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미를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명 희미한 빛이 나타나고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고.

자신을 들볶지말고 내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라고.
그러려면 자신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요구부터 먼저 알아차려서 들어주어야 한다고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아야
타인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라고

실패해도 창피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도전한 자신을 칭찬해주라고.
쓸데없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다 보면내 어깨에 온갖 궂은일이 얹히게 되는 법이라고.

어려운 청탁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지 냉정히 판단하고,
불가능할 때는 담담하고 공손한 태도로
"내 능력 밖이라 호언장담하다가 실수할지 모르니
좋은 관계를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서 
거절하겠습니다"라고

--하나뿐인 나에게 예의를 갖출 것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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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시민이 연대한 대중운동이자 사회운동

1946년 10월 항쟁은 한국 사회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갈등과 건국운동의 좌절에 대한 반발이 국가 형성의 과도기에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은 해방후 1년 동안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토지개혁을 지연하고 건국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민중에게는 일제 식민지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과 같았고 사회적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것이었다. 10월 항쟁에는 과거와 같은 식민지 상황으로 환원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민중의 반제 요구가 내재해 있다. 또한 대대로 내려오는 봉건적 질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의 반봉건 요구가 결합해 있다. 이러한 반제반봉건의 요구는 주로 친일 관리와 경찰, 악덕지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앞선 연구자들도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시대와 같은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기대한 민중의 항쟁". "반제반봉건의 과제를 수행하고 기층 민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변혁적 지향을 가진 전민 항쟁이자 식민지 시대를 거친 사회에서 보이는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이 혼재된 운동" 등으로 평가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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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수적인 대구·경북 지역에서 
10월 항쟁의 역사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은 
비상한 결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족들 사이에서도 10월 항쟁을 
어떤 사건으로보느냐에 따라, 
사회·정치적인 의식과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아직까지 유족 중에는 10월 항쟁을
 ‘좌익 폭동‘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초기에는 유족회 활동에 난관이 많았다. 
이 무렵 다른 유족들의반응은 냉랭했으나, 
대신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교류는 활발했다. 
유족회에서는 결성 직후부터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와 10월문학회 등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면서 
지역 사회에 10월 항쟁의 진상을 알리고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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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자료를 통해 빨치산과 지방 좌익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을 살펴보면, 
주입된 반공 담론을 넘어서 
내재하는 학살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다. 
그 트라우마는 분단·반공체제에서
 ‘지식‘으로 표상되는 ‘사상/ 이념‘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고, 
이중권력 아래에서 양쪽에 동원되는 위치에서 
강제성과 자발성이 혼합된 채 순응과저항,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며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상황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집단적 기억은 전쟁 후 한국 사회에
반공의 사회심리 구조를 형성하고 
냉전 통치성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이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나중에 대구·경북 지역이 보수화되는 
또 다른 원인으로도 볼 수 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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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에서는 
1946년 10월 항쟁 후부터 1948년 8월 정부 수립 전까지 
대구·경북 지역의 진보적 사회운동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와 경북의 10월 항쟁이 진압된 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8천여 명이 
시위 가담 혐의로 검거되어 재판에 부쳐졌고 
가담 정도에 따라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그리고 사건 관련자뿐 아니라 사건과 무관한 
민간인상당수가 재판절차 없이 불법적으로 학살되었다.
항쟁 직후의 탄압 여파에서 벗어난 뒤,
 1947년에는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요구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8년 2월에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UNTCOK파견을 반대하여
 2.7 투쟁이 일어났고 뒤이어 
5.10선거를 반대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1946년10월 항쟁에 
선도적으로 참여했던 학생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 1946년까지 
각 부문에서 진행되던 경제 투쟁보다는
 분단정부 저지를 위한 정치 투쟁이 강화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은 1946년 10월 항쟁 후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음에도1948년 상반기까지 진보적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즉 주요 핵심세력은 탄압당했지만, 미군정 및 보수세력과의 대결이 전면화하고 전선이 분명해지면서 대중운동이 더 성장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운동의 중심이 점차 도시에서 농촌으로, 평지에서 산지로, 합법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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