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양장) 믿음의 글들 176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스크루테이프라는 악마가 웜우드라는 신참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책에 그리스도는 원수, 인간은 환자란 말로 표현된다.
내용들엔 스크루테이프가 보는 인간의 악의 있는 모습(약한 모습과 빈틈)과 선한 모습들이 보여진다. (물론 선한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악마 자신의 관점에서 조차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말이 거짓 그 자체인지 아니면 한 번 더 꼬아서 이야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가끔 혼동이 오기도 한다.
이렇게 cs루이스의 글을 읽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종종 만난다. 그의 철학적, 종교적 또는 생각의 깊이가 너무 깊은데다 문장까지 길어서 이기도 하고 내 이해력 부족인 까닭도 있다.
여하튼 순전한 기독교나 고통의 문제보다 이 책이 이해하는데는 조금 더 수월했다.

악마는 인간의 작은 틈새를 공격해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별것 아닌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일이나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이런것.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왔다거나(한적한 저녁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친구의 아내가 마구 수다를 떤다거나(친구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하는 작은 일들이 환자의 절제심을 무너뜨리지. 이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야 네 환자도 이런 사소한 결례를 참지 못할 만큼 무자비하거나 나태한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도둑맞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얼마나 현실적인지.

cs루이스의 글을 읽다보면 가끔 우울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는 인간의 약한 속을 너무 잘 꿰뚫어 보는데 거기에는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이런 용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인간 속성에만 꽂혀서 냉소적이 되고 정작 그가 말하고자하는 큰 그림은 희미하게 새기기만 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위대해 보이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이런 속성들을 잘 아는 거겠지)
우리는 살면서 고의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잘못들을 저지른다. 하지만 죄의식에 얽매여 ‘나는 죄인이야. 나는 틀렸어. 세상은 다 그런거야.‘ 라는 생각에 빠지지는 말아야 겠다.
기쁘게 살아야 한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기만하면 항상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실테니까. 그렇게 믿는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을 기억하기위해 리뷰를 쓰는데 이 책엔 특별히 쓸말이 없다.
전체적으로 밑줄을 너무 많이 그어서 이것보다 더 얇은 책 하나는 나올 분량이고, 느낀점을 쓰자니 그것도 어렵다.
책의 앞뒤로 저자가 해설을 너무 잘 달아놔서 나중에 읽기만 하면 되는데 다시 읽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게 좀 두렵기도 하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불어넣는 데에는 교만 말고도 혼동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이 소유격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거지. ‘내 장화’로부터 시작해서 ‘내 개’, ‘내 하인’,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상관’, ‘내 나라’를 거쳐 ‘내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달라지는 그 의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인간들을 잘만 가르치면 이런 의미들을 모조리 ‘내 장화’와 같은 뜻, 즉 소유를 나타내는 ‘내’로 국한시킬 수 있다.

놀이방에서 노는 아이가 ‘내 곰인형’이라고 할 때도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오랜 애정의 대상’이라는 뜻(조금만 방심하면 원수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도록 가르칠 게다)이 아니라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찢어 버려도 되는 곰인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시킬 수 있지. ‘내 하나님’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야. 실제로는 ‘내 장화’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뜻, 즉 ‘나한테 특별 봉사를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설교단에서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내가 독점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할 수 있다구.

즐거운 집단과 지루한 집단의 차이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로 착각하도록 가르치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달라’라는 느낌(물론 이런 느낌을 입 밖에는 내지 않게 하는 게 좋아)을 주어야 한다.

신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유행을 들어앉히거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감정을 파고들라 이 말이야.

이 감정은 우리가 인간의 마음에 만들어 낸 가장 값진 열정이다. 이 감정이야말로 종교에서는 이단을, 조언을 할 때는 어리석음을, 결혼생활에서는 부정(不貞)을, 우정에서는 변덕을 일으키는 원천이지.

어린아이들이 하는 꼴을 좀 보거라.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마다 여느 해와 다름 없이 도토리놀이에서 돌멩이치기로 제철놀이를 바꾸면서도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지 않느냐

예컨대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는 제안이 나왔다고 하자. 다른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자기는 별로 생각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원한다면 마시겠노라는 뜻을 분명히(그러나 말을 아껴가며) 전한다. 그러면 처음에 말을 꺼냈던 사람은 금세 자기의 제안을 철회해 버리는데, 표면상의 이유야 물론 ‘비이기주의’ 때문이지만 사실은 지금 말한 사람의 치사한 이타주의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는 심리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일이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묻는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이었군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야.

악마들은 선한 천사들과 본질이 아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이 부패한 존재들이다.

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