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1897~1962)

 

아버지는 매독 환자에 맹인, 어머니는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착란.

극도로 불안한 가정환경을 혐오하며 성장한 그는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밤새워 술마시고 노름에 빠지고 매음굴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저술활동을 펼쳐 나갔다.

당대의 지성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가들에 의해 '저주의 작가'로 불릴 정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신성모독적인 저술을 많이 남긴 이단적 지식인이자 일생 동안 무신록적 입장에서

인간의 절대성을 탐구했다.

 

"나는 이 저서에서, 기독교의 충동과 에로티즘의 충동이 상당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 7쪽

 

에로티시즘 논의에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는 사상가로 '위반의 원리'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그는 우리로 하여금 통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그의 에로티즘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에로티즘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덧.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릅니다.

하루키도 이 책을 읽었을까요?

 

어떤 에로 행위든 에로 행위는 폐쇄적 존재로서의 구조를 갖는 정상적 상태의 상대방을 파괴함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19쪽

사드 후작은 그의 소설에서 에로티즘의 흥분의 절정은 살해 행위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다른 뜻을 가진 말이 아니다. 내가 이미 충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했듯이 충동을 극단까지 몰아가면 그것은 죽음과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이다. 정상적 삶으로부터 욕망으로의 이행 과정에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유혹이 있다. 에로티즘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정된 형태의 와해,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 뚜렸한 개인들의 불연속적 질서 그리고 그것을 떠받쳐 주는 일정한 사회적 삶의 형태들의 와해이다.-20쪽

열정에 수반되는 행복에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열정은 일단 동요와 혼란을 야기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행복한 열정조차도 아주 격렬한 무질서를 야기하기 때문에, 도한 거기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누리기에 너무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차라리 정 반대의 것, 즉 고통과 비교되곤 한다. 열정의 본질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불연속성 대신 엄청난 연속성을 들어서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질 때, 그래서 그만큼 우리가 무능한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채 추구될 때, 역설적이게도 특히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늑한 느낌과 평온한 행복감은 그것에 앞선 오랫동안의 고통이 진정되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아니다.-21쪽

사랑하는 사람의 추구는 죽음을 끌어들인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경우기 있다.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런 광적 열광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어떤 가능한 연속성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열정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다.-22쪽

금기는 인간이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지만, 선사 시대에 관한 한 명백한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고대에도 과연 성을 구속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입증할 만한 명백한 물적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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