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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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어느 봄날에 안경을 처음 썼다. 마흔두 살에 나를 낳으시고 시골에 사시는 아버지 대신 도시에 있는 둘째 누나 신혼집에 얹혀살았던 나는 매형과 함께 안경점에 가서 은테 안경을 맞추었다. 환하게 보이던 맑은 세상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도 근시였던 외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고교 시절에 마이너스 시력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져 우안과 좌안의 시력 차이가 두세 배 나는 짝눈으로 악화하였다. 고교 3학년, 안경 쓴 지 5년이 되어도 안경 쓴 얼굴이 어색해 졸업 사진 찍을 때 안경을 벗었다.

  농구, 축구, 몸싸움으로 수십 개의 안경테를 부러뜨리고 새로 안경알을 갈아 끼우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가는 어느날 눈이 아리고 먹먹했다. 눈병이 났나 싶었는데 동네 안과에서 녹내장이란다. 눈물 구멍이 막혀서 안압이 높아지고 압력으로 시신경이 죽다가 결국 실명하는 병이다. 종합병원에서 눈물길을 새로 내는 수술을 했다. 오른쪽 눈의 신경은 현재 8% 남았다.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만 보면 안경을 써도 4분의 3은 꺼멓고 나머지는 흐릿해서 아무리 가까이 눈을 대어도 크고 굵은 글자 한 자도 읽을 수 없다. 안경만 있으면 볼 수 있었던 세상을 보다가, 안경을 써도 볼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하니 무서웠다. 이희영의 소설 󰡔페이스󰡕에서 시울은 여섯 살 때, 이 세상 모든 걸 다 볼 수 있어도 자기 얼굴만 볼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내겐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내 눈으로 직접 내 신체를 볼 수 없는 데는 여럿 있다. 사진에 찍힌 내 뒤통수, 뒷머리, 목덜미, 등허리를 보면 이물감 같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내 맨 엉덩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뭔 의미가 있다고. , , 입이 있는 얼굴은 일어나자마자 화장실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로 보기 시작해서 잠들기 전까지 여러 번 본다. 거울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신체 부위 중에서 민감하게 늘 봐야 하는 데가 얼굴이다. 거울이 보여주는 나는 항상 나이지만, 늘 같은 나는 아니다. 내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 적도 있다. 어떤 영화 속 독백이나 소설의 한 문장처럼 낯선 나를 본다. 거울의 나와 거울의 나를 보고 있는 나는 같지만 다르다. 이것이 작가 이희영의 상상이 출발하는 지점이었을지 모르겠다.

  이희영은 시울의 입을 빌려 백설공주를 괴롭혔던 마녀에게 가장 큰 적수는 거울이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마녀 자신이 아닌 백설공주라고 거울이 말할 때, 마녀가 거울을 깨버렸다면 마녀의 삶은 평탄했을 거란다. 외모로 대표되는 자아에 관한 평판에 끌려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뜻인지, 그런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수록 중심을 잃지 않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인지, 이와 다른 해석을 누군가 한다면 더 그럴싸해 보이겠다. 시울이는 친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묵재의 상태가 자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모란 자식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이지만,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을 하려는가.

  보는 것과 아는 것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보이지만 보이는 것 모두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보인다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아무것도 모르진 않는다. 미립자의 세계는 관찰 불가능해도 이론적으로 어떠한지 설명할 수는 있다. 자기 얼굴을 못 보는 것은 자기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시울이는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울로도 볼 수 없고 사진을 찍어도 볼 수 없다. 자기의 얼굴을 구성하는 눈, , 입 그리고 이마, 눈썹, 아미, 눈꺼풀, 눈동자, , 콧구멍, 인중, 입술, 턱 등을 볼 수 없다. 이것들은 자연이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묵재의 실수로 시울이가 사물함 모서리에 찧으면서 찢어진 이마에 난 상처다.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간의 경계는 모호하다.

  시울은 자기의 얼굴을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게 흐린 얼굴로 인식한다. 색색의 블록, 젖소의 얼룩무늬, 소용돌이치고 있는 회색 구름, 먹물, 주방 타일 같은 얼굴, 20세기 거장의 초상화, 기하학적 형상 등. 자기의 얼굴을 이토록 잘 설명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 얼굴을 잘 알기에 시울이는 이마에 난 상처와 흉터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내 얼굴이 어떠한지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내 얼굴을 보고 있는 상대에게 물어봐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만 알지 못한다. 시울이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잘 안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만 볼 수 없다.”라는 역설은 진리에 가깝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시울이는 잡아떼지만, 이는 허구 안에 있는 사실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강력한 은유다. 조금 틀어진 앞니 교정 열망에 빠져 있는 시울의 친구 라미,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임신한 채 결혼한 묵재의 엄마가 알코올에 의지하며 연명에 가까운 삶을 산 일,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헌신한 묵재 아빠, 친아빠가 아닌 걸 알고 가출한 묵재 등은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는 75세 할머니를 시울이는 두 볼이 통통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열다섯 살 옥분으로 본다. 보이는 게 전부도 아니고 진실 그 자체도 아니다. 보이는 건 보이는 것일 뿐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이 허상이거나 아집의 결과일 수 있다.

  중학생인 우리 딸아이는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거울만 보고 있는 것 같다. 과장이지만, 하루 종일 거울 속 자기만 본다. 거울만 쳐다본다. 앞머리를 빗고 고데기로 돌돌 말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문지른다. 사춘기, 나를 자각하고 알아가는 시기에 얼굴은 고민과 관심의 중심이다. 정작 자기 등 뒤 목덜미에 오돌톨톨 돋은 여드름을 아이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수업 시간 내내 거의 몇 초 간격으로 손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보는 학생이 작년에 있었다. 몇 번이고 나무라면서 수업에 집중하라 해도 반복한다. 수업과 상관없이 머리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모습인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해 본다. 얼굴은 곧 생각이고 세상일지 모른다.

  직장 사무실 책상 위에 탁상용 거울을 올려놓고 근무한 지 10년이 넘었다. 입 주변에 뾰루지가 나오다 곪으면 누런 고름이 맺히는데, 그걸 바로바로 처리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에 확인하려고 올려 놓았다. 녹내장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안약 부작용 탓인지 시력만이 아니라 겉보기에도 두 눈은 짝눈이 된 지 오래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에 비해 1/3쯤 감긴 듯한 상태다. 잘생긴 얼굴이 아니어서, 내 얼굴을 보며 만족감을 느낀 적은 거의 없어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 보지는 않는다. 대신에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얼굴을 조금 오래 쳐다본다. ‘이게 나냐?’라는 질문을 잠깐 던진다.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시울이만큼은 못 해도, 밝고 어두움, 맑고 탁함, 온도 차이, 굳기의 정도 등으로 내 얼굴을 설명하고 내게 어울리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에 적절한 얼굴을 보여야겠다. 내가 세상 그 자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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