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대 고교 2년에서 대학 새내기 시절 사이, ‘루이제 린저라는 이름과 󰡔생의 한가운데󰡕라는 소설 제목을 몇 번 접했다. 최초로 독일 유학을 간 한국인 여성인 전혜린이 번역했다면서 그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소개도 있었다. 한 번쯤 읽고 감상이 있어야 멋있어 보일 법한 느낌이었다. 저자가 반공·반북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것과 거리를 둔 외국인이란 점과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술자리에 가득하던 시절이 준 마음의 결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맘먹고 읽어야지 하다 40여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작년에 실행했다. 백수린의 소설 󰡔눈부신 안부󰡕에서 인용된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한 문장 때문이다.

  백수린 소설의 화자는 이모의 친구인 선자의 첫사랑 K·H를 찾는 임무를 맡는다. 이모와 선자는 1960년대에 독일 간호사로 일하러 갔다. 한국에서 K·H 찾기에 나선 화자는 선자가 쓴 일기장 여러 권을 읽는데, 모든 일기장 맨 첫 쪽에 루이제 린저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 독일어 원문으로 적혀 있는 걸 발견한다.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나는 도서관에서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으로 1999년에 번역된 그 책을 찾았다. 70여 쪽 읽다가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8쪽 분량의 필사 기록을 남겼다. 백수린의 소설에 나오는 문구는 주인공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언니 마르그레트에게 한 말이었다. 독후감을 쓰려고 반년 만에 또 읽을 때는 뒤에서부터, 중간부터, 펼쳐지는 대로 읽었다. 몰입이 쉽지 않았다. 스무 살 차이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쓴 일기와 편지, 그리고 겹따옴표 하나 없는 대사를 누구의 말인지 겨우 읽어내야 하는 소설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다가도 여자의 사소한 표정과 말에 반색하면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사랑에 기대하고 기뻐하는 소위 희망 고문당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소설이었나 하는 생각, 신비로움이라는 장막이 걷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는 약혼자(퍼시 할)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알렉산더)와 사랑에 빠져 임신한다. 그 사실을 알고도 니나와 결혼한 퍼시는 니나가 아이를 낳자 7개월도 지나지 않아 니나가 거부하는데도 임신하게 한다. 알렉산더는 니나가 퍼시와 결혼하자 홧김에 동료와 결혼한다. 퍼시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니나와 합의 이혼한다. 열여덟 살 니나를 환자로 처음 만난 20년 연상인 미혼의 의사 슈타인에게 알렉산더는 유일한 절친이다. 니나의 첫아이 아버지가 알렉산더인 줄 몰랐던 슈타인은 그는 니나를 가졌으며 그리고 떠났다. 얼마나 무책임한 악한인가?”라고 일기장에 적으면서 질투, 분노, 시기한다. 알렉산더가 니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줄 몰랐던 슈타인은 그에게 살아가면서 한 여성이 그렇게 많은 자리를 차지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더 중요한 것이 많은데.”라고 조언한다. 정작 슈타인의 삶 18년 거의 전부는 니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슈타인은 니나를 우울, 음침하고 완고한 정열, 변덕스러운 마녀 기질’, ‘쉽게 끓고 쉽게 끝나는 정열, 분주함, 과도 노출, 숨 막히는 명예심을 지닌 여성으로 본다. 20·30대의 니나의 그런 모습에 슈타인은 강렬하게 끌린 것 같다. 그는 자기 나이(40)에 한 소녀(20)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지 자문한다. 이별을 다짐하다가 재회에 희열한다. 니나를 증오하다 니나가 부르자 개가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가듯하는 자기를 본다. 니나는 그에게 생활의 질서를 부여하고,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면서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의 대상이다.

  퍼시 할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니나는 순종적이고 부드럽고 남자의 명령에 따르는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슈타인을 끔찍하게여기지만(니나는 사랑을 끔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유대인 망명자의 탈출, 퍼시 할의 감옥에서의 자살, 두 자녀의 돌봄 등의 도움을 요청한다. 슈타인은 생각을 많이 하는 대신에 행동은 조금 하는 행태가 자기가 겪는 불행의 핵심임을 잘 안다. 결단을 회피한 자기의 행동을 죄악으로까지 여긴다. 니나의 폐결핵 의심 증상을 진찰한 동료 의사 브라운이 니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슈타인은 별로 흥미 없다는 듯이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니나의 약혼 통보에도 괴로워하면서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파티에서 니나를 아느냐는 물음에 아니오라고 답하기도 한다. 소유욕, 의심, 시기, 복수 등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전부가 악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자각한다. 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항상 불리한 법임을 알면서도, 이전보다 니나를 더 사랑하면서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자기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버리고 나면 더욱 비참해지고 두 배나 더 고독해짐을 알기에 자기의 이성으로 격정을 숨기고 기만한다. 󰡔눈부신 안부󰡕에서 선자는 슈타인이었고, 니나는 선자의 첫사랑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의 화자인 니나의 언니는 인생이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있다고 생각한다. 그물에 벗어난다 해도 발치에 걸린 채 끌고 다닐 수밖에 없고, 그물이 아무리 얇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아내는 식탁에 앉아 거실에 있는 내게 문자 메시지를 여러 통 보낸다. 내가 오래된 신발에 덕지덕지 방수 테이프를 붙인 채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신발을 사 온 터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또 허튼돈을 썼다고 내가 힐난하자 거지꼴로 다닌다며 아내가 나를 비난하는 문자다. 자식들이 함께 있는데 큰 소리 내며 말다툼 할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 건데, 결국 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만하라고. 내 주접이 부끄럽다. 이게 삶이다. 이러다 말지. 좋다고 또 산다. 누구나 삶의 한가운데에서 변덕스럽게 살아간다. 루이제 린저는 마흔 살이 다가오는 시기(1911년 출생인 린저가 1950년에 󰡔삶의 한가운데󰡕 발표)에 니나의 입을 빌어 죽음을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고, 슈타인의 일기에는 진정으로 삶을 살지 못했을 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모른다고 썼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만 흥미로울 것 같다는 점에서는 같을 것 같다. 죽음을 소재로 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김유나의 󰡔내일의 엔딩󰡕을 읽을 생각에 설렌다. 니나의 말처럼 죽는 얘기가 사랑 얘기보다 더 재미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