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책 읽어드립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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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욕망과 복수 그리고 비극적 언어의 마술!!

 

세계를 사로잡은 셰익스피어가 통찰한 인간사

음모살인독배의 끔찍하고 참담한 드라마!!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이 거대한 바보들의 세상에 오게 된 것을 울면서 후회한다.”


셰익스피어의 책은 처음이다. 그가 한 명언과 글은 읽어봐서 그가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그가 어떤 존재이며 최고의 극작가인지는 분명 모를 것이다.

그에 대해 일컫는 말이 많다. 그 중에 두 사람 언급하고자 한다. 

"당대뿐 아니라 만세(萬世)를 통해 통용되는 작가."  -벤 존슨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아버지 선왕이 죽자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왕의 승계를 받은 숙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지난 날의 형수가 왕비가 되는 더러운 모습을 보며 햄릿은 비참해 한다. 즉 극심한 슬픔과 우을증에 사로잡혀 미치광이처럼 살아간다. 그런 중에 그의 앞에 한 유령이 나타나서 그에게 선왕의 죽음의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그 유령은 아버지의 혼령으로서 아버지가 입은 옷과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 혼령에게 아버지의 죽음의 얘기를 듣고 복수로 갚아 달라는 말을 들은 후 햄릿은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이란 증거를 통해 확증 후 숙부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즉 연극을 열어 동생이 권력을 탐하여 형을 독살하는 내용으로 연출한 후 숙부의 안색을 통해 그 죄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역시나 숙부는 극적인 장면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자리를 피한다. 이에 햄릿은 확신을 가지고 숙부를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지만 숙부가 기도하며 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햄릿이 숙부를 죽이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내용이다. 즉 햄릿은 홀로 접견실에서 기도하고 있는 숙부를 발견한다. 대사의 한 장면을 적어본다.

기회는 지금이다. 눈을 감고 하는지는 모르나 이때가 기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지금 죽이게 되면 "악한은 천당으로 가게 되는데 이건 복수가 아니라 도리어 사례를 하는 꼴이 된다. 아버지는 현세의 온갖 욕망과 죄를 짊어진 채, 죄업이 5월의 꽃처럼 한창 만발하고 있을 때 살해 당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저승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지 하나님 말고 누가 알겠는가. 우리 인간 기준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 무거운 벌을 받으실 게 틀림없다. 그런데 저자가 기도로써 영혼을 깨끗이 씻어 천당의 길을 떠나기에 꼭 알맞는 이때 죽이는 것이 과연 가련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되겠는가? 천만에."

이 내용에서 보듯이 햄릿은 참고 기다렸다가 좀 더 살기 가득한 기회를 엿보아 그가 만취하거나 곤드라졌을 때, 격분했을 때나 도박이나 폭언을 할 때, 그 밖에 전혀 구원의 여지가 없는 나쁜 짓을 하고 있을 때 그를 치려고 하고 있다. 그래야 그 영혼이 자기가 가야 하는 지옥만큼이나 저주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성경이 지배하는 시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고는 이 책을 대하는 그 시대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가 과연 그렇게 성경의 원칙대로 흘러가던가? 
셰익스피어스는 이 얘기를 집어 넣으면서 결국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마땅한 삶의 도리와 이치'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책 안에는 명언과 같은 말이 너무 많다. 숙부 왕을 통해서도 새겨들을 만한 얘기가 나온다. 그를 죽이려 했던 '폴리니어스' 재상을 통해서도 나온다. 물론 햄릿을 통해서 명언과 같은 문장이 쏟아질 정도로 많다. 하나 하나 체크 해놓고 되새기려 하고 있다.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주된 행위와 한평생의 삶이 단지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신이 우리들 인간에게 이렇듯 위대한 사고력을 주고 앞뒤를 살필 수 있도록 한 것은, 신과 같은 능력과 이성을 쓰지 않고 곰팡이가 피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은 아니었다." p158

"환상과 같은 허망한 명예를 찾아 마치 잠자리에라도 들듯 무덤을 찾아가고 있지 않는가?" p159

"사람이 죽으면 어떤 천한 일에 쓰일지 모르겠구나, 호레이쇼. 알렉산더의 존엄한 유해가 마지막에 술통 마개가 되는 것도 상상 못할 거야 없잖은가?" p199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신의 섭리야. 지금 오면 나중에 오지 않고, 나중에 오지 않으면 지금 오네. 올 것이 지금 안 와도 결국에는 오고야 마는 거야. 요는 각오야. 목숨을 언제 버려야 좋은지 그 시기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닌가? 그저 될 대로 되는 거지." p214

"제기랄, 이런 부조리는 철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걸세." p82

이렇게 여러 문장은 잠시 멈추게 하여 생각을 하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 적지는 않았지만 나쁜 악인을 통해서도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책은 나를 아마도 두번째 책으로 인도하여 계속해서 그의 책을 손에 놓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 끝에 와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본다. 나를 위해서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미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인지는 검색해 보면 훤히 알 것이지만 말이다.

"그는 1564년 4월 23일 런던 북동쪽의 한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Stratford upon Avon)에서 존 셰익스피어(John Shakespeare)와 메리 아덴(Mary Arden) 사이에서 장남이자 셋째 아이로 태어나 1616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인정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이지만 그는 '그래미 스쿨'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런던에서 작가이자 배우로 성공했고, 약 20년 간 희곡 39편, 154편의 소네트 등을 남겼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16세기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로 국가적, 문화적 자양분이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 <오셀로>, <한여름 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등으로 역사상 최고의 극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추측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기도 하다. 특이한 이력은 1580년 말쯤에 런던으로 진출해서 극작가 겸 단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어떤지 모르지만 극작 형식으로 글이 써진거 같다. 아무튼 탁월한 인물을 글을 통해 접해 보아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젠 뭘 하지?

아~! 인터넷 서점을 통해 셰익스피어 책을 신청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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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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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그들을 만들어냈다.”
 


하우징팡의 <인간과 피안>은 인공지능(AI)과 로봇과 인간의 이야기가 만난 SF 장르의 중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초반부는 들어가는데 있어 흥미롭지 못했다. 그러나 '영생병원'이라는 대목부터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몰입하게 만들고, 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히 SF 형식의 소설인 동시에 "인간의 존재가 인간을 찾는 일련의 과정(본질)들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심도 있는 사유성 짙은 수많은 질의와 인간 자신을 마주 대하게 하는 글들이 있어 독자가 잠시 멈춰 생각할 사유의 시간을 주고 있다. 마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명언들이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자들에게 말을 걸고 철학적 물음을 주고 있다. 


이미 한국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그의 소설 《인간의 피안》은 책 소개에서 언급되듯이 "인공지능이 일상화된 사회를 가까운 현실에서부터 먼 미래까지 시간 순으로 그리며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탐색을 하며 결국 인간이 가진 현재를 더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말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의 피안’은 지금 이곳의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가상의 세상을 말한다. 이 가상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은 이성과 효율을 추구하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불규칙한 감정을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을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 가위로 돌연변이나 장애를 제거하고 건강한 아이만 낳을 수 있도록 '생명윤리법의 유전자 치료 및 연구에 관한 1항에' 이미 유전자 치료 연구가 시행되고 있다. 그래서 어디서 본 기사에 의하면 '지능과 육체가 최적화 된 DNA를 주입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올해는 유전자가위(CRISPR)가 암과 유전 질병 치료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시험하는 해가 될 전망이다. 사진제공 셔터스톡


정상인의 난자(왼쪽)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효소가 녹은 수용액과 정자를 함께 주입하는 모습. / 미국 OHSU 제공


그러므로 인간은 점차 기계화되고, 인공지능은 그런 인간을 모방해 더욱 무기질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인 것을 아는가. 불완전해 보이는 요소가 인간 요소의 말살 정책으로 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다. 즉 인간은 프로그램화 된 AI 인간이 아니다. 모든 감정 요소를 다 가지고 있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격체요 영혼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특징―집착, 좌절, 애정, 분노, 후회 등―은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존재하게 하는 가치들이다. 《인간의 피안》은 이러한 가치가 상실된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미래에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일깨워준다"는 말에 충분히 동의를 하며 수긍하는 바이다.


그녀는 베이징 대학 중문과 입학 자격을 얻었지만 이르 포기하고 청와대학 물리과에 입학한다. 졸업 후 동대학에서 천체물리학과 경제학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도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SF 작가로서 그의 지식은 철학적 사유와 함께 탄탄한 논리와 서사를 지니는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총 여섯 편의 수록 작품 중 절반에 해당하는 세 편이 미국 및 중국에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 영화가 <인간의 피안>인지는 나온 자료가 없어서 모르지만 영화 감독들에게 꽤 러브콜을 받을 작품이라고 본다.


하오징팡이라는 작가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특징은 그 역시 인간임을 말하면서 결코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 우리의 삶을 지집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문에서 그녀는 말한다. 첫째 인공지능의 위협성은 실은 원자폭탄과 같은 이치다. 더 강력해져 어쩌면 두려울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지만 그 버튼은 인간의 손안에 놓여 있다. 다만 인공지능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파멸시키는 상황이다. 둘째 인공지능을 통해 현행 일자리가 대거 줄어든다. 즉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해 이해해야 하며 동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우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이상으로 할 때만 미래에 우리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아동 교육 프로젝트인 '함께 만드는 교육'을 시작하며 인공지능과 함께 걷는 길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한다.  어쩌면 영화나 책은 우리의 불안 심리를 부여하여 이슈를 통해 자신들에게 주목해 달라는 상업성도 있겠지만 그 불안이 어쩌면 현실이 되어 우리 삶 안으로 깊이 들어오는 여지가 충분히 있기에 우리는 이런 책을 통해 사유하고 통찰하며 문제를 미리 내 짚어 해결점을 찾아 나가면 좋겠다.


그렇다. 영화 "혹성 탈출: 종의 전쟁"이라는 영화에 보듯이 인간은 진화하는 유인원(시저)을 보면서 유인원이 언젠가 인간을 지배하여 노예 또는 현재 인간이 행하는 형태처럼 동물을 대할까 두려워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현실 가능한 일인가도 살펴 볼 만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모든 사물을 다스려 왔고, 최고의 지배자 위치에서 인공지능 제품들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불안한 것은 베트맨 영화에 나오는 악당 잭 니파이어처럼 그런 자들로 인해 인간이 지배당하고 괴롭힘 당할까이다. 인공지능 문제가 없다. 언제나 인간의 손 안에 있기에...! 그러나 인간이 결국 문제다. 그걸 악으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영생병원은 결국 인간의 염원을 다룬 '욕망'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본인만 아니라 내가 함께하는 대상이 영원토록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고 싶은데 그 꿈이 좌절되는 상황을 보면서 인간은 '초능력적인 불로초'를 오늘도 찾고 연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성경이라는 책 속에 말을 귀담아 들어야 되는 지도 모른다.


구약성경 창세기 3:19절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종교적인 것을 떠나 이 말은 진실이며 과학이기에 우리는 결국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인간 욕망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최대한 노력하며 최고의 과학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이건 금기된 "에덴동산의 열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면에서 결국 이 책은 인간이 가진 최대의 특징인 "인간성"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공지능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에 대한 상식과 창조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오징팡이 그리는 이상적인 교육은 바로 사랑을, 세계를, 창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p11

즉 인간에게 있는 육체성, 한계와 불완전함, 실패, 좌절, 회한, 애착, 반항, 비효율, 비이성 등의 모든 감정이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임을 하오징팡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오징팡의 글쓰기는 역자가 언급하듯 오로지 한 가지, "사람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는 고등학교 때 읽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저작을 통해서 비롯 되었다. 슐히딩거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의 피안이라는 책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 몸의 모든 세포의 모든 물질은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전적으로 교체된다고 그러다라고. 지금 네 몸의 물질은 전부 더는 1년 전의 그것이 아니야. 하지만 자신이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인간의 대뇌와 기억은 여전히 일관성을 유지하지"(가짜 어머니 인조인간 어머니의 말이다.)


"대뇌는 언제나 불변할까요?"(주인공 첸루이)


"대뇌 역시 날마다 변하고 있지, 비록 기억은 연속적이지만, 인간의 생각은 전부 변한 것이지. 대뇌 역시 변한다고 할 수 있어."(가짜 어머니)


"그렇다면 사람한테서는 대체 뭐가 안 변하나요? 내가 나인 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죠?"(첸루이)


"네 주변 사람이 네가 너라는 것을 알면 돼"(가짜 어머니) p116-117


이 대화는 가짜 어머니와 주인공 아들인 첸루이의 대화이다. 그는 병든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하고 가짜 어머니를 대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가짜 어머니인것을 모르고 그저 묘수병원(영생병원)에서 잘 치료되어 돌아 온 줄 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가짜 어머니인 것을 밝혀서 심장이 안 좋은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아버지가 가짜 아내라도 그 여자가 진짜 아내인 줄 알고 살아가도록 할지를 주인공 첸루이는 고민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가짜 어머니는 아버지가 볼 때 완벽한 어머니다.  복제된 몸과 죽어가는 환자 어머니의 대뇌를 통해 모든 감정과 지식들을 다 전달받아서 정말 어머니처럼 아내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있다.


반쯤 말하다 멈추는 모습도, 말하려다 입을 닫는 모습도 똑같다. 다만 진짜 어머니보다 훨씬 태연하다. 마치 자신의 신경과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어쩌면 신인의 감정이 완전하게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유와 기억 또한 분명히 어머니의 그것이다. p.118


그렇다. 인간의 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인간은 두뇌를 통해 자기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며 자기화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영혼이 있어서 두뇌와 의식을 컨트롤하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이런 질문과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이 책은 곳곳에 주고 있다.

흥미롭고 탁월한 전개 방식으로 책은 인간을 향하여 자신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이 책의 핵심으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의 피안’이 내포한 것은 실은 아주 단순하다. 인간은 차안(此岸)에, 인공지능은 피안(彼岸)에 있다. 저 멀리 피안을 바라보는 건 우리가 서 있는 차안을 비춰보기 위함이다. _서문 중에서 

 

*차안此岸: 이승세계, 현세. /  피안(彼岸)은 현세를 벗어난 이상 세계, 혹은 그런 정신 세계를 나타내는 말

SF 영화: 알리타 장면


영화: 아일래드 한 장면

【책속으로】

“전혀 아니야! 문제는 말이야, 저건 화를 낼 줄 모른다는 거야! 내가 저걸 욕해도 저건 화를 낼 줄 모른다고! 그럼 저게 지금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p.50

"눈앞의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왜 이 사람과 이 사람의 기억 속 그 사람은 똑같은데, 왜 또 그 어떤 것도 같지 않게만 느껴지는가." p104

"그 순간 첸루이는 온 가족이 이렇게 오봇하게 지내는 것 역시 좋은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첸루이는 눈을 감고 병원에서 임종을 앞두었던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들을 한 번 더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p105


설괴 앞의 기계 차가 침묵했다. 나는 녀석의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혹은 그것의 절망을 연상했거나 뇌가 저절로 떠올렸을지 모른다. 녀석의 절망은 그 안의 인간에게서 온다. 내가 막아선 이 차는 단순히 버둥거리기 만 할 뿐 절망과 같은 그 어떤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p.258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 자유를 가지고 있어요. 나야말로 나 자신의 주인이죠. 나는 내 생각과 선택을 결정할 수 있어요. 당신은 영원히 이 점을 부정할 수 없어요.”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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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 -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
리하르트 폰크라프트에빙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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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책의 저자인 폰크라프에빙 박사는 처음으로 헤테로섹스, 사디즘, 마조히즘, 호모섹슈얼, 페티시즘 같은 변태 성향의 성적 용어들을 오스트리아 빈 대학 신경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내어놓았다. 정신병리학의 ‘성서’로도 통하던 이 책은 프로이트와 칼 융 등 현대의  정신의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띠지에는 두 문장이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 시대

그러나 우리는 정작 사이코패스를 모른다"


아마도 2014년도였을 거다. TV에는 제주도 지검장인 '김수@'씨가 길거리 음란 행위로 인해 이슈가 되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변호사이며 검사였던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이 사이코패스나 하는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결코 특정한 존재의 사람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며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로 드러나면서 우리 주위에 혹여나 이런 사이코패스가 있지 않을까 딸을 가진 부모들은 염려를 하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N번방 사건을 지금 보도로 날마다 접하고 있다. 조주빈이라는 25살의 한 청년과 일명 '부따'라는 10대인 '강훈'이라는 청소년의 신상이 공개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로부터 완전한 낙인이 찍힌 존재로 서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 착취물'을 통해 가학적이며 사이코패스적인 성 착취물을 자신들만 아니라 판매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25만명이 N번방에 접속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현재 30대 '승려'가 N번방 성적 착취물을 유포하여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더해졌다. 그는 지난 2016년부터 지난달까지 음란물사이트 4개를 운영하면서 8,000건이 넘는 음란물을 텔레그램 채팅창에 유포했던 것이다. 그는 영리목적을 위해서 거대한 음란물을 유포하였다. 그러나 N번방은 가히 가학적인 요소가 있는 음란물로서 그 또한 그것을 즐기다가 이런 사태까지 가게 되었으리라 본다. 


책은 이런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에 대한 사례로 가득차 있다. 즉 도착적이고 이상한 성 심리를 가진 사람과 성범죄 등 다양한 사례를 면밀히 제시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사이코패스는 멀리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자들임을 이 책은 말해 준다.

어떤 면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그것은  나 또한 이 책의  부제목에 끌려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을 알고자  범죄 심리학자인 '이수정 교수'와 같은 범죄 심리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이 책을 들여다 보고자 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정말 사이코패스가 되었는가?

성 도착증과 같은 성범죄 사건은 어떻게 해서 가학적이며 살인까지 이루어지면서 사회에 악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 두 가지가  내가 이 책을 선택(서평 신청)해서 본 이유이다.


현대 지성사에서 한 획을 그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본인 또한 '성의 역사'에 대해 1984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책을 집필했지만(위독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수정작업에 매달림) 그런데 ''리하르트 폰크라이프트'가 쓴 이 책을 보고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진실을 외면하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던 분야를 집대성한 걸작'


이 말이 무엇인지를 책을 보면 실감나게 적혀 있다. 전문적인 학술서적이지만 전문가뿐 아니라  성도착적인 환자와 환우 가족, 동성애자, 이상성애자를 비롯해 일반 독자 모두가 오랜 세월 탐독해온 베스트셀러로서 단순 사례를 나열하거나 인간의 본능이 초래하는 갖가지 이상 심리와 행동을 파헤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겪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고통받던 사람들의 생생한 체험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즉 그동안 사회로부터 불온하게 여겨졌던 환자 또는 환자로서 의심받던 사람들의 폭로와 항변을 대변한 책이다. 


지금 청소년만 아니라 초등 소년들도 성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성적 일탈은 그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우리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얘기이기에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불편하기 그지 없는 일탈의 내용들인 도착적인 성 심리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잔혹한 성범죄까지 198개 사례를 드러내면서 불운하게 유전으로 타고난 운명과 육신의 강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사례 중심을 통한 성 심리 연구서이다. 사례를 통해 성적으로 별다른 이상 증상을 겪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나 이상한(비범한) 사람들이 보면서 인간의 본능을 이해하게 되고 성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에 관련된 신심의 고통과 광기에 시달리던 정신의 이상한 굴레에서 벗어나려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치료하는 이상한 효험을 보여 준다." 동변상련의 마음인가? 모르겠다.

아마도 사례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잘못된 성 편력이 옳지 않은 것임을 보게 되는 동시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님을 보면서 자신의 욕구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보게 되지 않아서일까?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자위행위"와 "동성애"이다. 선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 보다는 후천적으로 이루어 진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동성애 부분에 있어 선천적 질환에 대해 부정적이다.


"실제로 남성과 여성이 한 몸으로 나타나는 쌍성은 볼 수 없다. 심리적으로 쌍성(양성)은 가능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성기는 완전히 구별된다." p297


"심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일체가 선천적 동성애와 후천적 동성애 어느 쪽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p280


"선천적 동성애는 후천적 동성애의 발생에서 볼 수 있는 발전 수준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다양한 동성애의 수준을 조상과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거나 후천적으로 얻게 되었거나 후손에게 생식으로서 전달되었거나 아무튼 비성상의 다양한 수준이다." p288


물론 이 말은 선척적으로 동성애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합당한 성의식이 아니라는 말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착증은 자위행위와 함께 치료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관한 예방법을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자위행위를 비롯해 성생활에 해로운 요소를 추방한다."

"건강한 성생활에 불리한 조건에서 비롯한 신경쇠약을 제거한다."

"동성애 대한 충동과 감정을 이겨낵 이성에 대한 관심을 키우도록 심리를 유도한다." p409


결국 이 책은 다양한 성도착증적인 사례를 수없이 가져오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상의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폰크라프트에빙 박사의 말이다. "성생활의 건강에서 자위행위와 지나친 본능의 억제를 가장 중시한다. 이상하게 신경과 정신이 빗나가고 정상의 상태가 기벽과 변태로 기울게 되는 악습을 경고한다."


성범죄에 대한 사례가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고, 성장 과정 속에서의 심리적 억압 속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미약 상태에서 벌어지는 성적 상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다양한 사례를 언급한다. 거기에는 "정신병에 따른 정신미약, 뇌졸증에 따른 정신미약, 뇌손상에 따른 정신미약, 마비성 치매, 간질, 주기적 광증, 조광증, 색광증, 우울증, 히스테리, 편집증" 등이 모두 성도착적인 증상과 관련되어 범죄가 나타났다.


따라서 제목에서 보여주듯 잘못된 성은 "광기"이다. 광기는 치료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본 이 책의 결론이다.


혹여나 이 책이 가학적인 성 탐닉자들이 자신들의 가학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례가 되면 안 될 것이다.

책은 28번의 사례에서 "처녀들에게 칼을 휘드르고 사정한 남자"의 얘기도 나온다. 읽어보면 미친놈이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든다. 여자 신발에 집착하는 청년의 얘기며, 밟히는 것을 좋아하는 모범 가장의 얘기, 추녀에게 흥분하는 예술가(여자가 욕설을 하면 거칠게 발기함), 배설물을 자신에게 보게 하는 행위, 먹는 행위 등 이상한 변태적 얘기가 이 책을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자나 심리자가 아니면 이 책이 과연 인간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가진다. 


그러나 종종 앞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한 성도착증을 보이는 증상이 있기에 인간이 가진 "광기의 성"을 알고자 한다면 한 번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썩 추천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더 탐닉하는 법, 이 책이 아마도 그런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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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발견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윤철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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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한국교회를 위협하며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신천지가 사회악인지 알았는데 정상적인 기독교도 사회악으로 규정되고 이해되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개성? 강한 교회로 인해서 더 인식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인가 할 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금에 벌어진 현상을 보더라도 모든 신학적인 이해 관계를 떠나 불교, 카톨릭은 현상의 문제에 단호(지혜롭게)하게 대처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나쁜 시선을 받고 있지 않다. 유독 기독교라 칭하는 이들만 지금 문제시 되고 있으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교회나 똑같은 시선으로 본다.
이런 시점에 '복음의 발견'이라는 책이 눈에 띄였다.

특히 이 책을 설명하는 부제가 눈에 띄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기 전까지
신자의 삶은 해석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의 문제는 결국, 이중적 실존이다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라야 가능하다

복음이 과연 인간 삶의 문을 열고, 삶에 진동을 일으켜 외부세계와 소통하게 하면서 종국에는 공감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 줄 능력이 되는지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보고 또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도 이 책에 조금이라도 해답이 있을까 하여 손에 잡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하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듯한 메시지를 책 겉표지에 실었다. "삶의 무기"라는 굵직한 문장이 읽는 이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저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어쩌면 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근본 원산지이다. 그는 30년 이상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매진을 했는데 본 책은 대략 10년 동안 전해진 메시지 가운데 발췌한 글들이다. 특정한 주제에 따라 쓰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관심을 반영하여 '복음의 발견'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본 메시지를 써내려 갔다.

사실 신학적 메시지인 줄 알았다. 학문의 선상에서 바라 본 신학적인 해석과 통찰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교인들이 "삶의 무기"라는 거대한 해석을 어떻게 쥐어주게 만들까하며 기대감 속에 책을 펼쳤는데 본 논고가 "설교" 형태로 전해진 메시지라서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반면에 조직신학자로서의 신학적 담론만 다룰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사변적인 신학으로 삶을 다루는 글을 보면 독자와 교인들에게 전혀 감동이 전해지지 않고 단순한 학술적 자료만 되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잘 썼지만 혼자만 똑똑하고 혼자만 누리는 그런 글들로 인해 사실 독자는 바로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섣부른 우려였다. 다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가 전하는 글은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메세지는 설교 형태를 띄지만 삶이 오롯이 녹아난 메시지로서 가슴을 건들고 행함(삶)을 건들고 있다. 즉 너무 높은 하늘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 땅의 메시지로서 독자에게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틀을 정해 놓고 설교의 형태를 한데 묶어 나누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기)에서는 "사랑과 섭리가 시작이다"를, 문제를 전개하는 (승)에서는 "은총과 믿음이 현재를 직면하게 한다"를, 방향을 전환하는 (전)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뚫고 은혜는 임한다"를, 거두어 끝맺음인 (결)에서는 "인생의 열매는 이끄심을 따를 때 허락된다"를, 마지막을 하나님께라는 소제목에는 合(합)이라는 한문을 넣고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광야는 영광의 문이다"라고 제시한다.

틀이 주는 의미가 없잖아 있지만 굳이 틀을 정해 놓지 않아도 될 포괄적인 메시지가 이 책에 흐르는 주제이다.
그건 '실존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답은 복음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십자가의 은혜'를 알 때 결국 삶의 절망은 희망이 되고 진정한 변화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이 땅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학자인 마틴 부버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들어보자.
"기독교인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완고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든지 일어났다고 확신하는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유대교 랍비는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을 듣자 창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변한 것이 없네" p123

기독교의 현주소가 아닐런지. 변한 것이 없다면 과연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될까?

사실 이 문제는 사죄의 은총과 믿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해서이다.
죄의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긍휼을 구하고 믿음의 방향성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내면의 영적 질서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저저는 '태양'이라는 비유를 잘 사용하고 있는데 '믿음은 방향성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식물은 빛을 향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여전히 우리가 죄와 허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성을 회복하고 긍휼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울와 다윗의 차이,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결국 어디를 향했느냐과 관건인데 사울과 유다의 비극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데 있다고 말한다. p72-73

책은 계속해서 믿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며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이해 방식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의 리더자인 루터가 외친 "오직 은혜로만, 오믹 믿음으로만"이라는 외침은 당시 부패의 상징이 된 로마 카톨릭을 향하여 필요한 메시지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2장 4절에서 가져온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만'의 믿음이 아니다. 
즉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는 성실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받은 묵시가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끝까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기다리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고자 한 '믿음'의 메시지는 행동없는 믿음이 아닌 거대한 종교개혁에 맞서 싸운 행동하는 믿음, 불의에 저항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부분을 신학적 지식을 통해 멋지게 해석해 주고 있는데 여기서 독자들은 잘못 정리된 믿음이 수정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해 주는 내용을 보자. 
성경본문 2:16절 첫 부분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나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문법상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u)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신학적 용어로 '코르 쿠르붐 인세'(cor curvum in se)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거스틴이 만든 말인데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져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 자기 중심적인 하나님을 믿게 되면 공감적 믿음과 사랑이 생기지 않아 하나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공감적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 사랑은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부름받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을 넘어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복음은 한낱 '정치적인 구호'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저자는 25개의 글(설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된 믿음의 이해를 수정케 하고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로 초대한다.

본 서적에서 주목할 부분은 설교의 본유적인 과제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에 오롯이 기록되도록 쉽게 독자들을 초청한다. 즉 일단 가독성이 좋다. 조직신학자라 읽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딲딱하게 전문 용어로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읽기가 수월하고 이해도가 빨리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가독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깊이 묻어난 글이다. 익히 알고 있는 글과 예화가 보이지만 품격있는 글과 깊이가 묻어난 글이 어우러져 편안하게 읽고 (설교를 듣는 다면)듣기에 좋다. 

아마도 이 부분은 저자가 교수의 직함만 가지지 않고 신앙의 실제를 살아가는 교회를 담임하며 설교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불어 '삶의 실제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조직신학자인 저자가 삶의 언어로 잘 풀어낸 이 책은 현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만 아니라 신학에 입문한 자들에게도 설교의 방향성과 메시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귀한 샘플이 되리라.
사실 시간을 두고 읽으려 했는데 읽으면서 손에 놓지 못하고, 두번에 걸쳐 읽어냈다. 
다시 말하지만 가독성이 매우 좋은 깊은 신앙적 사색이 담긴 메시지다. 

아쉬운점은 그분의 개인적 신앙 체험의 글이 자세히 내포되어 설명되어졌다면 더더욱 귀한 책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삶에서 우러난 메시지가 더 깊이 사람의 마음에 남아돈다. 그 부분이 많이 절제되어 있고, 아쉬움을 남긴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루소의 고백론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놀라울 정도로 드러내어 공감를 일으킨다. 
톨스토이의 자서전도 그렇고, 존 번연의 자서전(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크리스천 다이제스트)도 보면 리얼한 삶의 예화가 읽는 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삶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대가 겸손(온유)하지 못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짢게 한다면 삼위일체를 아무리 심오하게 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상한 말이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스러운 삶이야말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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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의 사회학 - 남자를 지배하는 ‘남자라는 생각’
필 바커 지음, 장영재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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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 어린 소년들에게는 남자가 되는 길로 가는 첫발을 내딛기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말이 있다.
 남자를 지배하는 "남자라는 생각"

남자의 일생을 좌우하는 ‘남자다움’의 의미와 실체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 그리고 저자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써내려간

오늘을 살아가는 남자들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은 꼼꼼하게 짚어준다!

남자라는 이 단어는 남성들에게 굉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여자와는 다른 존재로서 세상을 남자처럼 대하고, 남자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남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우월감을 갖게 하는 원동력을 부여한다.

나 또한 남자이기에 여자로서 태어나지 않는 자신을 초등학교 때이지만 자랑스러워 했던거 같다.

남자는 결코 계집애가 아니기에 남자는 '하늘'이라는 당당함이 주어졌고, 여자는 '땅'이라는 복종으로 남자를 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그게 아니다. 남자는 하늘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동물이다.

즉 여성시대를 맞아서 남자는 그저 하늘이라고 생각만 하며 살지 여자가 이제는 남성이 상징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남성이 이제 소리치며 호소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즉 여성들이 원하는 남자다움의 이미지가 극단적 페미니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자가 집안에서 큰소리를 치는 순간, 남자는 더 못난 남자가 되며, 내가 남자이기에 남자의 뜻을 따라서 여자가 순종하며 순순히 따라와야 된다고 하는 순간 가정은 해체되고 아파진다.

그래서 남자는 선택했다. 외적으로는 남자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여성에게 순종하며  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 시대에 여성이 원하는 남자가 아닌가 생각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는 '남자다움'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면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자다움이라는 사회적 관례가 세대 간에(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수되면서 사회에 많은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이라에서는 매주 여성 한 명이 배우자나 이전 배우자의 손에 목숨을 잃고 있다. 매년 30만명 이상의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을 경험한다. 남자는 여성이라는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압박해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주입받아 여성에 대한 폭력과 학대가 쉽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성다움'은 남자에게도 해악을 가져오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이기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이겨내며, 가정을 지키며, 강인해야 하고, 약점이 없고, 이성애자이고, 통제하는 사람이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하루 6명의 남자가 자신을 죽인다. 즉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방지 서비스인 '라이프라인'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세 배라고 보고한다. 매년 자살하는 남성의 수가 자동차 사망자 보다 두 배가량 더 많다는 것이다.(오스트레일리아 기준)

더군다나 자살 관련 통계에서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를 보니 남자들은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확실하게 원하는 자살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게 약을 과다 복용하거나 물을 채운 욕조에 손목을 긋는 형식을 취하는데 남성은 총을 사용하고나, 목을 매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

최근 아는 지인 마을에 한 아버지가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끔찍했다.

아들에게 퇴직 연금을 다 몰아주어서 사업을 하게 하고, 본인은 아내가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업이라는게 코로나가 맞물려 도산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울증이 찾아오고 아내와 사이도 좋지 않는 가운데 자살을 했는데, 어떻게 했느냐가 충격이다. 그건 바로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결코 사회적으로 더이상 요구되는 것을 버릴 때가 되었다.

남자다움에 관한 사회적 정의의 재검토는 남자들이 받는 -충족 불가능한 성취를 기대하는 -압박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성다움을 기대하는 압박은 여성에 대한 폭력, 학대, 통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조성한다.

맨 박스Man Box 용어가 이 책에 나온다. 한 책에 보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선량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고히 강조하면서도, 그런 선한 남성들이 여성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사회화가 바로 맨 박스라고 말한다. 맨 박스로 인해 남성들 역시 희생당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맨 박스는 남성들이 보유한 성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하며, 이는 마침내 그 남성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대물림되는 현상이다. 맨 박스가 가미된 사회화는 자녀들이 아주 어릴 때의 양육에서부터 반영되는데 예컨대, 아버지들은 딸들이 울면 괜찮다고 안아주지만 아들들이 울면 먼저 호통부터 친다.

대표적으로 사례를 들면, "사내놈이 되어가지고 울고 있다니, 어서 뚝 그치고 고개를 들어라! 아버지 화나게 만들지 말고, 울지 말고 문제가 뭔지 확실히 얘기해라! 네 방에 들어가서 감정이 진정되면 그때 와라!"같은 식이다. 우리나라 용어로 보자면 "남자는 평생 눈물은 세 번만 흘리는 것이다."

어릴 때 넘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릎이 까이고 핏방울이 맺힌다. 이전 같으면 옆에 있는 엄마 아빠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아주었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다르다. 힘주어 어깨를 잡고 빤히 눈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정도쯤은 괜찮아. 넌 씩씩한 남자니까 아파도 울지 않을 거지?

그렇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강요를 어릴 때 부터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남자답지 못하게 굴면 또래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고립된다. 그와 달리 남자답게 행동하면 칭찬과 우러름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약점을 보이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울지 마라. 계집애처럼 굴거나 감상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고 모든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남자다움의 규범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즉 가정폭력, 자살, 직장 내에서의 성폭력, 여성 혐오, 동성애, 미투 운동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남자'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남자다움'이다.

이처럼 남자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끊임없이 교육받고 강요당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모든 관계를 주도해나가고, 모든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남자답다고 칭찬받고, 일생 동안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피해자는 늘 여성의 몫이다.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남자다움이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면서 성역할의 변화 양상,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있다.

남자다움을 가장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은

평생토록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저자는 우리에게 새로운 남성성을 말하며 사회학적 요소도 제거되면서 여성도 행복하고 남성도 행복한 세상을 보게 한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를 보면(무려 80년을 걸쳐 진행 중임) 행복하고 오래 살도록 해주는 유일한 요소가 삶을 통한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제남자다움의 연기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때가 되었다. 남성성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강인함을 부드러움으로, 폭력을 연민으로, 완고한 극기심을 유연함과 소통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를 치료하는 길은 "서로가 존중하며 사랑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자세이다. 이것이 전부다.


추신: 썩 괜찮은 책이다. 남자다움이 뭔지를 알고 싶다면 괜히 허세 잡지 말고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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