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평점 :
<모모>와 <자기앞의 생>을 잇는 소설이라니!!
두 소설 모두 나의 생을 흔들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알게 했던 소설들이기에 기대를 갖고 읽었다.
벨기에의 공쿠르상이라 불리는 빅토르로셀상을 비롯해 14개 문학상을 석권하며 유럽 문단을 사로잡은 <여름의 겨울>은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소녀가 동생의 순수한 미소를 되찾기 위해 세상과 싸우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우아하고도 감동적으로 풀어낸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280쪽의 소설은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남동생 질을 돌보는 4살 많은 누나의 삶은 너무도 고단하고 잔인한 상처들이 많았다.
TV 에서는 항상 그랬다.
TV에서만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특히 광고 속에서.
그들은 함꼐 이야기 하고, 웃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웠고 서로 사랑했다.
우리 집에서 가족 식사란, 커다란 잔에 담긴 오줌을 매일 마셔야만 하는 벌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소파로 돌아가려고 일어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유가 찾아왔다.
p.26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분노가 고함을 통해 모두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포효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머니를 삼켜 버리려는 듯 목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포효로 충분하지 않을 때면 손이 도왔다. 아버지에게서 분노를 완전히 비워 낼 때까지. 어머니는 바닥에서 언제까지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이 빈 베갯잇처럼 보였다. 그러고나면 그 다음 몇 주 동안은 평화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p.42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야 하는 아이들,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위해 그런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는 어머니.
그들의 삶은 상상을 할 수 없다. 대부분의 폭력은 어쩌다 발생하는 사고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관이 고장난 듯 폭주해간다. 아마도 정신병 중의 하나가 아닐까 요즘 말로는 분노조절장애같은...
가정폭력이 끼치는 끔찍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했다.
마치 엄마 배 속에 있는 것처럼 따듯하고 포근한 짧은 시간. 그 시간만큼은 내가 삶의 여정을 능숙하게 지배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삶이란 믹서에 담겨 출렁이는 수프와 같아서, 그 한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칼날에 찢기지 않으려고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p. 91
그 곳을 벗어나고 싶은 나는 마리 퀴리처럼 과학을 공부한다.
사랑하는 동생이 잃어버린 순수한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발명해 내는 것이 소원인 아이.
요정처럼 믿고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모니카에게 함께 타임머신을 만들자고 이야기한다.
마침 그날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날이 다가오자 모니카는 가장 소중한 물건을 갖고 오라고 한다. 소녀는 아빠의 가장 소중한 전리품인 상아를 몰래 가지고 오는데 모니카는 놀라며 당황한다.
"하지만....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아니었니?"
모니카는 어린 소녀와 즐거운 놀이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소녀에게는 동생을 구하고 사고로 죽은 아이스크림 할아버지를 구하고 싶은 희망 전부였다. 아이들의 동심을 이용해서 놀이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충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생각과 아이들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속아 넘어가는 재미와 놀이를 즐긴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야했다.
아이는 간절한만큼 좌절이 커졌다.
믿었던 모니카 할머니는 요정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동심을 잃게 되는 것처럼...
폭풍우에 대해선 거짓말을 했지만, 다른 건 아니야. 마리 퀴리에 대해서도 아니야.
넌 용감한 아이야. 네겐 위대한 일을 해낼 용기가 있어. 오늘 네 얼굴은 무척 단호했단다. 다만....계속 싸워라. 미안해. 나는 오정이 아니야. 그래도 넌, 넌 특별하단다, 꼬마 아가씨.
p.107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아기는 벌써 어머니로부터 깊은 사랑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사랑은 내가 존재했던 지난 12년 동안 내 부모님으로부터 그러모아야 했던 것보다 커 보였다. 하지만 보잘것 없다는, 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위로가, 안전함이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깃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p.121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사냥을 즐기는 아버지는 남자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딸아이를 목표로 사냥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분노가 치밀어 숨이 막혔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을 사냥의 표적인 먹잇감으로 사냥놀이를 한다니!!
분노과 절망으로 일그러져 어둠을 뚫고 도망다니는 아이를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과 손이 떨렸다.
내 생각을기다리지 않고 다리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이 행성을 가로질러 다른 세상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다른 것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야, 젠장. 절대로.
이제 끝났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포식자도 아니었다. 나는 나였고, 파괴될 수 없었다.
p.210-211
언제 어디서든 나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감정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참아내며 온 몸과 얼굴이 흉터와 멍자국인 엄마를 바라보는 남매도 조금씩 변해간다.
환경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든든하게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간다.
생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찬 소설로서 자유롭고 똑똑하고 감탄스러운 소녀는 절대 악에게 지지 않는다. 자신을 잃지도 타협하지도 않고 지킨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속에서도 살아 용기를 낸다.
"엄마, 엄마는 왜 인생을 놓아 버렸어요?"
묻지않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나온 말인 것만 같았다. 그 질문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저말로 그저 묻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삶은 실패했다. 성공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웃음 없는 삶, 선택없는 삶, 그리고 사랑없는 삶이 망가진 삶이 라는 것은 알았다.
p.223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역시나 어린 아이가 말하는 진짜 삶은 잔인해보였다. 한번이라도 폭력을 겪었거나 폭력에 노출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공포감일 것이다.
그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물고 옅어질 수는 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의 어머니 얼굴에서 상처가 눈으로, 입으로, 이마로 옮겨갔던 것처럼 폭력의 흔적은 몸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길 반복한다.
누구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유년시절 폭력의 그림자를 보고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종종 그랬지만 가까이에서 겪은 일은 없다. 하지만 이처럼 가정 폭력의 그림자로 멍든 아이들과 가정 문제에는 관심이 많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마땅히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가족이란 관계에서 행해지는 폭력.
온 힘을다해 미워할 수도, 도망갈 수도, 안심할 수도 , 치유될 수도 없을 아픔과 상처이다. 부모의 사랑은 물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경우에서든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리는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자기의 생의 방향을 바꾸어 줄 길을 찾아 가는 여정에 응원을 보내며 뭉쿨한 감동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