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푸른 고래 요나 - 제1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명주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0월
평점 :
‘검푸른 고래 요나’라고 적는다. 4월 첫 주가 지나서야 비로소 짬이 났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여러 곳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종이 파쇄기 앞문을 열고 잘린 종이가 가득 담긴 검정 봉투를 꺼냈다. 분리수거장 폐지함 앞에 내려놓았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중앙 정원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집게로 주었다. 밤새 촉촉하게 곱게 내린 비가 물방울로 풀잎에 매달려있다. 클래식 FM 라디오 진행자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6번을 소개한다. 자신이 바이올린을 처음 접하게 했던 음악이라는 안내와 함께 나오는 선율에 살짝 마음이 뭉클하게 움직였다. 소설 검푸른 고래 요나를 읽는 내내 그런 마음이 인 기억이 없다는 데 생각이 뻗쳤다. 대신에 검은색, 푸른색, 푸른 눈과 파란 별처럼, 그 두 색과 두 색이 섞인 색이 어른거린다.
올해 2월 1일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검푸른 고래 요나』의 마지막 장을 어젯밤에 마구 읽었다. 급박하게 상황이 치닫다가 엉뚱하게 일제강점기 사할린 이주민 이야기다. 누구 이야기인지 아직 모른다. 다시 읽어봐야 한다. 쉽지 않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대개의 소설 속 이야기가 그렇듯, 단순하다. 고래 인간, 인간도 고래도 아닌 모호한 존재이자 애매한 사람 아닌 사람이 지구 바다를 헤엄쳐 다니고 바다 아래 바다에 간다. 그 고래의 고기를 먹고 싶은 인간이 있다. 현실도 자연도 모두 모호한데 인간은 무엇이든 분명하게 나누려고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떠올랐다. 그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고 무경계에 선을 그었다. 완전성, 절대성 등에 우주와 자연이 거리를 두듯 어떤 인간도 거리를 둔다.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향한 그리움, 동경일까.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데 자꾸 그것을 이상(理想)으로 둔다. 본성이기보다는 열망의 표현이겠지.”
날것 그대로의 감상이다. 뭔가 뻔한 결말을 기대했다가 당한 기분이었다.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혹시나 뭉클하고 진한 감동에 잠시라도 황홀한 감정에 빠지고 싶었던 이 내밀한 욕망이 들켜서 내심 부끄러운데도, 아닌 척하는 뻔뻔한 내 모습을 본다. 그동안 술술 읽히면서도 이야기가 잘 연결되어있는 소설에 익숙한 탓이다.
요나는 인간도 아니고 고래도 아닌, 인간이면서 고래인 남자아이다. 구희가 상상임신으로 석 달 동안 품었다 태어난 고래 인간이다. 구희에게 요나는 서해에서 침몰한 배에서 죽은 쌍둥이 남매 구선이다. 구희는 동정녀 마리아를 떠오르게 했다. 검색해보니 요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였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고래인지 상어인지 모를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나흘 간 고난을 겪고 살아난 인물이었다. 예수는 요나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사람 손이 있는 고래 인간 요나는 고래 세계의 구원자다. 그물을 뜯어내고 걷어내 새 삶을 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괴물이다. 요나가 태어날 때 사랍이 곁에 있었다. 사랍(Seraph), 처음 읽을 때는 ‘사람’의 오타인 줄 알았다. 옛 히브리어 성경의 이사야서에서 한 번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 중 하나란다. 최고의 천사다. 예수가 탄생할 때는 동방박사들이 왔다. 소설 『검푸른 고래 요나』는 구약성서의 요나를 밑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시점이 혼란스럽다. 어떤 장면에서는 전지적 시점이다가 곧바로 ‘내 공격적인 상태를 본 고모는’이라고 일인칭 시점으로 바뀐다. 검정색 다이아몬드 표식과 검정색 별 모양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분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소설을 읽다가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냥 즐기기에는 속이 메슥댔다. 주미와 혜미, 구선과 구희, 주미의 아빠와 고모, 광주 투입 작전에 항명했던 구희의 아버지(요나의 할아버지), 인왕산에 있는 브이아이피, 준식 삼촌과 철우 오빠 등, 등장인물이 헷갈렸다. 러시아 소설에서 한 명의 등장인물 이름이 여러 개로 나오는 바람에 동일인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경험과 비슷했다. 특별한 소설이다. 재미없다. 주미 이야기는 미끄덩거리다가도 검정색 양복쟁이 이야기에 가면 꺼칠꺼칠해진다.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어느 순간 미끄러진다. 불편하다. 이야기를 즐기기에는 그 즐김이 뚝뚝 끊긴다. 인간의 탐욕과 기만, 허위, 욕망 등 그 무엇으로 단정해서 말하기 어려웠다. 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는 일은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애써 의미를 발굴해보려고 했다.
“좋은 친구로 그쳐야 오래도록 요나를 곁에 둘 것 같았다.”
주미의 독백이다. 둘 사이에서 우정(友情)을 넘어 연정(戀情)으로 나아가는 속도와 강도는 서로 간에 다르다. 심한 불균형은 관계를 깬다. 단절하지 않은 채로 있으면 한쪽은 혹독한 속앓이를 한다. 운 좋게 균형을 이루어 연정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해도 그것을 끊기지 않게 유지하거나 계속 상승하게 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혼자 남는다. 비로소 주미의 생각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영원히 곁에 있게 하려면 그쳐야 한다는 것, 평정한 마음으로 어쩌다 바라볼 수 있어야만 그나마 오래 있을 수 있다. 오랜만에 자전거로 출근한 날 녹초가 되었다. 천변 자전거길을 달리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발판을 굴렸기 때문임을 나중에 알았다. 내 자전거 옆을 잘 빠진 자전거를 타면서 빠르지만 무척 부드럽게 추월하며 가는 사람은 발판을 서너 번 굴렸다가 멈추고 두어 번 밟았다가 다시 멈추었다. 쉬엄쉬엄 가는 길이 결국 빠르게 꾸준히 가는 길이었다.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 헤엄치기를 그쳐야 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헤엄칠 수 없다. 그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정류장을 벗어나 막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운전기사님을 향해 세워달라고 손을 들어도 멈추지 않은 이유도 브레이크를 다시 밟아 멈추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미가 요나에 대해 그러했듯이, 나 외의 모든 존재를 대하는 방식도 그러해야 할 것 같다. 완전한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부재한 것과 같이 없는 존재다. 완전함을 향한 열망도 그쳐야 한다. 다시 더 나아갈 수 있어도, 그렇게 하려면 그쳐야 한다. 언제 그쳐야 할지 잘 모르지만, 그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언제인가 그칠 수 있다. 우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편하게 『검푸른 고래 요나』를 생각하는 일도 여기서 그치고 싶다. 책을 뒤적이면서 검정색 다이아몬드와 별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더는 고민하지 말자. 사할린 이주민과 고래 인간 요나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려고 하지 말자. 그저 바다 아래 바다를 상상하며 지구의 바다를 오가는 고래 인간을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한 더 나아갈 만한 때가 있을 것 같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른다. 더 나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자. 성서 속 요나가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 길을 가듯, 검푸른색 고래 요나도 제 갈 길을 간다. 우리 모두 그런 요나다. 다만 그칠 줄 안다면, 그러고 나서 더 나아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검푸른 고래가 사는 곳 그곳, 바다 아래 바다, 바다 밑이 아닌 바다 아래 바다는 요나가 사는 곳이다.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주미, 침몰하는 배에서 죽은 구선, 고래고기를 즐기는 권력자, 독립운동 사할린, 심연, 깊은 연못, 바다 아래는 어떤 곳일까. 꿈을 꾸었다. 오래된 꿈이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