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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는 곳 사는 곳
다이라 아즈코 지음, 김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한 마디로 압축하라면, ‘건물은 생물이다’라는 말을 꼽고 싶다.  주인공 리오와 사토코, 그리고 데쓰오가 펼치는 건물 세우기, 사람 세우기를 통해 숨 쉬는 건물에 사회와 인간을 대응시킨 시나리오적 문체를 구사한 특이한 작품이었다. 

1막은 삶의 건조함에 공사장 비계를 만취하여 올라간 구인광고지 부편집장 리오를 공사감독관인 데쓰오가 구하는 이야기이며, 이 일을 계기로 리오는 데쓰오를 찾게 되고 건설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2막은 가기야마 건설사를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창업주 딸인 사토코의 고민과 경영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며,  3막에서 5막까지는 가기야마 건설사에 취업한 리오가 공사현장 감독을 거치면서 펼쳐지는 데쓰오와의 짝사랑과 직원상호간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리오와 사토코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의 인생역정을 통해 개별 인간을 볼 수 있었고, 감원과 합병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 속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을 건축에 대응시켜 인간이 건축이고 건축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보여 준 작가가 펼치는 이야기는 내가 자고, 사는 공간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 주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에 대해 고마움과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해 준 점 고맙게 생각한다.

장점이자 단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 하나는 많은 소설이 묘사와 대화의 구분이 뚜렷하여 독서의 흐름을 타기가 쉬운 반면, 이 책은 실험적인 시나리오 스타일의 문체로 읽기가 다소 힘들었다.  방백식의 독백은 생동감을 주면서 감정이입은 쉬워서 일방적 묘사체보다는 읽기가 쉽겠지만, 일관성이 없음으로 혼란을 야기하였음은 아쉬운 점이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이런 문체의 섞임 현상이 드러났다.  작가가 시나리오작가 출신인 것 같다. 

(예)

1.

자재가 쓰러져 옆집 함석담을 무너뜨렸네.  전 시행자의 부실공사로 마루 밑바닥 상태가 심각해서 그곳에 손쓰다 보니 스케줄대로 진행하기는 힘들어 보이네.... 사토코는 현장을 돌며 계속 머리를 숙였다.   (103p.) 

2.
....(중략)... 데쓰오와 비교하며 고로를 점점 하찮게 여기는 타산적인 자신에게 리오는  어렴풋이 불안을 느낀다. 
데쓰오에 대한 마음은 진짜일까? 
난 데쓰오를 우상화하고 있다.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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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절) 
 ‘있다’가 아니라 ‘존재한다’라는 표현에는 건물을 구성하는 재료 하나하나를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다루는 현장의 감성이 보인다.  예를 들어 마루나 벽, 가구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커버를 씌우는 행동을 현장에서는 ‘양생(養生)’한다고 한다.
양생한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다정한 말을 들을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집은 생물이다.                                                                                 (145p)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행자에 대한 대처예요.  시행자의 요구는 점점 강도가 세지고 사람을 여간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니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게요.  하지만 그건 그만큼 집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무것도 없던 곳에 살려는 사람이 이렇게 하고 싶다거나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형태로 드러나 집이 세워져요.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요.  자고, 먹고, 쉬고,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 역시 우리 집이 최고구나 하죠.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정겹게 느껴져요.  한밤중에 일어나 잠결에도 제대로 화장실을 찾아가는 건 몸이 공간을 기억했기 때문이잖아요.  집이란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의 일부가 돼요.  그런 것을 만들다니…….”                      (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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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발돋음하던 대명컴퓨터의 사장 고대명은 어느 날 엘레베이트 속에서 넥타이를 맨 똥개로 변한다.  자신을 개로 생각한 3명의 사람에게서 용서를 얻어내지 못하면, 다시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영원히 개로 살아가야 한다.

2.
신데렐라를 꿈꾸며, 백마 탄 왕자가 오기를 기다리나, 소망은 요원하며 배고픔은 지척이라, 어쩔 수 없이 대명컴퓨터 고객상담센터에 취업을 하게 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태파악과 주제파악이 동시에 되지 않는 안하리양도 고대명과 더불어 더블캐스팅된 주인공이다.

3.
개가 된 CEO 고대명은 옥탑방 신세의 실업자 안하리를 대리사장으로 내세워 편견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입의 혀와 발의 신발인 제갈 전무을 비롯한 부하직원들을 직시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안하리 역시 말단 임시직원에서 대리사장 역을 맡음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보게 되고, 넓은 인간관계를 이해하게 됨으로 당당한 이상적인 젊은이가 된다.

 

 4. 박수
가상공간 설정을 통해 있을 수 없는 일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한 작품이다.   읽는 이가 개인이 갖는 사고의 한계와 기업이나 사회에서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필자 조한필님의 뛰어난 재치와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5. 황당
‘개의 저주’를 세 번 받아서 개가 되고, 세 번의 저주를 풀어야만 사람이 된다는 설정은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이 경험한 황당함과 그로 인한 고통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변신은 공포를 수반하며, 이로 인한 고뇌는 끝이 없다.

 

 6.
(한 권의 책이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여러 종류의 책이 있고, 독서의 목적과 읽는 이의 현재상황 및 과거 미래태가 다르기에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없고 똑같은 감명을 공유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산업전선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체감도와 나와 같이 학생을 상대하는 사람이 느끼는 체감도는 다를 것이다.  내가 책을 볼 때, 최종적으로 잡는 기준은 형식과 내용의 완성도이다.  구성이 얼마나 탄탄하며, 구성의 그릇에 담긴 알맹이는 얼마나 감동적인가를 늘 따진다.)

단순한 흐름에 단순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나와 같이 경제에 문외한인 사람도 한 권의 소설책마냥 자금자금 재미있게 읽도록 한 작품이다.  가벼운 접근법을 구사하였기에 내심 가볍고 경쾌하게 한 번에 읽었다.  여러모로 즐거운 읽기가 되었고,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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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메레르 1 - 왕의 용 판타 빌리지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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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감상]
용을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가 만화적인 요소에 머물지 않고 소설로서의 감동과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였다.  작은 감동이나 공감은 있긴 하였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소설로서보다 영화 한 편으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다.  소설이 갖는 심층적 사유나 행위를 기대하고 읽기보다 영상매체가 갖는 개별 행위의 결합과 전개로 내용을 전달하는 편이 작가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분 감상]
1. 테메레르의 특징으로 호기심을 들 수 있다.  특히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많은 호기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성장 이후에는 이러한 호기심을 갖는 장면은 없다. (아래 구절 참고)

2. 테메레르라는 중국용의 활약상보다는 테메레르의 성격이나 행적을 통해 작가 자신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었고 여러 인물들을 피상적이나마 만날 수 있었다.

3. 여러 인간군상과 용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서로간의 알력과 질투, 그리고 배신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문제점]
1. 62p.에서 63p.로 넘어가는 글은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중간이 빠져있다.

2.  ‘등장인물과 용’의 소개에 그려진 용의 그림은 실루엣만 나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작가가 용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이해를 도울 의도로 소개를 하려 했다면, 출판사측에서는 다소 출현이 되겠지만 용의 모습을 컬러로 그렸더라면, 큰 참고가 되었을 테고, 더 실감나는 글읽기가 되었을 것이다.

3. 해군에 비해 공군의 열악한 생활 조건은(86p.) 용이 갖는 중요도를 고려한다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 태어나서 어른용이 될 때까지 테메레르가 가진 호기심을 나타낸 구절들 -

‘끝이 갈라진 길고 뾰족한 혀를 연신 날름거리며 녀석은 모든 걸 맛보았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지능도 꽤 높은 생물임이 분명했다.’(36p.) / '당장 날아오르고 싶은데.‘(44p.)

 '특히 보석의 원석과 채굴 방법이 기록된 책을 읽어주자 테메레르는 펄쩍 뛸 듯이 좋아했다.’ (85p.)

 '이미 테메레르는 바위로 둘러싸인 해변의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묘하게 튀어나온 암석들과 맑은 물이 테메레르의 관심을 끌었다. (89p.)

 '나도 그 논문 읽고 싶어.  로렌스, 그 사본을 구할 수 있을까?‘ (95p.) 

 ’참 재미있겠다.  우리 그렇게 살면 안 될까?‘ (136p.) 

 ‘테메레르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을 되풀이해서 들려 달라고 졸랐고, 다 듣고 난 뒤에는 용과 군함에 관해 학자들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던졌다.’ (137p)

 '테메레르는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어른스러웠고, 세상의 지식을 열정적으로 빨아들여 이제 모르는 게 거의 없었다.‘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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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메일
이시자키 히로시 지음, 김수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참신한 소재에 담은 짧은 추리소설 - 체인 메일 - 이시자키 히로시

(1) 작품 전체적인 평  
 일상이 지겨워 어디론가 탈출을 하고픈 세 소녀가 엮어가는 연쇄창작소설을 소재로 현실세계와 상상세계를 교묘히 엮어 만든 한 편의 소설이다.  
 현실에서 시작하여 가상세계인 인터넷 메일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과 중첩을 이루는 작품의 플롯을 보면서 이시자키 히로시 작가가 지닌 역량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이 작가의 문학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겠다.) 말미에서는 사와코가 쓴 글귀의 몇 부분을 니체의 글에서 인용함으로 철학적 언의가 현실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내용의 깊이나 전개의 짜임새는 없으나, 현실과 상상세계의 결합을 시도하여 현실의 문제를 부각시킨 점(가정-학교-친구와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청소년의 갈등)과 가상세계가 갖는 긍정성을 보여주려고 한 점은 이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의도한 목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작가가 말한 가상세계가 갖는 긍정성은 다분히 순수한 생각이다.  가상세계로 인한 현실 부적응이나 더 큰 현실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다분히 크다는 사실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2) 등장인물들 각자에 대한 감상  

 등장인물은 크게 사와코, 마유미, 마이 이렇게 세 명이다.  체인메일 속의 등장인물은 넷이나 사와코가 2명의 역할을 하였기에 체인메일 실제 참여자는 세 명이다.  이들 세 명이 처한 가정환경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물론 사와코는 가정환경이 원인이 되어 삐뚤어진 성격을 가졌다기보다는 병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말에 순응하여 일류학교에 가야겠다는 지나친 의지가 단체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한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이 와중에 버팀목이였고, 우상이었던 어머니의 사망은 급기야 아버지를 ‘녀석’으로 표현할 정도의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만든다.  이런 소녀까지도 ‘남들과 조금 다른 소녀’(262)이고 ‘소녀들의 슬픔을 공유하며 당신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누구와도 다른 당신이 되어’(263)줄 것을 요구하는 작가의 변은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소외되고 즐거움이 다소 부재한 현대 청소년들의 아픔을 살짝 한 번 들쳐서 생각해 보자는 취지는 얼마든지 공감하나, 무작정 그들의 아픔이 순전히 외부환경의 탓이라거나, 그들에게 비행의 면죄부를 줘야한다거나 하는 식의 직-간접 웅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 

 (3) 번역에 있어서의 문제점  

너무도 많은 띄어쓰기 오류로 눈의 피로를 더한 출판사측이나, 후반부에 가서 대량으로 언급된 전문용어나 한자표기에 대한 전무한 설명으로 일관한 무책임성은 과연 김수현이라는 번역가 분을 어떻게 평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안겨 주었다.  띄어쓰기 오류는 출판사측이 책임져야 할 문제기에 따로 예를 언급하지 않겠으며, 단지 설명되지 않은 전문용어들은 여기 따로 적어보겠다.

톨사이즈 블렌드 커피(201) , 파라슈트팬츠(201) / 캐러멜 마끼아또(201) / 이즈의 산(213) / v6 , 합법 드럭 (223) / 안태(230) / 보결 [-> 후보] (258) 

이 분이 번역한 책이 왜 2007년 5월에 다량으로 쏟아지고 있는 지도 무척 궁금하다.  재놨다가 5월에 맞춰서 출시했단 말인가?  그랬으면 괜찮겠지만, 한꺼번에 많은 번역을 함께 후다닥했다면, 다소 느리게라도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재미있게 읽었고, 많은 것을 배웠기에 더욱 더 좋은 글,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에 이렇게 허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작성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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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헤엄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멀리 가진 못해서 <세계의 문학>((2000 봄호), 247쪽, 그리고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17쪽부터가 이 글에서 다루어질 범위이다. 두 국역본이 부분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어지는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렇다.

(1)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말하게 하는 형식적 성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인 것이다. 그는 형식적 성격들을 획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접지역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세계의 문학>, 247-8쪽) 

(2)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나타내게 하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빼앗길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웃관계의 지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 어떠한 글을 막론하고 운동경기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문학과 스포츠를 조화시킨다거나 글로 올림픽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운동경기는 도피와 유기적 탈퇴에까지 미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비평과 진단>, 16-7쪽)

(3)But the power of the indefinite article is effected only if the term in becoming is stripped of the formal characteristics that make it say the. When Le Clezio becomes-Indian, it is always as an incomplete Indian who does not know "how to cultivate corn or carve a dugout canoe"; rather than acquiring formal characteristics, he enters a zone of proximity. It is the same, im Kafka with the swimming champion who does not know how to swim. All writing involves an athleticism, but far from reconciling literature with sports or turning writing into an Olympic event, this athleticlsm is exercised in flight and in the breakdown of the organic body - an athlete in bed, as Michaux put it.(영역본, 2쪽) 

 

 

 

 

먼저 첫문장.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들뢰즈가 예찬하는 것은 정관사(le/la; the)가 아닌 부정관사(un/une; a/an)의 세계이다. 익명적 혹은 비인칭적 세계(그걸 '다중'적 세계라고 애써 해석하게 되면 들뢰즈와 네그리의 접점이 마련된다). (2)의 번역이 (1)을 베꼈다는 건 이 첫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대략, '형식적 성격'을 '형태적 문자기호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체는 엉뚱한 것이다. 불어의 caracteres가 영어 character와 마찬가지로 '문자'나 '부호'로 뜻도 갖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관사 대신에 정관사를 말하게 하는 특성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말하는가?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보자.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여기서 1행의 '한 여자(a girl)'가 어떻게 2행에서 '그 여자(the girl)'로 한정되는가?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라고 구체화/인칭화됨으로써이다. 그때 '돌 속에 묻혀 있었던'이란 한정어구가 들뢰즈가 말하는 '형식적 특성들'이다. 그러한 특성들/한정들에 의해서 '한 여자'는 비인칭성(4인칭)의 평면에서 인칭화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번역에서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라는 건 좀 불친절한데, 가령 '여성-되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시기-되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시기'가 아무런 한정을 받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정관사를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언제나 '어떤 거시기-되기'인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베컴-되기'나 '박지성-되기' 등의 고유명사-되기는 유사-생성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생성(되기)은 거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an athlete in bed)' 되기이다. (르 클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미완의, 되다 만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되기이고,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되기이다(<비평과 진단>에서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라고 옮긴 건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도피'란 건 흔히 '도주'나 '탈주'로 옮겨지는 걸 말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빔 벤더스의 영화 중에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1)이 있는데, 그의 이 장편 데뷔작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한트케의 최신작은 작년에 발표된 <돈후안>(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옐리네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 영화는 주인공인 골키퍼 브루노가 페널티 킥을 맞은 불안 때문에 경기장을 빠져나가 배회하는 걸 줄거리로 하고 있고 있다. 그런 게 '도주'이다('탈주'는 좀 낭만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국역본들에서 '유기적 탈퇴'라는 건 좀 부정확해 보이는데, 그냥 몸(유기체)이 고장나거나 부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라는 것. 해서 '슈팅 라이크 베컴'이 아니라 '브레이크다운 라이크 베컴'이다(베컴에 언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문장만 더 읽어보자: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정반대로 제대로 죽을 줄 알며, 죽음을 느끼거나 예감하는 것은 바로 동물이다. 문학은 로렌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죽음과 더불어,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내밀어진 우리의 붉고 작은 발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고 모리츠는 말하곤 했다."

 

 

 

 

D. H. 로렌스(1885-193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별로 읽은 바가 없는 탓에 '고슴도치의 죽음'이 어느 작품(혹은 에세이)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캥거루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주요 장편들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소개된 걸로 알지만.   

 

 

 

 

그리고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카프카. 그의 작품들 또한 전집 규모로 소개돼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하고 남은 건 그냥 읽어주는 것이겠다. 또한 아마도 들뢰즈의 카프카론에 대해서는 물론 책 한 권 분량을 써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올해 나온 카프카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빌헬름 엠리히의 <카프카를 읽다(전2권)>(유로서적). 카프카 연구자 빌헬름 엠리히가 1958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을 번역하여, 총2권에 나누어 담은 책인데,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해석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막스 브로트와 다른 견해로 카프카를 해석한 작품으로, 오늘날의 카프카의 작품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단다. 카프카 애독자들의 즐거움이겠다. 전집판으로 <소송>(솔출판사)이 얼마전 출간된 것도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모리츠. 칼 필립 모리츠(K. P. Moritz)를 말하는데, 그의 작품 중 <안톤 라이저>(문학과지성사, 2003)가 번역돼 있다. "괴테가 당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 바 있는 칼 필립 모리츠의 심리소설"로서 "'안톤 라이저'라는 한 소년의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성인이 된 화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는데, 소개에는 "보잘것 없는 신분,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소년의 성장사는 사회의 무시와 멸시, 냉대로 얼룩져 있다. 주인공은 진정한 배웅과 교양에 목말라하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영혼의 훼손과 마음의 상처는 더해만 간다. 야비한 세상에 주눅든 안톤은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경건주의 신앙의 실상과 그 이면,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찬 중간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18세기 독일의 사회사라 볼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문맥상,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정관사/부정관사 문제와 연계시켜보자면,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the animal(l'animal)'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불특정의 동물이 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동물'이라는 특정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자 해방되는 것이다. '남해금산'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죽음은 '그 여자'를 '한 여자'로 해소하고 다시 환원한다. 다시 '한 잎의 여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이 시의 결론에서 "그러나 구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한 여자'(=한 잎의 여자)가 결코 '그 여자'로 특칭되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이 사랑은 '방법적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일까?). '여성-되기'라고 할 때 그 '여성'은 그러한 '한 여자'이면서 '한 잎의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이다. '동물-되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죽어가는 동물이 될 때(동물들은 각자의/고유한 죽음을 죽지 않는다), 비로소 제대로 동물-되기에 이르며, 문학은 그때 거기서 시작된다. 이것이 들뢰즈 문학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에 시간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읽도록 하겠다(이런 진도라면 올해 안에 끝내긴 글렀다)... 

05. 12.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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