 외면한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쓰기를 배제한 채 읽기만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이자 정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배움터에서 쓰기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기, 수필, 독후감에 불과하다. 글쓰기를 고작 감상적 토로나 자기위안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건 정말 오산이다. 글쓰기의 영역은 무궁하다. 존재와 세계, 몸과 우주, 사랑과 우정 등,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 왜 이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가? 그저 취미나 위안, 소일거리 정도에 묶어 둔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계급적 차별이 아닌가? - 107쪽


읽기가 타자의 언어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그 접속에서 창조적 변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접속과 변용은 연결이면서 또 도약이다. 남이 걷는 길이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워도 내가 걷는 단 한걸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이 읽는다고 절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
쓰기는 다른 활동과 능력이 더 요구된다. 하여, 더 고도의 수렴과 집중이 필요하다. 읽기는 약간의 산만함을 허용하지만 쓰기는 그런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읽기가 달라진다. 이전에는 그저 구경꾼의 자세로 대충 음미했다면 이젠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강밀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이 사람이 발이 얼마나 많은 거리를 오갔을지, 혹은 얼마나 많은 문헌을 뒤졌을지, 얼마나 고도간 밤을 보냈을지 등등, 그래서 온몸의 세포들이 움직이게 된다.- 112쪽


천재성이 절대 통하지 않는 영역이 바로 글쓰기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은 마흔이 다 되어서 데뷔작을 썼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이 쉰일곱, 출판한 것이 쉰여덟이다.
대니얼디포의 <로빈슨크루소>가 쉰아홉,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쓴 것은 쉰셋, 스탕달이 첫 작품 <적과 흑>을 쓴 것은 쉰둘, 그리고 헨리 밀러가 20세기 문학의 금자탑<북회귀선>을 완성하는 것은 마흔 셋, 등등. -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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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이 삶의 총체적 실천이라는 주장에 점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끔 책을 좋아하는 나 자신에 대해 문약하다느니, 책을 좋아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좋아한다느니, 읽고 쓰는 시간만큼 괜시리 자책도 따라붙는다.
고미숙 작가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고, 내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고,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라 한다. 나에게, 또는 책을 좋아하는 여러분에게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행위라 위로하고 보다듬는다.
읽는 행위가 약간의 산만함을 허용한다면, 쓰는 행위는 그런 방심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문장에서, 또 한번 쓰기의 어려움과 그 밀도가 가져다주는 깊이를 공감한다.

알랭드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서 좋아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평소 우리를 교묘히 피해다니던 보다 신중하고 고독한 자아와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 32쪽

예술작품이 우리의 인성 중 잃어버린 부분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읽고 쓰는 것은 우리의 기울어진 자아의 적당한 균형을 회복하고 세속의 노동과 가족, 그 속에서 만나는 소외와 책임 사이에서 늘 흔들리는 우리 영혼을 어루만져 최고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양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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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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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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