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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ㅣ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평점 :
#나는되어가는기분이다#창비시선#이영재첫시집#어나더커버한정판
창비에서 시인의 '첫 시집'발간 기념으로 어나더커버 에디션을 한정 판매한다. 기존 창비 시선의 표지에 색다른 표지를 덧입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은 이영재 시인의 첫 시집이다. 기존의 표지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핑크빛의 종이로 한번 감싼 표지는 고급스럽고, 정성스레 포장한 분위기로 선물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를 읽다보면 처음부터 마음에 쏙 와닿는 시도 있고, 어려워서 여러 번 읽어야 하는 시도 만나고,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해 헤매야 하는 난해한 시도 만난다.
이 시집의 시들은 산문시 형태로 서너장 분량의 시가 대부분이라 더 집중해서 읽어본다. 언어의 나열들이 새롭고 투명하며 모호하지만 시를 쓴 시인의 마음, 그리고 그 너머의 감정까지 헤아리고 느끼다보면 삶이 보인다. 깊숙히 내재된 언어들로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시 속에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것일까?
함께 들여다 보다가 시의 제목이 담겨있는 시 한 편을 찾았다.
시인과 나는 무엇이 되어가는 기분일까?
「슬럼」
연약한 하늘색을 어슬렁대본 적이 있다.
무결한 사람에 들어 있는 사람을 구출할 수 없다
옥수수와 참치
옥수수와 참치
통조림을 먹으며 구덩이를 파고 싶은 기분이 든다
슬럼프 안에 담겨 있으면 포근하다
삐뚤빼뚤 열린 하늘을 본다 부피를 본다 색을 본다 경계를 본다 무결을 본다 연대로 열린 대로
보이는 걸 보고 있다 올려다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
보다가
본다
운명을 믿는 사람을 보고 있다
시간이 불타는 걸 보고 있다
포로들은 멈춘 버스에서 단잠 중이다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주방장은 쓴다>은 등단작이라고 한다.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젊은 시대의 막막함을 그리면서
시인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간절한 바람을 아프게 보여준다.
그래서 주방장은 쓴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연작시로 번호가 8번까지 매겨지며 두장을 메운다.
「미지」
1. 약속이 아닌
애인은 이 곳으로 올 수 없고 애인의 애인인 나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다 교묘한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우리는 교묘한 약속이어도 , 된다
2. 만남이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에 손을 대본다 차갑다 나는 온도가 있다 이 공간은 능동보다 피동은 아닐까 의심처럼
애인이 온다 가면을 쓰고 가면이 웃고 나의 가면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악수는 짧다
5. 비가 아닌
"물이 쏟아지면 좋겠어" "비가 올 것 같진 않은데" " 비?" " 그래 비" "비가 뭐지?" "비는 물이지" "그러니까 물" "그러니까 그걸 이제 비라고 하자"
한다
기록, 열린 기록, 닫히지 않은 기록, 기록되지 않을 깨끗한 기록, 포옹을 하고자 했는데
포옹을 한다
"차구나!"
"스테인리스니까, 아직."
8. 이별
조용하고 깨끗한, 그리울 수 없는
<위하여><청사진><흰검정>등 다른 시들도 좋았다. 언어의 한계성과 가능성에서 모순된 언어들이 희한한 조합을 하고 있다. 흰검정?^^
조금은 출구를 못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시들도 있지만 그것이 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시라는 장르 역시 다른 문학처럼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것도 노래한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산문시와 짧은 시들이 섞여 있었다. 시처럼 혹은 에세이처럼 읽다보니, 사회의 팍팍한 현실들을 경험한 시인의 새로운 언어로 표현한 작품집이라는 느낌이다.
애인과 만나고 약속하는 것과 포옹하고 이별하는 것들이 미지의 세계에서 열리는 것처럼 모든 시들을 열고 닫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