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
김성원 지음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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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의 내 자신을 만난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정말 끝이란 것이 있어. 내 말을 믿어봐.
이 상태로 네가 소멸하지 않아.
너는 더 행복해지고 더 기쁘게 살게 돼.
내 말을 믿어줘. 더 이상 울지 않게 될 거야"

프롤로그에서 '내가 보았던 빗물은 누군가의 눈물이었을까?'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아픔에 민감했던 작가의 이야기에 살짝 의아했었다.
이 글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김성원'이란 작가를 남자로 알았으니 꽤 감상적인 남자분이셨구나,,착각을 했다.
이름에 대한 편견이 아직 있는 모양이다. 김성원. 남자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다보니 여자 작가 분이셨다.
언제쯤 이름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생이 누군가가 쓰고 있는 소설이라면,
그 작가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가?
나는 플롯을 너무 복잡하게 짜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한다.
과연 선이 악을 완전히 이길 수 있을지를.

우리의 인생이 누군가가 쓰고 있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인지 상상력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작가들의 말을 수용하는 편인데 이 작가랑은 공감대도 있었지만, 생각의 어긋남이 몇 군데 있었다. 누군가의 부탁대로만 수동적으로 살던 내가 얼마 전부터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살아야한다고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잡았다.

누군가 내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누군가의 플롯대로 내 인생이 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작가는 단지 상상이나 가정을 했을 뿐인데... 대상이 없는 누군가에게 왜 내 인생의 스토리는 이렇게 구성했는지 따지고 싶어서일까?^^

당신에게 꽃을 준 사람은 그 전에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울한 맛 바질 파스타
어쩌다 파스타를 만들게 되었다. 소중한 친구가 파스타를 같이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파스타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우울해. 우울한 맛을 원해.

우울한 파스타의 맛은 어떤 맛일까? 오일과 바질 만으로 우울한 맛을 냈다고 하는데 궁금하다. 문득 나의 우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우울할 때는 뭔가 이쁘고 맛잇는 음식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든다. 우울한 감정은 인간답게 만든다. 그런 감정을 겪어내고 이겨낸 사람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따뜻하고 섬세하다. 혼자 이겨내야 한다고 몰아 세우기보다는 함께 보듬어 갈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생각해본다.

넘어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넘어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근육의 힘은 키울 수 있다. 넘어짐과 일어섬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간다.

같은 돌부리에 계속 넘어질 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반복한다. 왜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나쁜 파트너를 만나서 고생할까? 왜 어떤 사람은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 당하는 경험을 반복할까?
비슷한 문제를 반복해서 겪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실수의 원인이 되는 문제가 치유의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는 해결할 수 있을테니 좌절하지 말라고.

나 역시 이런 경험이 있어서 마음에 와 닿았다. 자꾸 비슷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상처를 받고, 정에 약하고 사람을 잘 믿고 경계심이 없어 사기 당하거나 거짓말에 잘 속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경계를 가져야 할 것 같아 날을 새우게되고,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슬픔은 사라진다. 콘서트 홀에서 흐르던 디베르티멘토의 우아한 멜로디 속으로 슬픔이 사라져갔듯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기억들은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아픔은 사라진다.

나는 이 문장과 문단의 내용에 반대한다. 콘서트 홀에서 우아한 멜로디를 듣지 못해서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슬픔의 크기나 무게가 줄어들고, 농도가 옅어질 수는 있으나 사라진다는 것은 슬픔은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다. 사라지는 슬픔은 없다.​
마음에서 인정하고 조심씩 내려놓을 뿐이고 참아내고, 살아내는 것 뿐이지 다시 떠올려보면 그 때의 슬픔이 그대로 올라온다.

융의 심리학을 공부한 이후 작가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런 속성들을 억압하는 자신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아서인지 이런 심리학자들의 전문 지식이 나오는 부분들도 무거웠다.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어떤 틀과 이론에 맞춰 사람을 구분짓고 판단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심리학 공부나 정신분석 포럼에 참석하고 강의 들은 내용과 영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보지 않은 영화들의 이야기라서 흥미롭지 않았다. 작가의 영화 성향과 나의 성향이 다를 뿐이니까^^

영화보다 책은 읽고 싶어서 목록에 적어 두었다. 읽고 나면 작가의 마음이 이해가 될 지 모른다. 아니, 책과 더블어 그의 슬픔에 함께 마음을 담궈보고 싶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학창시절의 일화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앞 분식집에 유행하던 즉석 떡볶이는 정말 최고였다^^
팅팅 불은 학교앞 떡볶이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냄비에 이것저것 담아 야채와 당면을 넣어 끓이는 즉석 떡복이의 추억에 잠시 잠겼다.

작가는 우주에 관심이 많았나보다.
나도 어릴 때 아빠가 광화문 근처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주셨는데 문학소설을 고른 기억이 난다.
나에게도 아빠는 우주였다.

작가는 아빠에게로부터 받아 누린 우주의 공간이 너무 크고 지배적이었다. 사업의 곤란함을 겪으시던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고, 두 분의 죽음을 견디면서 스스로 심리학을 공부하며 치유받은 작가의 모습이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치유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끌어다 쓰는 피땀어린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에서 직업적으로 매일 글을 쓰는 프리랜서 작가의 삶에서 느껴지는 표정들이 읽혀지면서 함께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근육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넘어져도 일어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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