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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라이언 무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오랫동안 곱씹었다. 주디스 헌의 인생 그리고 나의 인생에 대해서.
그래서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 한동안 머뭇거리기만 했다. (●'◡'●)
주디스 헌의 인생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일지도.
4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인 주디스 헌.
이기적이고 노망 든 이모를 보살피느라 자신의 청춘을 다 보내고, 이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렇다 할 직업도, 외모도, 친구도 그 어느 것도 없다. :-(
‘주디스 헌은 새 하숙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모의 사진을 끼워 놓은 은색 액자를 먼저 꺼냈다. 그 슬펐던 장례식장 날 이후로, 그녀가 살았던 그 모든 단칸방에서, 이모의 사진을 위한 자리는 항상 벽난로 선반 위였다. 막 이모의 사진을 선반에 올려놓고 보니 오늘따라 사진 속 이모의 근엄한 눈빛 어딘가에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삐걱거리는 침대 스프링과 허름한 가구, 그리고 이 하숙집이 자리한 지역의 황폐한 분위기는 주디스에게 온갖 불안을 가져다 주었고, 이모도 그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p11)
브라이언 무어의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은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 새로운 하숙집으로 이사를 간 주디스는 하숙집 주인의 오빠이자 제임스 매든에게 반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모습을 진정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서로의 환상에 의한 것이다.
주디스는 호텔 도어맨 매든을 호텔 사업가로 착각했고, 매든은 주디스를 부자라고 오해했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보았고, 행복한 상상을 하며 관계를 시작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좌절한다.
그저 통속적이고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지만 작품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심리적 긴장감은 작품을 중간에 놓아버리지 못하게 한다.
주디스 헌은 인간적이고 착하지만 아주 미워서 읽는 내내 목구멍의 가시처럼 불편하게 하는 묘한 캐릭터이다. 공상에 빠지기 일쑤이고 알코올 중독자라고 할 만큼 술을 마신다. 자신의 감정, 특히 시기나 증오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폭발시키곤 한다.
‘몸을 떨며 침대에서 내려온 주디스는 트렁크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긴 손가락으로 병의 봉인을 긁었고, 손톱을 부러뜨렸고, 초조하게 마개를 잡아당겼다. 봉인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 뒤, 코르크 마개가 침대 옆 탁자 위에 거구로 떨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건 퍽 현명한 습관이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다보면 종종 까먹고 그냥 잠들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옷과 가운을 입은 가녀는 조용히 난로 옆에 앉았다.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렸다. 하지만 분노에 떠밀린 그녀는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값싼 위스키병이 술잔 가장자리를 통통 건드렸다. 그녀는 긴 손가락 두 개로 술을 따른 뒤 의자에 몸은 끼웠다. 노란 액체가 잔 속에 천천히 맴돌았다. 향이 풍부하고 기름진, 만족으로 이끄는 이 열쇠, 그녀는 단숨에 삼켰다. 배 속에 데워지며 술기운이 서서히 몸에 퍼졌다. 떨리는 손이 가라앉았고,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세상 하나 뿐인 연인, 그녀는 손을 뻗어 잔 가득 술을 따랐다.’(P190-191)
그녀를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도 그리고 독자들도... 아무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자꾸 주디스에게 눈이 가고 마음이 가고 공감이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읽어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다가오는 불편함은 이 소설의 작가에게서 유발된다.
작가가 사용한 3인칭의 전지적 시점과 인물들의 내면 독백을 오가는 서술은 인물들의 상황을 더 멀고 안타깝게 느끼게 된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고 그들의 주관적인 속마음과 차가운 현실을 대비시킨다.
주디스가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오닐 가족의 집을 방문했을 때처럼, 우리에게는 진정한 관계는 없다. 다만 내가 그렇다고 생각할 뿐. 그 사람을 끝까지 믿는다던지 이해하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군이라는 말처럼 지금 나와 관계가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믿을 뿐이다. 주디스가 그런 것처럼.
‘입구로 향한 그녀는 결심이 서지 않는 듯 그 앞에서 망
설였다. 정말 컴컴하네.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 같아. 지난번에는 어느 꼬마에게 심부름을 시켰었다. 하지만 그 때는 낮이었다. 그래도 난 사 가야해. 이렇게 멀리 왔는데.’(P294) 나의 삶처럼 매순간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외로워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지만 또다시 좌절하는 주디스의 이야기는 쉽게 이렇다고 규정지을 수가 없다. 너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묵직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주디 그런 생각 말아요. 그리고 지금이 힘들다고 해서 앞으로도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도 말아요. 자, 아재 호텔로 가소 좀 눕는 게 어때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꺼예요. 명심해요. 하느님께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셨다는 걸요.”’(P395) 그 당사자가 되지 못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 상황에 대해서, 그 감정에 대해서.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상대를 위로하고 위안의 말을 던져 내 눈앞에서 그를 밀어버리려고 한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진정한 위로를 찾으러 다닐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작가는 지나치게 리얼하게, 냉정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불편하고 가슴 아팠고 그 것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는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던 책이다. 지금 다시 읽으면서 주디스 헌을, 그들을, 그리고 나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