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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속의 한국사 - 가뿐하게 읽는 역사
박강리 지음 / 북하우스 / 2020년 1월
평점 :
세종 이도(세종대왕), 퇴계 이황, 신사임당, 율곡 이이.
네 인물의 공통점은 모두 지폐 속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친숙한 화폐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폐에는 역사 위인의 초상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학, 정치, 철학, 예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지폐를 따라 세종대왕과 천문 과학을, 퇴계 이황과 철학을, 신사임당과 예술을, 율곡 이이와 정치를 탐방해가는 역사 이야기 책이다. 지폐와 함께 엮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호기심을 끌었다.
읽다보니 한번에 읽을 수는 없어서 네 인물을 나누어서 한 인물씩 읽어 나갔다.
세종 이도(1397~1450)
경복궁에서 조선의 천문과학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라. 그 길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도는 운명처럼 세자가 되었고, 왕이 되었다. 할아버지 태조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아버지 태종은 길을 닦았다. 백성들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나라, 어진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드는 일이 왕으로서 자신이 짊어진 가장 큰 책임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앞으로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겠노라고.
해시계는 구조가 간단하고 설치도 쉽고 사용이 편리하지만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초기 물시계는 사람이 매일매일 물을 채워주어야 했기에 '스스로 타격하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된다. 장영실과 세종의 학구열이 대단해 보였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종은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시계와 천문 관측기구를 만든다. 앙부일구는 그 시절에 한양의 위도까지 읽어낸 과학적인 시계였다. 세로선은 시간을 나타내고 가로선을 24절기를 읽어낸다.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과 절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조상의 지혜였다.
퇴계 이황(1501~1570)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모여 끝내 바다를 이루듯 꾸준히 공부하여 뜻을 이루라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디.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널리 명망을 얻고 있던 퇴계는 선조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고 한다. 이제 열일곱 살에 접어든 임금을 위해 신하로서 학문의 길을 안내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의 체계와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고, 나아가 성군이 되어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았다. 퇴계는 죽음 앞에서도 매화를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매화에 물 주어라"
아마 지금으로 살아계셨다면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학자로 기억될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산서당의 현판이다. 직접 쓰며 도산서당을 짓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느껴진다. 글자에서 봉우리 세 개인 산과 새 한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천원권 앞면의 건물은 성균관 안에 있는 명륜당이다. 퇴계는 젊은 시절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관직에 올라서는 성균관 대사성도 여러 번 지냈다. 성균관 대사성은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교 총장에 해당한다. 도산 서원을 하나하나 사진과 함께 설명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사임당(1504~551)
시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시가 된다
신사임당은 워낙 좋아하던 인물이고 현모양처로서만 조명되어 제대로 예술적인 면을 살펴보는 자료들이 부족했다. 사실 역사에는 그다지 폭이 넓지 못해서 이 책만으로도 모르던 지식이 풍부해지는 기분이다.
사임당은 중국의 '태임'이란 여인을 롤모델로 삼아 자신이 호를 '사임'으로 스스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의지가 확고하고 야무진 여인이었을까 싶다. ('사임'이란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사위 이원수의 품성을 보고 조금 처지는 살림에도 장가를 들였다. 과거 공부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10년 이상을 시부모와 아이들을 건사하는 신사임당이었다. 그러다가 벼슬길에 오르니 가장 좋아하던 신사임당을 두고 두 아들과 서울로 갔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병이 들어 남편과 두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숨을 거둔다는 설명에 안타까웠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된 것이 아니니 서울에서 강릉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는 모른다. 신사임당이 병을 앓으며 유언처럼 자식들을 위해 재혼을 하지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는데도 이듬해 바로 재가를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포도 그림과 초충도의 실력이 최고였던 문인이다.
율곡 이이(1536~1584)
글을 읽는 이유를 기억하라. 옳고 그름을 알아 차리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라
율곡은 어머니를 잃고 임종도 못지킨 슬픔에 시묘살이 후 외가로 가서 공부를 했고 장원급제를 9군데나 했다고 한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배웠다. 율곡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서모 권씨와 부부의 관계를 맺었으니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마음엔 소용돌이가 일었다. 집을 떠나 불교를 공부하며 학문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율곡은 우주 자연의 질서와 이치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삶을 깊이 성찰하며 많은 저서를 남긴다. <동호문답>,<성학집요><격몽요결>을 집필하며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깊었다.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사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는 교육에 헌신했다.
세종대왕을 처음 읽을 때는 이 분만으로도 쓸 거리가 넘쳤는데 이황과 신사임당, 그리고 율곡까지 읽다보니 제일 생각나는 것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야기였다. 역시 마지막에 읽은 것이 더욱 선명하게 남는 모양이다. 요즘은 지폐를 많이 가지고 다니지는 않지만 친숙한 위인들에 대해 조금 더 세세히 알 수 있었던 역사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하면 좋은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