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아이디어 (양장)
아마르티아 센 지음, 이규원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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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보편적인 것이 주는 매력과 유혹, 보편화를 향한 열망은 강하다. 그 결과로 여러 영역에서 절대 이론이 탄생했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추론 능력은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동시에 이론은 현실과 멀어지면서 공허해지고, 그것의 실행과 실현은 불가능해지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를 통찰한 이가 아마르티아 센이다. 그는 보편성, 절대성, 객관성을 향한 지적 욕망이 이론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긍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말아야 함을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강조한다.

 

2.

이 책은 네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는 네 개 또는 여섯 개의 주제로 채워졌다. 모든 요약은 궁극적으로는 야만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롤스의 정의론을 요약한 센에 따라 더 야만적으로 각 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 정의의 요구는 롤스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정의에 관한 선험적 제도주의를 전방위적으로 검토한다. 이성은 사태와 상황 등을 파악하고 객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본능적인 반응이나 감정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롤스는 공정, 원초적 입장, 차등의 원칙, 전면적 우선성을 지닌 자유 등의 개념을 창안하고 확장하여 현대 정의론 확립에 이바지하였다. 좋은 제도만 마련되면 정의가 저절로 실현될 것처럼 설명하는 제도원리주의에서 벗어나 정의를 증진시킬 제도 선택을 모색하는 편이 낫다. 이성에 의한 판단의 불완정성과 최종 결정의 변경 가능성을 대화와 소통을 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정의론은 누구든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 열린 공평성을 추구해야 한다.

독한 방송대인을 찾는 독서 분투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면, ‘부 추론의 형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완독을 포기했거나 한동안 유보했을지도 모른다. 중단 없는 독한 독서 결과 제부는 센이 숙고하고 있는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의 전제 조건을 담고 있음을 파악했다. 센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 또는 입장을 뛰어넘는 이해, 즉 위치 독립적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정의와 부정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 선택이란 이기적인 개인의 선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복지나 성과에 영향을 받고 타인에 대해 공감이나 반감을 포함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공평하다고 할 때 그 이유는 두 가지 이상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과에 기초한 논의를 할 때, 그 결과는 과정, 행위주체,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는 포괄적인 것이다.

부 삶, 자유, 역량에 있는 네 개의 장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서장정의에의 접근에 서술한 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서장에 이 책의 핵심이 빠짐없이 들어있음을 확인하였다. 세계에 대한 이성적 평가의 중심에 인간의 삶이 있다. 자유는 기회와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무언가를 행하는 힘이며 자유의 한 측면인 역량은 개인의 속성이자 공동체의 속성일 수도 있다. 정의의 실행이란 분명한 부정의를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면, 장애의 예방과 경감은 정의를 촉진하는 기획의 중심에 있다. 행복이 발휘하는 역량은 자유와 관련이 깊다. 역량 불평등의 축소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역량 향상에도 주목해야 할 만큼 평등의 요건을 단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 즉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가 없는 상태로 규정되는 자유는 일면 타당하지만, 이것이 역량으로서의 자유 개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부 공적 추론과 민주주의에는 센의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가 모여 있다. 민주주의 내용이 다양한 만큼이나 그 기원 또한 유럽 또는 서양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고대 인도나 이란 등 전 지구에서 찾을 수 있다. 언론 매체의 자유는 공적 추론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주주의의 실천과 민주적 자유는 기근을 방지하고 사회정의를 향상시키며 더 좋고 공정한 정치를 실현하는 데 이바지한다. 인권의 일부이자 기초인 자유는 이해관계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행위주체가 하고 싶은 것을 할자유로서 의미가 있다. 정의의 관찰 가능성, 즉 정의란 단지 실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행되는 것이 보여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3.

센은 선험적 제도주의란 정의를 이미 정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의론은 단지 정의(또는 정의로운 제도)를 발견하고 정당화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정의에 관한 센의 구상과 기획은 실현 중심적 비교론에 있다. 이것을 롤스의 정의론과 같은 선험적 제도주의와 다음과 같이 대칭적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고대 인도의 법학에 나오는 정의 개념 중에서 조직의 적절성 및 행위의 정당성과 관계가 있는 니티는 장치에 중점을 둔 정의 개념이다. 이는 선험적 제도주의 정의론과 관련이 있다. 선험적 제도주의 정의론은 이상적 제도의 선험적 규범에 중점을 둔다. 완벽히 공정한 사회의 선험적 추구에 대한 분석 중시, 모든 인간이 이상적 행위를 한다는 가정, 완벽히 공정한 제도를 정의하는 것을 중심 과제로 설정, 제도의 선택이나 이상적인 사회적 장치의 판별에 한정하면서 완벽한 정의의 추구 등이 선험적 제도주의의 특징이다.

니티의 대칭점에 센은 실현된 정의의 포괄적 개념인 니야야를 둔다. 니야야로서 정의란 벌어지고 있는 일과 그 방식, 특히 사람들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과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실제 행위 및 여타 영향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실현과 관계되는 다양한 비교론적 접근법에 따라,‘물고기 세계의 정의’, 곧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마음껏 집어 삼킬 수 있는 정의가 인간 세계에 침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이미 존재했거나 실제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사회를 비교하고, 인간의 실제 행위에 주된 관심을 둔다. 장치 중심적이지 않고 실현 중심적 관점으로서, 공적 추론에 근거한 합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선택지들의 순위를 정하고, 세계에서 명백한 부정의를 제거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둔다. 기아와 빈곤, 정치적 탄압을 제거하고 자유와 역량을 키우는 데 이바지한 정책을 발굴하고 확대하는 데 이바지하는 정의에 관한 논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런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실현 중심적 비교에 의한 정의의 아이디어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다.

4.

정의에 관한 센의 논의를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지, 오독과 오해 없이 정리했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정의의 아이디어에서 학문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보편화를 위한 이론 연구와 이론의 현실 적용 과정에서 불가피한 상대주의적 태도 간의 결합과 이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이고, 또 하나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비서구 세계에서 주장의 근거를 찾는 노력이다.

센은 정의에 관한 보편 이론을 창안한 사상가의 열망이 이론의 체계화와 심화를 이끌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센이 롤스에게정의의 아이디어를 헌정한 뜻은 정의론에서 도덕 행위의 보편화 입법 원리를 창안한 칸트와 같은 업적을 남긴 롤스에 대한 존경과 찬사에 있다. 그러나 센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실행으로서의 정의론, 아니 정확하게는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하자고, 그래서 명백한 부정의부터 제거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니티 지향성과 니야야 지향성의 양립 가능성에 바탕을 둔다.

다원주의는 구체적인 개별 상황에 따라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 이런 위험은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논리에 늘 도사리고 있지만, 센의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에는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정의 실현을 위해 정형화된 이론 대신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센은 이성이 보편 이론을 주창할 수 있지만, 현실은 결코 그와 같은 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민주주의, 기아와 빈곤 등의 문제를 논거로 삼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일한 보편 이론에 합의할 때까지 정의의 실행을 기다리기보다는(이론화 작업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당장에 실행할 수 있는 부정의의 제거를 시작하자는 센의 제안은 지식인에게 실천의 중요성을 새롭게 자각하게 한다.

인도 고대의 정의 개념인 니티와 니야야, 세 아이와 하나의 피리, 인도 무굴 황제인 아크바르의 행적에서 확인한 이성의 역할, 기원전 3세기 인도 황제 아소카의 선과 정의로운 행동에 관한 수많은 비문, 고타마 붓다의 고통, 민주주의 기원으로 고대 인도의 지방자치 민주주의와 7세기 초 일본의17조 헌법등과 같은 논거에서 나는 센의 문화 차별주의를 배격하면서 서구 의존적인 지적 풍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을 보았다. 특히, 석가모니 붓다의 사상을 근거로 정의론이 서양 사상의 전유물이 아닌 인류 공통의 관심사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한 명상 서적 정도로만 알았던 석가모니의숫타니파타를 권력의 책무가 권력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됨을 논증하기 위한 근거 자료로 제시한 부분에서는 감탄했다. 맹자의 민본주의, 정도전의 역성혁명,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자치 실현 등과 같은 정의 실현을 위한 치열한 논의와 이론화, 투쟁이 중국과 조선에도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하였다.

 

5.

몇 년 전, 자유 개념을 집중해서 공부할 때 아마르티아 센을자유로서의 발전이란 저작으로 접한 적이 있다. 그 덕분에‘14장 평등과 자유를 가장 흥미 있게 읽었다. 비지배 자유와 센의 자유를 비교하는 데를 읽을 때에는 설레기까지 했다. 열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쉼 없이 읽은 적은 있어도 500여 쪽에 달하는 학술 서적을 한 달 동안에 쉬지 않고 읽은 적은 처음이다. 그 설렘이 완독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소설이 절정을 지나고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나의 관심은 마지막 문장이 무엇일지에 쏠린다. 남은 한두 쪽을 남겨두고 슬쩍 끝 문장을 읽은 적도 있었다.‘여기에는 분명 정의론의 역할을 보완하는 저력이 있다.’라고 센은 맺는다.‘여기고립에서의 탈출이다. 센은 정의에 관한 논의가 이바지하는 바는 인간이 공감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 공감하고, 타인의 고통과 치욕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자유에 관심을 갖고 추론, 주장, 반대, 동의하는 생명체가 되게 하는 것이 정의에 관한 논의의 목표이다. 자유주의의 전부이자 전제, 그래서 자유주의의 최대 약점이자 치명적인 선언인 독립적인 자아, 고립적인 개인을 센은 비판한다. 정의론의 토대는 고립적 개인이 아닌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자아임을 강조하고 있다. 센은 추상적인 보편에 머물지 말고, 고립에서 탈출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로 나아갈 것을 재촉하고 있다. 이것이 정의에 관한 센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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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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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어느 봄날에 안경을 처음 썼다. 마흔두 살에 나를 낳으시고 시골에 사시는 아버지 대신 도시에 있는 둘째 누나 신혼집에 얹혀살았던 나는 매형과 함께 안경점에 가서 은테 안경을 맞추었다. 환하게 보이던 맑은 세상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도 근시였던 외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고교 시절에 마이너스 시력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져 우안과 좌안의 시력 차이가 두세 배 나는 짝눈으로 악화하였다. 고교 3학년, 안경 쓴 지 5년이 되어도 안경 쓴 얼굴이 어색해 졸업 사진 찍을 때 안경을 벗었다.

  농구, 축구, 몸싸움으로 수십 개의 안경테를 부러뜨리고 새로 안경알을 갈아 끼우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가는 어느날 눈이 아리고 먹먹했다. 눈병이 났나 싶었는데 동네 안과에서 녹내장이란다. 눈물 구멍이 막혀서 안압이 높아지고 압력으로 시신경이 죽다가 결국 실명하는 병이다. 종합병원에서 눈물길을 새로 내는 수술을 했다. 오른쪽 눈의 신경은 현재 8% 남았다.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만 보면 안경을 써도 4분의 3은 꺼멓고 나머지는 흐릿해서 아무리 가까이 눈을 대어도 크고 굵은 글자 한 자도 읽을 수 없다. 안경만 있으면 볼 수 있었던 세상을 보다가, 안경을 써도 볼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하니 무서웠다. 이희영의 소설 󰡔페이스󰡕에서 시울은 여섯 살 때, 이 세상 모든 걸 다 볼 수 있어도 자기 얼굴만 볼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내겐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내 눈으로 직접 내 신체를 볼 수 없는 데는 여럿 있다. 사진에 찍힌 내 뒤통수, 뒷머리, 목덜미, 등허리를 보면 이물감 같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내 맨 엉덩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뭔 의미가 있다고. , , 입이 있는 얼굴은 일어나자마자 화장실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로 보기 시작해서 잠들기 전까지 여러 번 본다. 거울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신체 부위 중에서 민감하게 늘 봐야 하는 데가 얼굴이다. 거울이 보여주는 나는 항상 나이지만, 늘 같은 나는 아니다. 내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 적도 있다. 어떤 영화 속 독백이나 소설의 한 문장처럼 낯선 나를 본다. 거울의 나와 거울의 나를 보고 있는 나는 같지만 다르다. 이것이 작가 이희영의 상상이 출발하는 지점이었을지 모르겠다.

  이희영은 시울의 입을 빌려 백설공주를 괴롭혔던 마녀에게 가장 큰 적수는 거울이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마녀 자신이 아닌 백설공주라고 거울이 말할 때, 마녀가 거울을 깨버렸다면 마녀의 삶은 평탄했을 거란다. 외모로 대표되는 자아에 관한 평판에 끌려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뜻인지, 그런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수록 중심을 잃지 않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인지, 이와 다른 해석을 누군가 한다면 더 그럴싸해 보이겠다. 시울이는 친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묵재의 상태가 자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모란 자식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이지만,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을 하려는가.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보이지만 보이는 것 모두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보인다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아무것도 모르진 않는다. 미립자의 세계는 관찰 불가능해도 이론적으로 어떠한지 설명할 수는 있다. 자기 얼굴을 못 보는 것은 자기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시울이는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울로도 볼 수 없고 사진을 찍어도 볼 수 없다. 자기의 얼굴을 구성하는 눈, , 입 그리고 이마, 눈썹, 아미, 눈꺼풀, 눈동자, , 콧구멍, 인중, 입술, 턱 등을 볼 수 없다. 이것들은 자연이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묵재의 실수로 시울이가 사물함 모서리에 찧으면서 찢어진 이마에 난 상처다.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간의 경계는 모호하다.

  시울은 자기의 얼굴을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게 흐린 얼굴로 인식한다. 색색의 블록, 젖소의 얼룩무늬,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색 구름, 먹물, 주방 타일 같은 얼굴, 20세기 거장의 초상화, 기하학적 형상 등. 자기의 얼굴을 이토록 잘 설명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 얼굴을 잘 알기에 시울이는 이마에 난 상처와 흉터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내 얼굴이 어떠한지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내 얼굴을 보고 있는 상대에게 물어봐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만 알지 못한다. 시울이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잘 안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만 볼 수 없다.”라는 역설은 진리에 가깝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시울이는 잡아떼지만, 이는 허구 안에 있는 사실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강력한 은유다. 조금 틀어진 앞니 교정 열망에 빠져 있는 시울의 친구 라미,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임신한 채 결혼한 묵재의 엄마가 알코올에 의지하며 연명에 가까운 삶을 산 일,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헌신한 묵재 아빠, 친아빠가 아닌 걸 알고 가출한 묵재 등은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는 75세 할머니를 시울이는 두 볼이 통통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열다섯 살 옥분으로 본다. 보이는 게 전부도 아니고 진실 그 자체도 아니다. 보이는 건 보이는 것일 뿐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이 허상이거나 아집의 결과일 수 있다.

  중학생인 우리 딸아이는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거울만 보고 있는 것 같다. 과장이지만, 하루 종일 거울 속 자기만 본다. 거울만 쳐다본다. 앞머리를 빗고 고데기로 돌돌 말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문지른다. 사춘기, 나를 자각하고 알아가는 시기에 얼굴은 고민과 관심의 중심이다. 정작 자기 등 뒤 목덜미에 오돌톨톨 돋은 여드름을 아이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수업 시간 내내 거의 몇 초 간격으로 손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보는 학생이 작년에 있었다. 몇 번이고 나무라면서 수업에 집중하라 해도 반복한다. 수업과 상관없이 머리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모습인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해 본다. 얼굴은 곧 생각이고 세상일지 모른다.

  직장 사무실 책상 위에 탁상용 거울을 올려놓고 근무한 지 10년이 넘었다. 입 주변에 뾰루지가 나오다 곪으면 누런 고름이 맺히는데, 그걸 바로바로 처리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에 확인하려고 올려 놓았다. 녹내장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안약 부작용 탓인지 시력만이 아니라 겉보기에도 두 눈은 짝눈이 된 지 오래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에 비해 1/3쯤 감긴 듯한 상태다. 잘생긴 얼굴이 아니어서, 내 얼굴을 보며 만족감을 느낀 적은 거의 없어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 보지는 않는다. 대신에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얼굴을 조금 오래 쳐다본다. ‘이게 나냐?’라는 질문을 잠깐 던진다.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시울이만큼은 못 해도, 밝고 어두움, 맑고 탁함, 온도 차이, 굳기의 정도 등으로 내 얼굴을 설명하고 내게 어울리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에 적절한 얼굴을 보여야겠다. 내가 세상 그 자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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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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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고교 2년에서 대학 새내기 시절 사이, ‘루이제 린저라는 이름과 󰡔생의 한가운데󰡕라는 소설 제목을 몇 번 접했다. 최초로 독일 유학을 간 한국인 여성인 전혜린이 번역했다면서 그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소개도 있었다. 한 번쯤 읽고 감상이 있어야 멋있어 보일 법한 느낌이었다. 저자가 반공·반북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것과 거리를 둔 외국인이란 점과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술자리에 가득하던 시절이 준 마음의 결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맘먹고 읽어야지 하다 40여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작년에 실행했다. 백수린의 소설 󰡔눈부신 안부󰡕에서 인용된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한 문장 때문이다.

  백수린 소설의 화자는 이모의 친구인 선자의 첫사랑 K·H를 찾는 임무를 맡는다. 이모와 선자는 1960년대에 독일 간호사로 일하러 갔다. 한국에서 K·H 찾기에 나선 화자는 선자가 쓴 일기장 여러 권을 읽는데, 모든 일기장 맨 첫 쪽에 루이제 린저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 독일어 원문으로 적혀 있는 걸 발견한다.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나는 도서관에서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으로 1999년에 번역된 그 책을 찾았다. 70여 쪽 읽다가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8쪽 분량의 필사 기록을 남겼다. 백수린의 소설에 나오는 문구는 주인공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언니 마르그레트에게 한 말이었다. 독후감을 쓰려고 반년 만에 또 읽을 때는 뒤에서부터, 중간부터, 펼쳐지는 대로 읽었다. 몰입이 쉽지 않았다. 스무 살 차이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쓴 일기와 편지, 그리고 겹따옴표 하나 없는 대사를 누구의 말인지 겨우 읽어내야 하는 소설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다가도 여자의 사소한 표정과 말에 반색하면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사랑에 기대하고 기뻐하는 소위 희망 고문당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소설이었나 하는 생각, 신비로움이라는 장막이 걷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는 약혼자(퍼시 할)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알렉산더)와 사랑에 빠져 임신한다. 그 사실을 알고도 니나와 결혼한 퍼시는 니나가 아이를 낳자 7개월도 지나지 않아 니나가 거부하는데도 임신하게 한다. 알렉산더는 니나가 퍼시와 결혼하자 홧김에 동료와 결혼한다. 퍼시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니나와 합의 이혼한다. 열여덟 살 니나를 환자로 처음 만난 20년 연상인 미혼의 의사 슈타인에게 알렉산더는 유일한 절친이다. 니나의 첫아이 아버지가 알렉산더인 줄 몰랐던 슈타인은 그는 니나를 가졌으며 그리고 떠났다. 얼마나 무책임한 악한인가?”라고 일기장에 적으면서 질투, 분노, 시기한다. 알렉산더가 니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줄 몰랐던 슈타인은 그에게 살아가면서 한 여성이 그렇게 많은 자리를 차지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더 중요한 것이 많은데.”라고 조언한다. 정작 슈타인의 삶 18년 거의 전부는 니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슈타인은 니나를 우울, 음침하고 완고한 정열, 변덕스러운 마녀 기질’, ‘쉽게 끓고 쉽게 끝나는 정열, 분주함, 과도 노출, 숨 막히는 명예심을 지닌 여성으로 본다. 20·30대의 니나의 그런 모습에 슈타인은 강렬하게 끌린 것 같다. 그는 자기 나이(40)에 한 소녀(20)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지 자문한다. 이별을 다짐하다가 재회에 희열한다. 니나를 증오하다 니나가 부르자 개가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가듯하는 자기를 본다. 니나는 그에게 생활의 질서를 부여하고,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면서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의 대상이다.

  퍼시 할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니나는 순종적이고 부드럽고 남자의 명령에 따르는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슈타인을 끔찍하게여기지만(니나는 사랑을 끔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유대인 망명자의 탈출, 퍼시 할의 감옥에서의 자살, 두 자녀의 돌봄 등의 도움을 요청한다. 슈타인은 생각을 많이 하는 대신에 행동은 조금 하는 행태가 자기가 겪는 불행의 핵심임을 잘 안다. 결단을 회피한 자기의 행동을 죄악으로까지 여긴다. 니나의 폐결핵 의심 증상을 진찰한 동료 의사 브라운이 니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슈타인은 별로 흥미 없다는 듯이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니나의 약혼 통보에도 괴로워하면서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파티에서 니나를 아느냐는 물음에 아니오라고 답하기도 한다. 소유욕, 의심, 시기, 복수 등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전부가 악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자각한다. 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항상 불리한 법임을 알면서도, 이전보다 니나를 더 사랑하면서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자기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버리고 나면 더욱 비참해지고 두 배나 더 고독해짐을 알기에 자기의 이성으로 격정을 숨기고 기만한다. 󰡔눈부신 안부󰡕에서 선자는 슈타인이었고, 니나는 선자의 첫사랑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의 화자인 니나의 언니는 인생이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있다고 생각한다. 그물에 벗어난다 해도 발치에 걸린 채 끌고 다닐 수밖에 없고, 그물이 아무리 얇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아내는 식탁에 앉아 거실에 있는 내게 문자 메시지를 여러 통 보낸다. 내가 오래된 신발에 덕지덕지 방수 테이프를 붙인 채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신발을 사 온 터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또 허튼돈을 썼다고 내가 힐난하자 거지꼴로 다닌다며 아내가 나를 비난하는 문자다. 자식들이 함께 있는데 큰 소리 내며 말다툼 할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 건데, 결국 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만하라고. 내 주접이 부끄럽다. 이게 삶이다. 이러다 말지. 좋다고 또 산다. 누구나 삶의 한가운데에서 변덕스럽게 살아간다. 루이제 린저는 마흔 살이 다가오는 시기(1911년 출생인 린저가 1950년에 󰡔삶의 한가운데󰡕 발표)에 니나의 입을 빌어 죽음을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고, 슈타인의 일기에는 진정으로 삶을 살지 못했을 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모른다고 썼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만 흥미로울 것 같다는 점에서는 같을 것 같다. 죽음을 소재로 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김유나의 󰡔내일의 엔딩󰡕을 읽을 생각에 설렌다. 니나의 말처럼 죽는 얘기가 사랑 얘기보다 더 재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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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고래 요나 - 제1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명주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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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고래 요나라고 적는다. 4월 첫 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짬이 났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여러 곳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종이 파쇄기 앞문을 열고 잘린 종이가 가득 담긴 검정 봉투를 꺼냈다. 분리수거장 폐지함 앞에 내려놓았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중앙 정원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집게로 주었다. 밤새 촉촉하게 곱게 내린 비가 물방울로 풀잎에 매달려있다. 클래식 FM 라디오 진행자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6번을 소개한다. 자신이 바이올린을 처음 접하게 했던 음악이라는 안내와 함께 나오는 선율에 살짝 마음이 뭉클하게 움직였다. 소설 󰡔검푸른 고래 요나󰡕를 읽는 내내 그런 마음이 인 기억이 없다는 데 생각이 뻗쳤다. 대신에 검은색, 푸른색, 푸른 눈과 파란 별처럼, 그 두 색과 두 색이 섞인 색이 어른거린다.

올해 21일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검푸른 고래 요나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마구 읽었다. 급박하게 상황이 치닫다가 엉뚱하게 일제강점기 사할린 이주민 이야기다. 누구 이야기인지 아직 모른다. 다시 읽어봐야 한다. 쉽지 않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대개의 소설 속 이야기가 그렇듯, 단순하다. 고래 인간, 인간도 고래도 아닌 모호한 존재이자 애매한 사람 아닌 사람이 지구 바다를 헤엄쳐 다니고 바다 아래 바다에 간다. 그 고래의 고기를 먹고 싶은 인간이 있다. 현실도 자연도 모두 모호한데 인간은 무엇이든 분명하게 나누려고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떠올랐다. 그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고 무경계에 선을 그었다. 완전성, 절대성 등에 우주와 자연이 거리를 두듯 어떤 인간도 거리를 둔다.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향한 그리움, 동경일까.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데 자꾸 그것을 이상(理想)으로 둔다. 본성이기보다는 열망의 표현이겠지.”

날것 그대로의 감상이다. 뭔가 뻔한 결말을 기대했다가 당한 기분이었다.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혹시나 뭉클하고 진한 감동에 잠시라도 황홀한 감정에 빠지고 싶었던 이 내밀한 욕망이 들켜서 내심 부끄러운데도, 아닌 척하는 뻔뻔한 내 모습을 본다. 그동안 술술 읽히면서도 이야기가 잘 연결되어있는 소설에 익숙한 탓이다.

요나는 인간도 아니고 고래도 아닌, 인간이면서 고래인 남자아이다. 구희가 상상임신으로 석 달 동안 품었다 태어난 고래 인간이다. 구희에게 요나는 서해에서 침몰한 배에서 죽은 쌍둥이 남매 구선이다. 구희는 동정녀 마리아를 떠오르게 했다. 검색해보니 요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였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고래인지 상어인지 모를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나흘 간 고난을 겪고 살아난 인물이었다. 예수는 요나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사람 손이 있는 고래 인간 요나는 고래 세계의 구원자다. 그물을 뜯어내고 걷어내 새 삶을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괴물이다. 요나가 태어날 때 사랍이 곁에 있었다. 사랍(Seraph), 처음 읽을 때는 사람의 오타인 줄 알았다. 옛 히브리어 성경의 이사야서에서 한 번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 중 하나란다. 최고의 천사다. 예수가 탄생할 때는 동방박사들이 왔다. 소설 검푸른 고래 요나는 구약성서의 요나를 밑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시점이 혼란스럽다. 어떤 장면에서는 전지적 시점이다가 곧바로 내 공격적인 상태를 본 고모는이라고 일인칭 시점으로 바뀐다. 검정색 다이아몬드 표식과 검정색 별 모양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분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소설을 읽다가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냥 즐기기에는 속이 메슥댔다. 주미와 혜미, 구선과 구희, 주미의 아빠와 고모, 광주 투입 작전에 항명했던 구희의 아버지(요나의 할아버지), 인왕산에 있는 브이아이피, 준식 삼촌과 철우 오빠 등, 등장인물이 헷갈렸다. 러시아 소설에서 한 명의 등장인물 이름이 여러 개로 나오는 바람에 동일인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경험과 비슷했다. 특별한 소설이다. 재미없다. 주미 이야기는 미끄덩거리다가도 검정색 양복쟁이 이야기에 가면 꺼칠꺼칠해진다.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어느 순간 미끄러진다. 불편하다. 이야기를 즐기기에는 그 즐김이 뚝뚝 끊긴다. 인간의 탐욕과 기만, 허위, 욕망 등 그 무엇으로 단정해서 말하기 어려웠다. 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는 일은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애써 의미를 발굴해보려고 했다.

좋은 친구로 그쳐야 오래도록 요나를 곁에 둘 것 같았다.”

주미의 독백이다. 둘 사이에서 우정(友情)을 넘어 연정(戀情)으로 나아가는 속도와 강도는 서로 간에 다르다. 심한 불균형은 관계를 깬다. 단절하지 않은 채로 있으면 한쪽은 혹독한 속앓이를 한다. 운 좋게 균형을 이루어 연정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해도 그것을 끊기지 않게 유지하거나 계속 상승하게 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혼자 남는다. 비로소 주미의 생각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영원히 곁에 있게 하려면 그쳐야 한다는 것, 평정한 마음으로 어쩌다 바라볼 수 있어야만 그나마 오래 있을 수 있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출근한 날 녹초가 되었다. 천변 자전거길을 달리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발판을 굴렸기 때문임을 나중에 알았다. 내 자전거 옆을 잘 빠진 자전거를 타면서 빠르지만 무척 부드럽게 추월하며 가는 사람은 발판을 서너 번 굴렸다가 멈추고 두어 번 밟았다가 다시 멈추었다. 쉬엄쉬엄 가는 길이 결국 빠르게 꾸준히 가는 길이었다.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 헤엄치기를 그쳐야 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헤엄칠 수 없다. 그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정류장을 벗어나 막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운전기사님을 향해 세워달라고 손을 들어도 멈추지 않은 이유도 브레이크를 다시 밟아 멈추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미가 요나에 대해 그러했듯이, 나 외의 모든 존재를 대하는 방식도 그러해야 할 것 같다. 완전한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부재한 것과 같이 없는 존재다. 완전함을 향한 열망도 그쳐야 한다. 다시 더 나아갈 수 있어도, 그렇게 하려면 그쳐야 한다. 언제 그쳐야 할지 잘 모르지만, 그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언제인가 그칠 수 있다. 우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편하게 검푸른 고래 요나를 생각하는 일도 여기서 그치고 싶다. 책을 뒤적이면서 검정색 다이아몬드와 별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더는 고민하지 말자. 사할린 이주민과 고래 인간 요나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려고 하지 말자. 그저 바다 아래 바다를 상상하며 지구의 바다를 오가는 고래 인간을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한 더 나아갈 만한 때가 있을 것 같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른다. 더 나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자. 성서 속 요나가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 길을 가듯, 검푸른색 고래 요나도 제 갈 길을 간다. 우리 모두 그런 요나다. 다만 그칠 줄 안다면, 그러고 나서 더 나아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검푸른 고래가 사는 곳 그곳, 바다 아래 바다, 바다 밑이 아닌 바다 아래 바다는 요나가 사는 곳이다.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주미, 침몰하는 배에서 죽은 구선, 고래고기를 즐기는 권력자, 독립운동 사할린, 심연, 깊은 연못, 바다 아래는 어떤 곳일까. 꿈을 꾸었다. 오래된 꿈이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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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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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훈이 굴착기 팔 생각을 접고 돌아오는 길에 튼 음악이 베토벤의 󰡔합창󰡕이라는 대목을 읽자마자 고향집에서 나무 농사를 짓고 사는 셋째 형이 떠올랐다. 형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 스마트폰에 FM 라디오 앱을 깔아 놓고 클래식 음악 방송을 듣는다. 꺾꽂이 하려고 화살나무, 황매, 목수국, 수수꽃다리 줄기를 자르고 뿌리를 정리하면서도 듣고, 단풍나무 씨 뿌린 데에 물을 줄 때에도, 삽으로 스트로브 잣나무와 조팝나무 분을 뜰 때에도 서양의 현악기와 관악기 소리에 마음을 맡긴다. 간혹 바이올린이 경쾌하다 못해 정신 사납게 깨갱대면 국악으로 바꾼다. 거문고를 듣다가 창을 듣기도 한다. 할부로 산 벤츠 승용차에 오래 전 사두고 가끔 뜯었던 거문고를 싣고 가까운 광역시에 있는 국악원을 작년 여름과 가을에 다녔다. 자기 나이의 딱 2분의 1을 먹은 선생님에게 11로 거문고 음악출강(出鋼)’을 배웠다. 한 달에 네 번 2시간씩 배우면서 낸 강습료가 5만 원이었다. 시에서 반절 이상을 지원했단다. 굴착기 기사인 남훈이 플라멩코를 배우는 모습이 멋지게 비범해 보이는 것처럼 형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그런데 남훈이 자기의 분신과 같은 굴착기를 언제나 새것처럼 닦고 정비하는 모습과는 달리 형은 트럭과 트랙터를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새 트럭을 몇 개월 만에 10년도 넘은 낡은 트럭으로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부릴 정도이니 남훈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얼마 전에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밭 한가운데에 관리기가 그대로 있다. 밭을 갈아 반듯하게 만든 이랑 위에 비닐을 씌우고 관리기로 흙을 쳐올리다 비가 오니 그대로 둔 지 3~4일이 지났다고 한다. 남훈이라면 깨끗한 비닐로 단단히 덮어 두었을 테지만, 형은 그런 데 신경을 덜 쓴다. 네팔이나 인도를 한 번 더 여행할 생각에 모아 둔 돈으로 작년에 중고 트랙터를 샀다. 코로나-19 감염병으로 해외여행을 갈 수 없게 되자잘 됐다며 저질렀다. 묘목을 캔 밭에 거름을 내고 쟁기질에 로터리를 치자면 트랙터를 가진 동네 형님에게 그동안 여러 번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품삯도 만만찮게 줘야 했다. 더욱이 그 형님이 자기 밭은 쟁기질을 여러 번 해서 곱게 흙을 가는데, 형 밭은 대충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비록 중고지만, 마음껏 묘목 밭을 갈 수 있어서 속편하단다. 그 트랙터 운전석 주변은 트럭과 마찬가지로 형다운 모습으로 있다.

소설 속 남훈이 처, 딸아이와 함께 사는 것과 달리 셋째 형은 큰 집에서 혼자 산다. 그 집은 내가 아홉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집이다. 이 집에는 본채에 방 세 칸과 부엌이 있고 황장목이라고 불리는 큰 소나무로 짠 마룻장이 두 칸짜리 방 앞에, 배나무로 짠 마룻장이 한 칸짜리 방 앞에 놓여 있다. 소죽을 쑤었던 사랑채와 대문간도 있었는데 30년 전에 헐어서 지금은 마당을 넓게 쓰고 있다. 작년에 이 마당에다 벤츠가 들어갈 비닐하우스 주차장을 지었고 그 외의 땅에다 거름기 적은 산 흙을 퍼다 상설 묘목장을 만들었다. 서른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와 옛날에는 스물다섯이면 늙다리 노총각이었던 남편, 그리고 도련님만 셋 있는 집으로 어머니는 열여덟 나이에 시집을 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새벽녘에 눈뜨자마자 우물에서 물을 길어 손을 씻고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 때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밥상 세 개에 시어머니와 남편, 자식 아홉에 일꾼 둘까지 보통 열셋에 달하는 밥그릇과 국그릇을 올리고 찬을 차려 큰방에 들여보내면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양푼에 반찬 몇 가지와 싱건지를 넣고 비벼서 재빨리 드셨다. 밥상을 거두고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바로 또 쌀을 씻어 점심을 준비하셨다. 이 일을 하루 세 번 반복하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단다. 그런 일과는 쉰 살 전후로 조금 여유로워졌다. 예순 살 전후에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의 사업이 잘 되다 말다하고 막내아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면서 마음 편한 날이 별로 없는 시절을 보냈다. 결국에는 새천년이 되던 해에 집안 재산이 모두 농협과 축협으로 넘어갔고, 얼떨결에 둘째 형 빚보증을 선 셋째 형은 신용불량자가 되어저짝방’(어머니와 아버지가 단 둘이 주무시던 작은방인데, 큰방을 기준으로저쪽(사투리로저짝’)에 있는 방을 줄여서 부름.)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쫄딱 망한 집안 탓에 내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운 좋게 얻은 직장에서 월급을 서너 번 받을 즈음에 셋째 형은 어떤 성씨의 시조묘가 있는 종중산의 산지기가 되었다. 소도시 근교에 있지만 강원도 오지에 있을 법한 깊은 산중에 지어놓은 제각 옆 가건물로 들어간 형은 마을 사람이 논밭에 묘목을 키우는 일을 보고 배웠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묘목 심기로 살림 밑천을 장만했던 일을 기억하며, 형은 고향에 있는 시제답에 나무를 심기로 하고 3년 만에 산지기 생활을 청산하고, ‘저짝방에 눌러앉았다. 그새 20년이 지났다. 그 중 10년 정도는 저녁상을 놓고 아버지의 술친구로 살았다. 그 덕분인지 형들 중에서 셋째 형이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아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밤늦도록 저녁상을 놓고 어머니 말벗이 되었다. 더 오래 계셔야 했던 어머니가 2년도 안 되어 아버지 뒤를 따르자, 형은 큰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지금껏 혼자 산다. 서재이자 식당, 찻집, 술집이고 침실인 큰방에서 담배도 피우지만, 절은 담배 냄새도 안 나고 내게 익숙한 총각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너저분하면서도 깨끗하니, 사람 사는 방 그대로다. 음악과 책을 달고 살면서 자기 마음 들여다보기를 일상으로 한 덕분일까.

부엌이 아쉽다. 내 아내는 고향집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조그만 쥐가 수저통 위를 지나는 모습에 질겁한 적이 있다. 길고양이 몇 마리가 집에 드나들면서 부엌에 들어오는 쥐는 사라졌지만, 형은 그 부엌에서 맛 좋고 보기 좋은 스페인 새우 요리 감바스를 해낸다. 시금치를 아삭아삭하고 고소하게 무치기도 하고 우족을 삶아 두고두고 먹는가 하면, 돼지 수육을 졸깃하게 삶아 혼술을 즐기기도 한다. 초가였던 집의 지붕에 기와를 얹고 부엌 옆에 있던 작은 방을 없애고 부엌을 조금 넓히는 정도의 수리를 내가 다섯 살 때쯤에 했던 것 같다. 큰형 사업이 조금 잘 되던 때에 부엌을 지금처럼 입식으로 고쳤지만, 천장이 낮고 작은 창마저 서북 방향으로 나 있어서 부엌은 늘 어둡다. 게다가 한가운데에 기둥이 있어서 불편하다. 혼자 살면 먹는 일이 중요하고, 그만큼 부엌이 좋아야 하는데 말이다. 입맛이 정갈하면서 푸짐하고 요리 잘하는 형에게 잘 어울리는 부엌이 언제나 꾸며질지 모르겠다. 남훈이창고로 쓰이는 뒷방이나다름없는 서재에 만족하며 소중하게 사용하듯, 셋째 형도 부엌에 불만을 표현한 적이 없이 생명의 공간으로 여기며 산다. 탕이나 찌개, 전골 등이 먹고 싶으면 식당에 가서 사 먹고, 남은 음식은 미리 가져간 냄비에 담아와 며칠 더 먹기도 한다. 몇 년 전 그런 음식을 휴대용 가스렌즈에서 데우다 집 전체를 태워버릴 뻔했는데, 불조심 차원에서 검게 그을린 벽을 그냥 놔두고 산다.

남훈이 길거리에서 손으로 코 풀지 않고, 노약자석에 앉은 임신부에게 시비 걸지 않고,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등을 마음에 새길 만큼이나 셋째 형도 자기도 잘 아는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나 생각이 있다.‘욱 하는 성질머리에서 비롯된 거친 말과 행동이다. 어쩌다 형 일 도우러 넷째 누나가 나와 같이 고향집에 간 적이 있다. 서툴게 일하는 나에게 큰소리에 짜증 묻은 말로 타박하는 형을 보고, 누나가 내게 작은 소리로 그랬다. 넌 어떻게 저런 형 성질 받아주면서 일하러 오냐고. 오랜만에 일하러 가는 날에는 꼭 마음이 상한다. 한두 가지 호기심 담은 질문에도, 다소 과장된 나의 추임새에도, 어리숙한 삽질이나 가위질에도 혼이 난다. 혼자 일 하다가 내가 온 김에 밀린 일을 마구 해대다 보면 형의 급한 성미가 나오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을 때도 웬 간섭이 많은지, 국물 한 방울까지 맛있게 싹싹 비우려고 하면, 짠 걸 왜 다 먹느냐며 말린다. 짬뽕 먹으면서 단무지를 춘장에 찍어 먹으려면 젓가락으로 툭 쳐낸다. 건강에 안 좋단다. 내가 4학년, 형은 6학년 때 도시에 있는 학교로 달랑 둘이 전학을 갔다. 할머니와 둘째 누나가 번갈아 가며 밥을 해주었고, 그 둘째 누나가 시집을 가서 둘째 매형 집에서 4년을 살았다. 거짓말 같지만,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형과 싸웠다. 주먹으로 형의 얼굴을 내가 먼저 때린 적도 있을 만큼 형은 내 만만한 싸움 상대였다. 형이 고교 2학년이던 어느 겨울, 새벽녘에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맡아져서 깨어나 형광등을 켜니, 언제 들어왔는지 술에 취해 자는 형과 그 옆에 푸짐하게 토해 놓은 음식물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 당시 25도나 되던 소주를 혼자서 11병이나 마셨다고 했다. 지금도 믿지 않는다. 아무튼 형의 말수가 적어져서 말다툼할 일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 많은 음주량에 내가 겁을 내고 놀란 탓인지 나는 그 즈음부터 형이 무서워졌고 감히 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형이 고향집에서 재수를 할 때,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내가 보고 싶었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 나는 속으로 왜 이런대 하며 시큰둥했다. 지금 이 기억이 떠오르니 내 마음에 문득 울음이 차오른다. 형이 중학교 1학년일 때, 골목길에서 놀던 내가 누군가에게 맞으니까 형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내 편에 서서 상대를 내몰았던 기억이 있다. 내 싸움 상대였던 형은 나를 미워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고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 같다. 내 어린 날에. 아무튼 형은 나를 두고 늘내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지금도 그렇다. 낯간지럽다.

소설에서 남훈은 학창시절에 언어학자를 꿈꾼 적이 있고 영어를 좋아했다. 셋째 형은 고교 시절 제2 외국어로 배운 독일어를 좋아했다. 재수해서 소도시에 있는 사립대 야간 국문과에 진학했다.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는 문턱에서 그만두었다. 꽤 유명한 문학계간지에 실린 심사평에는 형에게 재능이 있다는 문구가 있었던 것 같다.‘아버지라는 제목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담담한 문체로 한 자 한 자 적은 시구를 접한 후에 나는 한동안 시를 끄적이지 않았다. 형을 향한 질투와 시기 탓이었다. 다섯 남매끼리 나누는 사이버 대화 공간에 가끔씩 문장으로 올리는 평범한 형의 일상에는 시 맛이 느껴진다. 소설에서 남훈이 67세에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고 플라멩코 춤을 배우기 시작하듯 셋째 형도 그 나이쯤에는 아마도 시집 낼 준비를 시작하지 않을까. 작은 나무(묘목 또는 관목)를 기르기에 품이 많이 들고 그 일을 해줄 일꾼(동네 할머니)이 더는 없을 무렵, 큰 나무(교목)만을 굴착기와 크레인 같은 장비를 들여 관리하고 판매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면 그럴까. 매년 두툼한 새 다이어리를 사서 언제 씨를 뿌리고 밭 정리를 했는지, 흰말채, 단풍나무 몇 주를 주당 얼마에 팔았는지를 기록해둔 그 사이, 그 틈 어딘가에 형이 쓴 시 아닌 시가 있을 것 같다.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나뭇잎과 꽃잎이 나이 든 색을 띠고 있다가 빛을 보듯 형이 쓴 문장이나 문구도 한두 권의 시집 안에 담겨지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설날이 지나고 겨울 가뭄이 길어지고 있던 어느 날, 형이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어보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신작로까지 길게 누운 시제답 반절을 혼자서 트랙터로 골을 판 후에, 내가 오기를 기다려 나와 함께 골과 골 사이에 서서 이랑 위에 검정 비닐을 덮고 골을 따라 관리기 로터리로 흙을 쳐올리고 나서 말했다. 저녁밥 먹고 읽기 시작해서 밤새 단번에 읽었단다. 남훈의 삶이 자신의 삶과 조금 닮았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형이 떠올랐다고, 독후감 쓸 때 형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있다가 지나가는 말인 듯, 남훈이 전처와 낳은 보연이를 만나고 스페인 여행을 다니는 이야기를 읽다가 형도 보연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딸 아닌 딸이 생각났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은 혼자 살지만, 늘 혼자인 건 아니다. 그 무엇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형은 요즘나 하나라도 잘 살자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하나뿐인 동생인 내가 자식 셋을 키우느라 허덕대는 모습에,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월세 살면서 학습지 교사로 딸아이 대입시 삼수를 뒷바라지하고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과 살면서 하나님께 의지하며 버티고 있는 바로 위 다섯째 누나를 보면서,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하는 생각일 테다. 남훈이 굴착기 작업을 시작하면서자신이 똑바로 설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형은 아마도 밑줄을 그었을 것 같다. 자기 생각도 그렇다고 끄덕이면서 말이다. 나처럼.

아내가 무슨 소설을 읽느냐고 내게 물어보자, 굴착기 기사가 나이 들어 일을 그만두고 스페인어와 스페인 전통춤인 플라멩코를 배우고 스페인 여행을 가는데, 함께 가는 이가 전처와 낳은 딸이 나오는 소설이라 했다. 굴착기 기사와 플라멩코 춤이 어울리느냐고 되물었는데, 예상대로 아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무농사꾼인 형이 클래식 음악 듣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부정적이지만 성찰과 수용의 과정을 거치면 많은 것들을 낯설게 보게 하여 신선한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부정성의 철학자로 불리는 한병철이 쓴 󰡔아름다움의 구원󰡕에 따르자면, 어울리지 않음과 같은 부정적인 것은 무언가를 문학 또는 예술이 되게 하고 사유를 촉진하고 유발한다. 동일하고 친숙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의 매력이 그것이다.

그런데 남훈의 그 어울리지 않음의 성취를 되새길 때마다 내가 느끼는 박탈감과 소외감, 그리고 불편함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에 있는 주장을 끌어오면, 남훈이 청결하게 굴착기를 관리하고, 본격적인 굴착 작업 전에 반드시 땅을 다지는 모습은 성과사회에서 사는 사람에게 보이는 나르시시즘의 한 단면이다. 남훈의 서재는고립·고독이라는 부정성의 공간이기보다는, 그래서 창조의 공간이기보다는 아내와 딸에게 배제된 채자기 최적화자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남훈은 과제를 나열하며 자기착취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자유를 한병철은 󰡔폭력의 위상학󰡕에서 성과사회, 피로사회, 자기착취사회, 긍정사회에서의 감옥이라고 규정한다. 자유는 수인인 동시에 감시인이기도 한 노동수용소이다. 성과주체는 자유와 강제를 분간할 수 없는 긍정성의 폭력에 지배당한다. 남훈은 과도한 음주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에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며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으로만 세상을 대하자고 엄숙히 다짐한다. 이 다짐을 남훈이자유롭게 했는지, 우리 사회가 강요한 강제로서 어쩔 수 없이 했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스페인어를 배우면서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는 무척 심오한 말 뒤에 남훈은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고 말한다. 새로운 관계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악연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무한긍정 속에서 성과 내기에 급급하다 소진해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셋째 형이 어느 날 자루가 쇠로 된 삽으로 붉은조팝나무를 캐다 말고 하는 말이,‘잘 될 거야~~’라는 노래가 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잘 될 거라 말하는지, 그렇게 말하면 저절로 잘 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며 불평을 했다. 겨울가뭄으로 묘목 심기를 미루고 있는 중에 묘목 주문이 뚝 끊긴데다, 값이 떨어진 산철쭉과 회양목 묘목을 갈아엎어야 할 상황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저 긍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다.

거칠지 않은 실제 삶이 불가능하듯, 소설 속 남훈의 삶도 굴곡이 있고 풍파가 많이 일었다. 10대에 아버지를 잃었고, 가정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이혼과 알코올 중독, 실직, 재혼 등과 같은 삶의 길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을 테다. 그런데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매끄러운 소설이다.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와 같은 전개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은 몰입도가 높은 만큼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다. 조금 자극적이지만,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읽기 쉬운 소설을 포르노그래피적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미란 은폐를 본질로 삼는 것으로서 불투명하다. 포르노그래피는 덮개가 없고 비밀이 없는 노출로서 미와 대립한다.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은 미와 다르게 투명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상처 없이는 문학도 예술도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도 상처가 지닌 부정성에 의해 시작되고 나타난다. 기억에 오래 남는 이야기에 비극이 많은 이유는 우리 삶이 대개 비극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모조리 비극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어쩌면 애써 행복했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삶을 마감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덜 후회할 수 있을 테다. 영영 치유되지 않거나 최소한 희미한 흉터는 남을 삶의 상처를 외면하기보다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긴 여운을 남기면서 내 삶에 스며들 것 같다.

남훈의 거친 삶을 매끄럽게 다듬어 놓은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단숨에 읽을 만한 소설이다. 작가는 수채화를 그리는 붓질처럼 무거운 소재를 가볍고 발랄하게 잘 묘사했다. 매끄러운 흐름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다. 하지만 책장에 한번 꽂으면 다시 꺼낼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 하나 하나는 현실감 있는 상처를 품고 있어서 매끄럽지 않지만,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야기의 전개 탓인지 울림이 크지 않다. 아무 쪽이나 펼쳐서 어떤 장면이나 문장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는다. 나와 셋째 형의 삶이나 이 세상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거칠게 나아가는 현실의 삶은 예상하지 못한 잦은 제동으로 출렁이는 시내버스를 탄 모양새다. 개연성 없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아쉽게도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감흥을 안겨주기 위해 남훈의 실패와 좌절만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시간 죽이기용도로 쓰이는 볼거리와 읽을거리도 팍팍한 삶에 여백을 주고 활력을 얻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덕분에 남훈과 셋째 형의 삶을 견주어 보면서 형의 모습을 그려볼 기회를 가졌다. 아울러 한병철의 성찰을 세밀하게 다시 살필 수 있었다.

소설에 남훈의 어머니가 겪은 삶의 일부가 서술되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언제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남훈은 기억하고 기록을 했는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화를 냈다는 말 외에 어머니에 관한 기록은 없다. 동생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남훈의 삶을 중심 소재로 삼았으니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이야기의 밀도가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 들게 하는 원인인 것 같다. 개인 중심의 서사에 집중하다보니 삶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다루었다. 능력주의를 부지불식간에 옹호하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남훈의 노후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이뤄진다. 금전적 여유가 없는 다수의 현실 노인에게 스페인어와 플라멩코 배우기는 능력 밖의 영역에 있다. 적어도 남훈처럼 전문기술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남훈이 실행에 옮기고 있는 모범적이고 긍정적인 노후의 삶은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능력을 갖춰야 성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기계발서를 소설화한 것 같다는 비평을 할 수 있겠다. 셋째 형은 올해 2년째 마을 이장직을 수행 중이다. 옆집과 앞집 간의 경계를 지적측량으로 명확히 하고 철판으로 가로막아 사생활의 비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관계를 맺는다.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삶, 가족을 가운데에 놓으면서도 가족의 범위를 확장하는 삶이 노후에도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플멩코를 추는 남훈의 성취는 남다르고 커다란 결과임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남훈이라는 개인을 넘어 더 많은 이가 거리낌 없이 누리는 세상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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