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참 좋은 책이다. 이런 책과의 만남은 책을 읽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신비로운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옳은 주장. 깊은 성찰. 잘 모르던 현상에 대한 깨달음의 기쁨... 옳은 주장과 내 마음과의 공감에 의한 반가움... 그런 것이 느껴지는 책이다.

오늘날은 뭐니뭐니해도 자연과학이 이끌어가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여전히 사회적이다. 과학이 세상을 다르게 만들어가고 있지만, 과학도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에 너무 심취하다 보면, 과학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바로 그 순간에 문제가 발생한다.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괴리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인문학이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니, 과학에 대한 발언을 하지 못하거나, 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볼때 엉뚱한 소리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그 자체의 발전의 관성과, 일반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아무런 제약없이 무한질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회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기술의 발달은 항상 사회의 관찰과 지성적인 관심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과학에 대한 지나친 찬사는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엄청난 재원을 œK아붓거나, 전후방 연계가 없는 부분에 투자를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사회구성원들이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과학만의 과학에 의한 과학의 발전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맹신과, 과학의 자만에 의한 질주는 때로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비판적 환경주의자'란 책이 지적하는 우리사회의 잘못된 환경주의에 대한 지적은 그런점에서 뼈아픈 반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황우석 사기극'을 가능하게 한 것도 결국은 우리사회의 무비판적인 갈채였다. 황우석사태는 우리국민들과 언론들이 만들어준 무대위에서 이루어질수 있었던 연극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에 대한 지나친 갈채와 그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그러한 사태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사회와 언론은 무대만 마련해준 것이 아니라, 연출까지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다. 과학은 과학만의 것이 아니다. 과학은 검증받고 비판받고, 그래서 진정으로 이해받고 진정으로 사랑받아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자꾸만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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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2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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