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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ㅣ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알베르 카뮈 지음, 이주영 옮김, 변광배 감수 / 코너스톤 / 2023년 9월
평점 :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카뮈의 《이방인》은 그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그가 쓴 최초의 소설인데 당대에 출간 자체만으로도 문학적 ‘사건’으로 언급되었다니 호기심 가득한 마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작가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받아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찬사를 받나 하며 읽을 기회를 노렸다. 이 책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써놓은 서평을 읽어서 대충은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 책을 읽어보니 단순한 책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변광배 교수의 작품 해설을 그래서 읽어 보았다. 아뿔싸 이해되는 것은 이해되고, 도무지 굳이 그렇게까지 어렵게 해석해석을 해야하느냐는 카뮈의 반항이 자연적으로 꿈틀되었다. 그 이유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사실 그림을 보는 논객들이 각자의 기준으로 그림을 이해하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을 감상하며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작품을 통해 보면서 때론 주인공 뫼르소의 소시오패스적이며, 반항적인 자기 고집이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카뮈가 세상을 향해 전혀 '길들여지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면서 사물을 관조적이며 주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생 발악을 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즉 《이방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해석이 시도되었다. 그러기에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전문가적인 시선도 필요하겠지만 너무 한쪽 편향의 해석으로 치우칠 수 있는 해석들을 차치하고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까 싶다. 《이방인》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네 가지다. 사회학적 관점, 형식적 관점, 정신분석학적 관점,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철학적 관점이 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마음 닿는 것은 사회학적 관점과 철학적 관점이다. 정신분석학점 관점에서의 해석도 이해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조까지 들먹이면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카뮈의 의도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니 독자는 작품 해설을 통해 몇 가지 관점을 자신 위주로 취하면 되고, 결국 독자 스스로가 소설을 읽고 느끼며, 생각하는 바가 이 책에 대한 주해석이라고 보면 좋겠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소설을 이해해 보자. 이 관점에서 보면 때론 노인 문제, 여성 문제, 재판 문제가 다뤄진다. 그러나 노인 문제나 여성 문제는 그저 소설에 대한 배경 설명이지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어느 사회나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문제다. 카뮈가 이거까지 생각해서 이 소설을 적지 않았을 거다. 또한 재판에 대한 사회적 문제는 시대마다 있어온 것이다. 그렇기에 카뮈가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단순하게 보이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그건 더 큰 그림에서의 사회학적 문제이다. 즉 재판하는 과정 속에서 뫼르소는 아랍인 살해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기에 이 죄목에 대해서만 법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예심판사나 검사 같은 이들은 뫼르소의 살인이 아닌 뫼르소라는 인간 자체를 심판하려고 든다. 그들은 무신론자이자 어머니 장례식에서 상주다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뫼르소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단죄하고 있다. 즉 기득권자들에게 의해 살인 예정자로 '재단된' 뫼르소를 재판하며 한 인간을 특정한 존재로 매도, 규정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같은 사건은 단순한 살인죄로만 치부될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삶적 요소가 내재되어 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부모와의 관계, 사회적 관계를 조사하며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된 이유까지 밝히려는 작업을 형사들과 프로파일러들이 하고 있다. 좋은 의도이며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를 준다. 그러나 몇가지의 행동들이 그러하기에 한 존재가 그런 존재라고 단정짓는 것은 심각한 시선일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 사건을 만나는 방식은 다르다. 그렇기에 기득권에 의한 매도, 군중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시선이 꼭 정답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카뮈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설을 보면 뫼르소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 불편한 점은 있다. 이것은 결국 카뮈의 의도된 반항이며 사회적 규정화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소설을 통해 뫼르소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독자로서 보건데 그 사회가 담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윤리관에 대해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며 외칠 때에 그것이 언제나 '사랑과 정의'의 틀 안에서 다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뫼르소와 그의 어머니 관계를 저자는 보여주지 않는데, 그래서 뫼르소의 행동 이면을 우리는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독자는 뫼르소가 과연 '사랑과 정의'의 틀 안에서 행동을 하고 있는 가를 묻고 싶다. 장례식을 가보면 알듯 우리는 톨스토이가 쓴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장례식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깊이 생각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나는 살아 있으며, 그래서 오늘과 내일의 할 일을 생각하며 고민거리에 잠기던지, 휴일에 있을 여행을 떠올린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이며, 내가 죽을 때만이 죽음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뫼르소는 그런 의미에서 엄마의 죽음을 타인의 죽음처럼 받아들였던 것일까? 아니면 엄마와의 관계가 친밀성과는 거리가 멀게 자라와서 일까? 그는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반려견보다 더 못하게 엄마라는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시체를 처리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 사회의 권력, 법, 제도, 언어, 종교 입장에서 보면 '오염된, 적합하지 않은, 길들여지지 않은, 다시 말해 비정상적인 존재로 규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윤리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대로 읽으면 주인공 뫼르소는 그저 '부모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 '소시오패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심각한 문제적 존재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 사회를 향해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고 외치고 싶어 비정상적인 존재 같은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또 하나의 관점인 철학적 관점에서 이 책을 보자. 카뮈의 사상과 문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부조리의 시기다.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오해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두 번째 시기는 '반항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등이 속한다. 세 번째 시기는 '사랑의 시기'이다. 카뮈 사후에 유작으로 출간된 최초의 인간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는 카뮈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방인의 시기는 부조리의 시기다. 부조리에 해당하는 프랑스 단더 'absurde'에는 '귀가 먹은, 들리지 않는' 등의 의미를 가진 'sourd'가 포함되어 있다. 즉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는 어느 순간 '왜'라는 의문이 들면서 이 세계와 인간 사이가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보통의 경우는 이 세계는 인간의 질문을 받고 답을 주는데 어느 순간 답이 주어지지 않는 때가 있다. 이때가 바로 그런 '부조리'에 대한 징후를 느끼며 괴로워하는 시기다. 이때 카뮈는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종교를 통한 위로를 강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책으로 '반항'을 제시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패러디해서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카뮈는 삶을 통해 부조리를 맛보고 보았고,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이 세계와 단절하여 사는 것이 아닌 이 세계를 다시 끌어 안으며 회복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이 세계와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인간은 이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에 시지프 신화의 주인공인 시지프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뮈의 눈에는 시지프가 '삶'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비록 산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또 다시 위로 올려야 하는 벌을 받지만, 바위를 산 꼭대기로 미는 쳇 바퀴적 삶이라도 살아있는 존재 의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카뮈는 젊은 시절 불치의 병인 당시 기준으로 폐결핵을 앓았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남들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즉 삶이 부조리한 것을 마구 던져주어도, 삶은 살아갈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고 성찰하면서 매일 존재의 의미를 의식하며 새로운 하루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보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사형되는 날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드면 좋겠다"고 끝을 맺는데 이것은 결국 죽는 순간까지 반항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적 외침이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왠 미친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뫼르소를 통해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어차피 이방인으로서 살다가 세상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이방인과 같은 삶을 허용해보며 이해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이것이 독자인 내가 이방인을 이해하며 바라본 내용이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책은 양장본으로서 부드러운 촉감의 고급스러운 벨벳 코팅 표지로 되어 있어 책의 고결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적 내용도 중요하지만 책이 품는 겉옷도 중요한 시대다. 영원한 고전을 영원히 품는 기회가 되어 감사하다. 어려운 내용이기에 더 많이 읽으면서 사회적 시선과 내적인 시선을 키우면서 다시 보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무 깊게 생각하며 읽지 말자!
카뮈가 그렇게까지 생각 안했는데 그걸 의미화하고 문어발식 해석화시키면 카뮈가 이게 바로 '부조리'라고 무덤에서 뛰쳐나올지 모른다.
이 책의 한 문장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늘 과장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모든 것은 단순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