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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염세주의자 -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철학가 지음, 차혜정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12월
평점 :
세상을 꿰뚫어보는 가장 강력한 통찰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주의자를 당당하게 표현한 제목에서 무언가는 깊은 내공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냥 또 하나의 염세주의자가 자신의 필력을 따라서 어필한 어둡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끄적인 글들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쇼펜하우어의 글들과 니체의 글들을 적절하게 썩여서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자의 글을 통해 염세주의를 풀어나가는 묘미가 상당히 매력있게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책 표지 앞 줄 밑에 "가장 자유로웠던 철학자 장자에게 배우는 인생내공"이라고 적혀있다. 연말이라 일거리가 많아 책을 여유롭게 보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나 반가운 장자가 이곳에서 21세기의 언어로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직언"이라는 책이 있는데 부제목으로 "죽은 철학자들의 살아 있는 쓴소리"가 적혀있다.
그러나 본 책은 죽은 철학자이기 보다는 지금도 살아있는 장자라는 철학자가 다른 사람의 입과 SNS를 통해 아직도 살아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어 반가웠다.
염세라는 단어를 철학자들은 일시적인 기분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지겨움과 권태, 무기력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세대가 염세대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자포자기한 세대에게 또한 현실은 바꿀 수 없으며 꿈, 희망, 긍정 따위를 아무리 떠들어 봤자 허무해질 뿐이며 인생의 미래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전혀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세대들은 실제 철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염세적 관점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즉 염세적 세상에서 세상을 선명하게 꿰뜷어 볼 수 있는 '통찰'을 장자를 통해서 보게 된다면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如如] 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나 생각된다.
먼저 저자는 '쓸모 없는 가치'를 언급하며 책을 연다.
인간은 쓸모 있는 인생이 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장자는 '쓸모 없는' 상태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마주치는 순간이 된다고 한다. 인생이 가장 땅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나를 규정해 주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을 때 그때서야 남들의 시선으로서의 '나'가 아닌, 즉 보여주기시 위한 삶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 속에서 규정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에서는 부모의 역할로 직장에서는 직원 또는 부장의 역할로, 친구를 만나면서는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살아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나를 규정하는 것을 남김없이 버려야 진짜 나를 만난다.
그러면서 장자의 <제물론>에 있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옛 사람들은 그림자의 바깥쪽에 그림자를 둘러싼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그림자의 그림자를 망량이라고 불렀다. 그림자가 우리 행동의 통제를 받듯, 망량의 모든 움직임은 그림자의 통제를 받고, 망량은 그림자가 무엇을 하든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그림자에게 격렬히 항의한다.
"망량이 물었다. "조금 전에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조금 전에는 앉더니 이제는 일어나는구나. 어찌 그리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 행동은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통제하는 사람도 다른 존재로부터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탈피한 뱀의 껍질이거나 탈피한 매미의 껍질이 아닐까?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종을 당하는지 아니면 나 스스로 결정하는 건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 <<장자>> <제물론> 편
이 말은 '그림자의 모든 행위가 사람의 조정을 받는 다면 그 사람도 어쩌면 다른 존재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이다.' 즉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생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무슨 행동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도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가치에 조정되거나 혹시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통해 결국 자아란 서로 의지하는 관계임을 강조하며서 진정한 자신의 개념이 존재하는 가를 묻는다." 그래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사고하기'이다.
세상 모든 사물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통제하는 식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누구를 통제하지 않으며 타인을 주도할 역량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도적이고 리더십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배후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존재가 그를 주도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다른 어떤 사람도 이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은 '부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장자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아를 찾지 않을 때야말로 진정한 자아를 찾은 상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목적을 좇지 않고도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되든 두려움을 갖지 않는 상태가 될 때야 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에 기꺼이 안주하겠다는 용기를 말한다.
이어서 장자는 "진리는 없다"는 가르침을 편다.(3장)
즉 자신의 진리만이 최고라고 여기면서 남들이 말하는 세계관, 가치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팽창은 일종의 병이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기준으로 산다.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은 사실 없다고 봐야 한다. 내 기준이 진리라고 믿을 때 그 사람은 남의 삶을 관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시킨다.
사실 역사에 기록된 전쟁은 '자기팽창'에서 기인하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독불장군인셈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한계가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때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괜찮은 말 하나를 말한다.
"내가 책을 읽는 주된 목적은 더 많은 지식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어떤 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무섭도록 깨어버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신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교사인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의미이다. 즉 장자가 말하는 무불위는 최소한의 기준마저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도록 내가 생각한 진리의 관점에 문을 열어두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비유로 든 "전국시대 최고의 미녀였던 여희"의 예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쉽고 확실하게 가르치는 거 같다
여희는 애나라 군주의 딸이다. 진나라 임금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자 여희는 너무 울어서 옷깃이 젖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나라 궁으로 들어가 임금과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나서는 비로서 자신이 운 것을 후회하였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 고정관념에 빠져 자신이 내린 판단이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어쩌면 허다하다. 그래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이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던 것이리라.
이렇게 저자는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고수할 특정한 입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일한 사건을 한 가지 관점으로만 해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우 어떤 시각에서 보아도 사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진리는 없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인생을 함부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인생에는 도처에 진리가 있으므로 한두 가지 가치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즉 '진리가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것도 일종의 편집증인 것이다. 이런 고집까지 함께 의심하지 않으면 온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볼 수 없다."
장자가 가르친 마지막 수업 : 삶과 죽음은 하나다
장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뭉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개별적 변화도 전체 질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령 한쪽의 완성은 다른 쪽의 파멸을 뜻하므로, 전체 질서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가 죽어갈 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안장(安葬)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자는 “나는 천지를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벗으로 삼으며, 별들을 보석으로 삼고, 만물을 휴대품으로 삼으니, 모든 장구는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무엇을 더 좋게 하겠느냐?” 했다. 이에 제자들이 “관이 없으면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뜯을까 봐 걱정됩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다시 “노천에 버리는 것은 까마귀나 독수리 떼에게 뜯어먹도록 주는 것이며, 땅에 묻는 것은 개미 떼나 땅강아지가 먹도록 내어주는 것이니 이 둘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은 마치 이쪽에서 식량을 빼앗아 저쪽에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어 혜시가 문병을 왔는데, 정작 장자 자신은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그 이유를 묻자, “나의 아내는 본래 삶도 형체도 없었고 그림자조차 없었지 않은가? 이제 그녀도 죽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변화와 같은 것이네. 그녀는 아마 거실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걸세. 내가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었는데, 울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네.” 하고 대답했다.
이것은 비관과 낙관을 한꺼번에 융화시킨, 일종의 달관 주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진인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죽음은 사실 잊혀진다는 것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그러나 장자는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면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정을 세상에 돌려주고 있다.
한 마디로 장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당단한 염세 사상은 세상을 내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자는 것이다. 물흐릇이 내 삶을 자연에 맞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은 다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자연과 한몸이 되어 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된다. 결국 우리는 어쩌면 한 바탕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에도 매일 필요없이 살면 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자가 주는 결론을 단 두 음절로 표현하며 서평을 마친다.
무위 (無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