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염세주의자 -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철학가 지음, 차혜정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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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꿰뚫어보는 가장 강력한 통찰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주의자를 당당하게 표현한 제목에서 무언가는 깊은 내공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냥 또 하나의 염세주의자가 자신의 필력을 따라서 어필한 어둡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끄적인 글들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쇼펜하우어의 글들과 니체의 글들을 적절하게 썩여서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자의 글을 통해 염세주의를 풀어나가는 묘미가 상당히 매력있게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책 표지 앞 줄 밑에 "가장 자유로웠던 철학자 장자에게 배우는 인생내공"이라고 적혀있다. 연말이라 일거리가 많아 책을 여유롭게 보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나 반가운 장자가 이곳에서 21세기의 언어로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직언"이라는 책이 있는데 부제목으로 "죽은 철학자들의 살아 있는 쓴소리"가 적혀있다.


그러나 본 책은 죽은 철학자이기 보다는 지금도 살아있는 장자라는 철학자가 다른 사람의 입과 SNS를 통해 아직도 살아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어 반가웠다.


염세라는 단어를 철학자들은 일시적인 기분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지겨움과 권태, 무기력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세대가 염세대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자포자기한 세대에게 또한 현실은 바꿀 수 없으며 꿈, 희망, 긍정 따위를 아무리 떠들어 봤자 허무해질 뿐이며 인생의 미래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전혀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세대들은 실제 철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염세적 관점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즉 염세적 세상에서 세상을 선명하게 꿰뜷어 볼 수 있는 '통찰'을 장자를 통해서 보게 된다면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如如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나 생각된다.


먼저 저자는 '쓸모 없는 가치'를 언급하며 책을 연다.

인간은 쓸모 있는 인생이 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장자는 '쓸모 없는' 상태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마주치는 순간이 된다고 한다. 인생이 가장 땅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나를 규정해 주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을 때 그때서야 남들의 시선으로서의 '나'가 아닌, 즉 보여주기시 위한 삶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 속에서 규정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에서는 부모의 역할로 직장에서는 직원 또는 부장의 역할로, 친구를 만나면서는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살아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나를 규정하는 것을 남김없이 버려야 진짜 나를 만난다.


그러면서 장자의 <제물론>에 있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옛 사람들은 그림자의 바깥쪽에 그림자를 둘러싼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그림자의 그림자를 망량이라고 불렀다. 그림자가 우리 행동의 통제를 받듯, 망량의 모든 움직임은 그림자의 통제를 받고, 망량은 그림자가 무엇을 하든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그림자에게 격렬히 항의한다.


"망량이 물었다. "조금 전에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조금 전에는 앉더니 이제는 일어나는구나. 어찌 그리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 행동은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통제하는 사람도 다른 존재로부터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탈피한 뱀의 껍질이거나 탈피한 매미의 껍질이 아닐까?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종을 당하는지 아니면 나 스스로 결정하는 건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 <<장자>> <제물론> 편

이 말은 '그림자의 모든 행위가 사람의 조정을 받는 다면 그 사람도 어쩌면 다른 존재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이다.' 즉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생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무슨 행동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도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가치에 조정되거나 혹시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통해 결국 자아란 서로 의지하는 관계임을 강조하며서 진정한 자신의 개념이 존재하는 가를 묻는다." 그래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사고하기'이다.


세상 모든 사물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통제하는 식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누구를 통제하지 않으며 타인을 주도할 역량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도적이고 리더십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배후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존재가 그를 주도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다른 어떤 사람도 이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은 '부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장자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아를 찾지 않을 때야말로 진정한 자아를 찾은 상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목적을 좇지 않고도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되든 두려움을 갖지 않는 상태가 될 때야 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에 기꺼이 안주하겠다는 용기를 말한다.


이어서 장자는 "진리는 없다"는 가르침을 편다.(3장)


즉 자신의 진리만이 최고라고 여기면서 남들이 말하는 세계관, 가치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팽창은 일종의 병이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기준으로 산다.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은 사실 없다고 봐야 한다. 내 기준이 진리라고 믿을 때 그 사람은 남의 삶을 관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시킨다.

사실 역사에 기록된 전쟁은 '자기팽창'에서 기인하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독불장군인셈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한계가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때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괜찮은 말 하나를 말한다.

"내가 책을 읽는 주된 목적은 더 많은 지식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어떤 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무섭도록 깨어버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신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교사인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의미이다. 즉 장자가 말하는 무불위는 최소한의 기준마저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도록 내가 생각한 진리의 관점에 문을 열어두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비유로 든 "전국시대 최고의 미녀였던 여희"의 예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쉽고 확실하게 가르치는 거 같다


여희는 애나라 군주의 딸이다. 진나라 임금이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자 여희는 너무 울어서 옷깃이 젖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나라 궁으로 들어가 임금과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나서는 비로서 자신이 운 것을 후회하였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 고정관념에 빠져 자신이 내린 판단이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어쩌면 허다하다. 그래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이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던 것이리라.

이렇게 저자는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고수할 특정한 입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일한 사건을 한 가지 관점으로만 해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우 어떤 시각에서 보아도 사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진리는 없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인생을 함부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인생에는 도처에 진리가 있으므로 한두 가지 가치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즉 '진리가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것도 일종의 편집증인 것이다. 이런 고집까지 함께 의심하지 않으면 온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볼 수 없다."


장자가 가르친 마지막 수업 : 삶과 죽음은 하나다

장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뭉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개별적 변화도 전체 질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령 한쪽의 완성은 다른 쪽의 파멸을 뜻하므로, 전체 질서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가 죽어갈 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안장(安葬)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자는 “나는 천지를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벗으로 삼으며, 별들을 보석으로 삼고, 만물을 휴대품으로 삼으니, 모든 장구는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무엇을 더 좋게 하겠느냐?” 했다. 이에 제자들이 “관이 없으면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뜯을까 봐 걱정됩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다시 “노천에 버리는 것은 까마귀나 독수리 떼에게 뜯어먹도록 주는 것이며, 땅에 묻는 것은 개미 떼나 땅강아지가 먹도록 내어주는 것이니 이 둘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은 마치 이쪽에서 식량을 빼앗아 저쪽에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어 혜시가 문병을 왔는데, 정작 장자 자신은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그 이유를 묻자, “나의 아내는 본래 삶도 형체도 없었고 그림자조차 없었지 않은가? 이제 그녀도 죽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변화와 같은 것이네. 그녀는 아마 거실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걸세. 내가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었는데, 울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네.” 하고 대답했다.


이것은 비관과 낙관을 한꺼번에 융화시킨, 일종의 달관 주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진인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죽음은 사실 잊혀진다는 것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그러나 장자는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면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정을 세상에 돌려주고 있다.


한 마디로 장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당단한 염세 사상은 세상을 내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자는 것이다. 물흐릇이 내 삶을 자연에 맞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은 다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자연과 한몸이 되어 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된다. 결국 우리는 어쩌면 한 바탕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에도 매일 필요없이 살면 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자가 주는 결론을 단 두 음절로 표현하며 서평을 마친다.


무위 (無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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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기도 일기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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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긁어줄거 같은 글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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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이런 통계도 내주다니 역시 알라딘입니다. 20년의 모습에서 200년을 바라보면서 내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존재할 알라딘서점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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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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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작가의 또 다른 헤세의 번역이 기대가 됩니다
싯다르타도 번역을 해주어 새로운 번역본으로 헤세의 글을 탐닉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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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네 평화의 복음 - 치유를 위한 기쁜 소식
에드몽 보르도 시케이 영역, 이종철 옮김 / 올리브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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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네파가 궁금해졌다.  기본적인 정보는 카톨릭 평화신문에서 언급한 부분이 잘 정의되어 그대로 실어본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와 유다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소(小) 플리니우스, 교부 성 히폴리투스 주교와 에우세비우스 주교 등은 자신의 저서에 한 특별한 유다 종파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에세네’이다. 

에세네는 팔레스티나 사해 인근 엔게디 지방을 거점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오직 동료뿐인 집단 속에서 아내도 사랑도 돈도 없는 가운데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극히 엄격한 규율 생활을 했다”(요세푸스 「유다 고대사」참조). 필론에 따르면 이들 공동체는 적게는 10명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전체 인원은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51년부터 발굴한 도기 공방과 물 저장고, 식당, 1000기가 넘는 묘지석 등이 필론의 글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에세네는 시리아어 ‘에세노이’에서 나온 말로 ‘거룩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자신과 조상을 가리켜 부른 ‘하시딤’(경건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이 책을 읽으며 에세네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특히 어떤 분은 에세네파에 대해서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에 대해서 다루는 자료가 흥미로웠다. 요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보다 에세네파가 말하고 있는 구세주라는 메시야가 이미 기존의 예수와 같은 모습과 가르침으로 와서 존재했다는 것이다.<과학동아 1998년 8월 '사해사본'에 이 내용이 실려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를 확인 할 방법은 없다.> 

아무튼 에세네 평화의 복음이라는 책은 기존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무엇이 있으며 독자들은 하늘 아버지와 함께 대지 어머니의 가르침과 법을 따르라는 말을 들으며 경계심과 함께  새로운 계시로 영적 진리의 문을 열게 되리라 생각이 든다.

더불어 대지 어머니의 천사들에 대해 이 책은 다루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격적인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천사들이 아닌 공기의 천사, 물의 천사, 햇빛의 천사에 대해 들어보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씻음(망가진 몸)이 기존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달라 놀라거나 거부감과 같은 마음, 경계심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러나 섣불리 단정 말고 이 책이 주고자 하는 영적 진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고 영적인 직관력으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놀라운 진리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의 천사에 대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신약성경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라는 못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어떤 병이 걸렸든지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이 낫는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에 비추어 봐서도 물의 천사, 공기의 천사, 햇빛의 천사가 각각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그것이 어떤 개체적 존재이든 비물리적 존재이든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또한 기존의 성경은 예수의 능력과 권능으로 병자를 치유하였다고 보고 있는데 에세네 평화의 복음에서는 대지 어머니에게 그 영광을 돌리면서 치유의 천사들이 사람의 병든 몸을 치유하고 사탄이 쫓겨나는 것으로 설명되어 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예수는 그러한 진리를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자로서 우리에게 선명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 책에서는 기존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특별히 p83에서'가시오, 그리고 더 이상 죄짓지 마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다시는 병마를 만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는 언급에서 기존 성경 또한 이러한 병마를 죄와 연관 짓는 것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

인간의 병마는 죄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단식'이 주는 영적 가르침이 매우 심오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단식(금식)에 대한 의학적인 소견을 보면 서양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속을 비워두는 것이 곧 병을 고치는 방법”이라고 언급했고,  음식은 물론 마실 것조차 절대 금식함으로써 발작이 완전히 치유된 환자가 있다고 한다.

또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렐 박사는 이런 언급을 하기도 했다. “단식은 몸을 정화시키고 조직을 개선하며 독소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능을 하는데, 간에 쌓인 노폐물과 독소가 제거되고, 피하지방이 소모되며, 근육의 일부도 감소하지만 심장, 혈액, 뇌, 신경을 놀랍게도 정상적으로 유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천사가 치유를 하는지 우리 몸 안에 준비된 의사인 자연치유 시스템이 작동을 해서 치유하는지 명확하게 검증된 것은 없으나 단식의 효험은 종교적, 의학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책 p25, p82를 보면... 

"내가 진실로 그대들에게 말하니다. 단식하지 않으면 사탄의 힘으로부터, 사탄이 주는 모든 병마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깨끗한 치유를 위해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구하면서 단식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단식하는 동안에는 사람들의 아들들을 될수록 만나지 말고, 우리의 대지 어머니의 천사들을 찾으십시오."

 "많은 병자들이 시냇가에 묵으면서 하느님의 천사들과 함께 7일 밤낮으로 단식을 하고 기도를 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받은 보상은 대단했다. 일곱째 날이 지나면서, 그들에게서 온갖 고통이 떠났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현대인들은 이러한 증상을 자연치유라고 언급하겠지만 실제 단식은 사탄이 준 병마가 어머니의 천사들에 의해서 치유되는 과정이며 회복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는 대목은 도살된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요즘 들어 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힘든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는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인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창세기 9:3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그 대목을 보면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본 책에서도 여기에 대해 다루며 정결한 고기를 먹도록 한 모세의 가르침이 모세의 법인지 하나님의 법인지 묻고 있다. 결론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완악함 때문에 불가불 허용?된 것이리라.

그렇기에 노아 시대 전처럼 우리는 정말 나무에 달린 과일들과 들판의 온갖 풀들과 동물의 젖만을 먹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는 가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듯 싶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많은 병이 고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과식하며 배불리 먹어야만 먹었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내 몸을 병들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었지도 모르겠다. 소식(小食)이 좋다는 것이 또 증명되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유념해 볼 내용, 약간은 깊게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나온다.
병마의 원인을 죄와 더불어 먹는 문제(살생된 짐승의 고기)에 두고 있다. 죄와 병마의 연결성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도 나오는바 이해를 하고 있지만  살생하는 고기를 먹음을 통해 사탄이 들어와 병마를 일으켰다는 대목은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과식과 폭식으로 인한 것이 병마의 원인이며 그 질병을 사탄이라고 칭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고기를 먹거나 살생함(도축업 종사자)을 통해 사탄이 그 몸을 차지하고 안에 산다는 대목은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명확한 대목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p85를 보면 "살생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죽이는 것입니다. 대지 어머니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여, 그를 키워주었던 젖을 떼어버립니다. 어머니의 천사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고, 대신 사탄이 그의 몸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p 103를 보면 "하루에 두 번 이상 먹는 자는, 자기 몸 안에서 사탄의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천사들은 그의 몸을 떠나고, 곧이어 사탄이 그 몸을 차지합니다."

더불어 한 병자가 학질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탄의 의한 괴롭힘이며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단식함으로 사탄에게 공물을 주지 않는 다는 대목에서 생명의 식탁이 아닌 것을 먹는 것은 사탄이 우리 몸을 차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가하는 물음을 만들게 한다.(물론 나쁜 음식은 우리 몸을 망치고 병을 가지고 오지만) 

특별히 이 책은 병을 병마라고 부르고 있는데 원어에서 실제 쓰이는 의미를 알고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 용어 사전을 보면 병마(病魔)란 "병이 들게 하는 마귀"라는 뜻인데 모든 병을 사탄으로 보게함으로 병의 본질을 사이비 종교에서 사용하는 영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탄의 개념을 고유명사인 초인격적인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보통명사인 "적대자, 방해자"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리되겠지만 자칫 영적 존재로 볼 때 그것이 미치는 문제점이 크게 오용 될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그리고 p114에 보면 '사탄에게서 나오는 술이나 담배에서 기쁨을 찾지 마시오...사탄의 술과 담배는 모두 하느님의 눈에는 추악한 것들입니다.' 는 대목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거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음주 운전(잘못된 술문화)으로 골머리를 안고 있는 현시점에서 매우 합당한 가르침이라 생각이 되며 외람된 말이지만 무속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이 술과 담배, 나쁜 음식들을 먹게함으로 몸과 영혼을 망치게 한다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술은 적당히, 담배는 완전히 끊음으로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르침의 핵심 진주는 이 말씀이다. 
p20-21에 기록된 말씀인데 20페이지에 것만 다시 언급해 본다.

“성서 속에서 율법을 찾지 마십시오. 율법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성서는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진실로 말합니다. 모세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이지, 문자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예언자들에게 전해진, 살아 있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생명 안에, 그 자체 안에, 율법이 적혀 있습니다. 그대들은 풀잎 속에서, 나무 속에서, 강 속에서, 산 속에서, 하늘을 나는 새 속에서, 바다의 물고기들 속에서 율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대들 속에서 그것을 찾도록 하십시오.”

이 말은 기록된 성서가 죽은 것이기에 아예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록된 문자를 넘어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성서는 오늘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율법의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현대 자연과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기에 자연의 위대함과 자연세계의 법칙들을 통해 하늘의 가르침을 겸허히 배우는 인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선다싱과 성프란체스코와 같은 분들은 자연에서 주는 영적 계시를 많이 끌어낸 분들이다.
특히 로마서를 쓴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외경 가운데 새롭고도 탁월한 영적 가르침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으니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기를 권하며 자칫 왜곡된 영적 시선을 가질 수도 있으니 이 안의 내용은 천천히 곱씹는 가운데 적절히 적용해 보면 좋을거 같다. 

어쩌면 고기가 아닌 채식, 나무열매,  즉 사탄의 식탁이 아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식탁이 진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성경에 나오는 므드셀라처럼 건강하게 아주 오래 행복하게 살고픈 작은 욕심일까?
 
이 책을 읽으며 몇몇 생각나는 책과 정보가 있어 함께 실어본다.


2. 내 몸 안에 준비된 의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11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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