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거리
<돌아와 보는 밤>

이제 창(窓)을 열어 공기(氣)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房)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는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 헤는 밤 그리고 어머니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床)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도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 짬><라이넬 · 마리아 · 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윤동주1941.11.5 - P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펴내지 못한 시집
서시‘1941.11.20‘




보관한 소장본에는 ‘서시‘ 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목이 있건 없건 이 한 편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너무도 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ㅡ 잎새에 이는 바람ㅡ별을 노래하는마음‘
이라는 핵심 시행에서 핵심 시어를 추려 내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라는 제목이 나온다. 
결국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처음 쓴 이래, 그가 4년간 그린 시의 그림은 이 
〈서시〉에와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대단원을 이룬다. 
그러나 시집은 출간되지 못하였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로서의 첫 성취 < 자화상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
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없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自畵像)> (1939. 9) - P1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 연희전문학교 38학번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새로운 길> 윤동주(1938. 5. 10)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