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
마르셀라 세라노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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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분명히 예전에 읽었던 책이다. 세계명작 전집속에 들어있었을 것이 틀림없고, 당연히 내가 빠뜨리지 않고 읽었을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죄와벌'은 사람을 죽인 후에 주인공이 겪는 번뇌에 관한 책이고, '변신'은 갑자기 벌레로 변한 사람이 겪는 갈등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작은 아씨들'은 그 유명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제목이 말하는대로 아가씨들에 관한 책인 것은 틀림없을 터인데...  그러나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이 준 울림이 잘 기억이 자지 않으면서도 '작은아씨들여 영원히 안녕'이라는 작은 아씨들을 리메이크한 책이라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아마도 내 무의식속에 남아 있는 작은 아씨가 나에게 준 감동이 나를 이 책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아름다운 표지와, 멋있는 제목의 글씨체, 내가 읽기 좋아하는 분량의 예쁜 책이라는 것 이외에 바로 그런 점들이 나를 이 책으로 끌어당긴 요인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희미하게, 아주 천천히 그것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희멀건 그림자의 움직임 같은 것. 먼 시간의 지평을 넘어서 나에게로 다가온 것은 내가 잊고 있었으나 아직은 내 속에 남아있던 청년기의 감성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작은 아씨들의 틀을 지니고 있으나 보다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고, 아픔과 열정을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의 뒤에서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거대한 감동의 드라마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시대가 가져온 세상을 살아가는 어법의 변화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름다운 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규정하는 가장 큰 사건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바로 9.11사태일 것이다. 뉴욕경제의 심장부인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는 그 후의 세상이 움직이는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와 꼭 같은 9월 11일. 1973년의 칠레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궁에서 반란군들에 의해 총을 맞고 죽음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 대통령의 죽음 뒤에는 그 나라에 대한 이권이 걸린 나라와 기업들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이라는 책은 바로 이 두가지 사건을 꿰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던 사람의 삶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랑과 아픔을 겪으며 서서히 늙어간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며서 누구나 동일하게 겪는 그 생활사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요인이 미치는 힘 또한 지대하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은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과, 그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특수한 조건,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의 주인공인 네명의 서로 다른 아가씨들. 서로 성격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여인들은 그 세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그들은 그들이 성장했던 옛 마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세상이 아직은 그들을 아프게 하지 않았던 그 시절, 거대한 도시이지만 칙칙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수도 산티아고보다 비할수 없이 작은 마을이지만, 그녀들에게는 그 무엇에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요의 요람이었던 그 마을(푸에블로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로의 회귀... 그리고 그 옛 추억의 궤적이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경험...

파블로 네루다의 도움을 받은 아옌데의 선거 혁명과, 그에 대한 피노체트의 반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전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운 칠레는 이제 겨우 그 아픔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 많은 아름에 대한 증언문학들의 사다리를 딪고 서서, 이 책은 시대의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한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과거 칠레의 9.11을 넘어서, 오늘날의 세상을 규정하는 미국의 9.11(서로 피해를 당하는 나라가 바뀌었다)이란 세상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긍정,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무척 아름다운 책이다.
 
문학이 역사에 메몰되어서도 안되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빠진 문학 또한 큰 울림을 얻기가 힘들다. 무척 아름답고 빼어난 문체로 서술된 이 책은 그 쉽지 않는 작업을 구현한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사람의 삶에 대한 애틋한 마음, 그리고 어떤 아픔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긍정... 그것이 멋진 번역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이 책에서 얻는 큰 감동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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