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봉토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 1910년경 수리 전

특히 석굴의 정상부는 처음부터 전면에 기와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중략) 금세기초까지도 전실이 남아 있어서, 일정 초기의 대규모 중수 직전까지도 볼 수가 있었다. 지난번 공사 기간중 공사 현장을 찾은 인근 부락의 노인들은 공사 현장에 이르러 새로운 전실을 보고, 옛날에 그들이 보았던 집보다 한층 훌륭하게 지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 석굴이 천 수백년 동안 거친 주변의 자연환경 속에서 버텨온 것은 그 앞에 목조건물이 보호해 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제 때 수리하면서 이같은 원형을따르지 않았고, 전실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복원하지 않았으며,석굴의 전면을 개방해서 그대로 외부에 노출시켜 온 것이 석굴에 가장 큰타격을 준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석굴은 이같이 그 앞에 예불과 공양을 위한 전실 구조가 딸려 있어서 그 석감 속 깊이 마련된 본존을비롯한 석굴 봉안의 보살·천부·나한 그리고 신장상들이 보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실과 석굴 사이의 아치 입구에는 또 나무 문짝이마련돼 있어 이중으로 석굴 내부를 보호하도록 돼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져, 옛 사람의 주도한 용의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느끼게 한다. - P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