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당의 표정
정민 엮고 지음 / 열림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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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들의 처마 끝에 자리하는 와당들의 다양함을 보며 의아함을 느낀적이 있다.

이 책을 보며 수없이 표현된 와당들을 보며 그 다양성과 변화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각각의 와당들에 숨겨진 의미와 역사와 삶을 들여다 보며 느끼게 되는 야릇한 감정은

그들의 삶의 은밀한 부분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 속에 담긴 깊은 농담의 표현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당의 문양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꿈꾸었던

삶과 그 시대를 지배했던 약호들과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태평성대를 꿈꾸며 그려

넣은 봉황의 문양에는 약간은 거만스러운 몸짓과 더불어 신비로움 마저 드러낸다.

또한 길상문의 종류인 다양한 만세의 문양들은 각각 특이한 구성을 지닌 독특한 표현

들이다. 이러한 표현들 하나하나에도 분명 의미와 뜻이 숨겨져 있다. 획의 끝을 동그랗게

뭉쳐 오리의 모양을 표현하는 만세가 있는가 하면 마치 손을 잡고 만세를 부르는 문양도

있고 거북의 등을 네등분 하여 각기 다른 문양을 새겨 넣은 천추만세 문양도 있고 원을

중심으로 특이한 공간 배치를 해서 만들어 놓은 대길만세 문양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만세 문양을 통해 각 시대의 상황과 배경들을 드려다 볼 수 있으니 야릇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각양 각색의 와당들을 보며 비록 삶의 시대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바램들은 비슷하거나 아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수를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들과

부를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들 건강을 상징하는 문양들 비록 시대와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들이기에 이 책을 보며 묘한 동질감 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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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로 가는 길 - 주님을 따르는 길, 주님을 닮아 가는 영성의 길
이훈 지음 / 두란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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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로 가는 길..

과연 어떤길일까? 어떻게 하면 그 길을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이 있다.

그 때 치열하게 부딪치며 치루었던 전쟁과도 같은 시절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라는 대목에서는 교회의 나누어짐과 성도들의 분열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읽으면서는 우리를 향한 불쌍히

여기심의 끝이 어디일까라는 생각에 감격을 느끼기도 했으며, 부인에게 누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잔 꾀를 읽으면서는 어려움과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 잠간만

눈 감아 주세요' 라고 말하며 저지르는 우리의 범죄함이 생각났다.

특별히 믿음과 이성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딱 지금 현대 종교인들이

가진 딜레마요 당면 과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었지만 어느순간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다시금 이성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면서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눈물 콧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는 길에서 차를 막고 서있는 분을 향해 분노가 치밀었다는 어떤 목사님의 고백은 비단 그의 고백이 아닌 우리 대부분의 고백이 아닌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다른 방법을 통해 아들을 얻어보려는 노력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는 어느덧 세상과 타협하는데 익숙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식과 이성의 결정하던 아브라함에게 정말 그런 결정이 옳다고 착각 할만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동안 그가 했던 상식과 이성의 판단이 아닌 믿음의 판단을 하게 되는 그를 보며 다시금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판단의 순간들이 다가온다.

그 순간에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지는 전적인 자신의 의지이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판단의 근거도 결과도 원인도 그리스도여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판단이 주저되는 모든이들에게 꼭 권해 주고 싶다. 그들의 판단이 얼마나 옳은 판단이었으며 그 판단으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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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자로 살기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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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제자로 산다는 것, 어쩌면 우리에겐 너무나 커다란 짐이요 부담일수도 있다.

특히나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쉬지 않으신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제자라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당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다행인것은 그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처음 가보는 길을 가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미 당신이 승리해 놓은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이 책은 그런 승리의 길을 걷길 원하는 그래서 제자의 삶을 살길 원하는 이들을 향한 간결하고도 강한 메세지들이 들어 있다.

 

그 중 읽는 내내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받고 있는 그 순간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고 만지고 예배할 수 있는 신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집집 마다 가지고 있던 금붙이들을 가지고 나와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비약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한다.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얇은 지식에 의지하고 별것 아닌 권력에 몸을 기대고 얼마 안되는 경제력에 목숨을 건다. 그러면서 말로는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보이는 신을 달라고 외치는 그들이나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수 없습니다라고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기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본성과 습관들이 그대로 다시 되살아 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행동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우리나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 보았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누군가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될것이다. 이것이 출발 같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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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생각한다
이재훈 지음 / 두란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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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엔진 브레이크가 걸려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자동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를 향한 저자의 외침은 분명하다. 그 매임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매임을 풀어 주러 오셨던 것처럼 매이고 얽힌 그곳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과거의 상처로 부터 혹은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부터 또는 죄악의 습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매임의 근원이 사탄이며 그 사탄의 매임에서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 주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회당장의 모습을 인용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아무도 눈길 조차 주지 않던 18년 동안 허리를 펴보지 못한 여인을 향한 놓임의 말씀을 통해 기득권의 잘못된 신앙관에 대해 도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린다. 18년이라는 긴 시간을 절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던 여인의 결박을 푸시는데 채 18분도 걸리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이 기득권 층에게는 분명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merry'가 아닌 "messy"가 되어 버린 헤롯의 오판 처럼 말이다. 비단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베다스다의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치유 했을 때도 기득권은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자신들이 세워 놓은 종교적 체계에 대한 거부와 반항이이며 고귀한 가치의 손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역시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세워 놓은 가치관과 규칙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달려들어 뜯고 찟고 망가 뜨린다.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가장 혐오스러운 낙인 마저도 찍어 버린다. 정작 자신들은 그렇게 조자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오신다면 "위선자들아"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자신들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성경적이지도 예수적이지도 않는 단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오류 덩어리의 규칙을 신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들을 향해 분명 주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도 자체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전정한 필요와 문제는 외면해 버리는,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한 그들 속에 혹시 나는 들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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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신비 세계기독교고전 52
존 플라벨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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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들, 즉 "창조" 또는 "섭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특별히

섭리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들의 주된 영광과 위대하심은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들을 실제로 성취하고 이룬다는 데 있다. 섭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조차도 하나님의 참되심을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증인들로 만들어 왔고,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 준다. 그러나 섭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들이 서로 조명해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섭리에 의해 떄를 따라 베풀어 주시는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이 다 성경에 들어 있는 것임을 보여주며, 말씀 속에 있는 약속들은 여러가지 곤경과 환난에 처하게 된 교회에게만이 아니라, 그 각각의 지체에게도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비를 아는 것이 지혜일것이다.

 

특별히 저자는 섭리를 묵상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라고 명시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의무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도처에 "기억하라, 바라보라, 찾으라, 보라"등의 명령들을 통해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라고 한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는 섭리의 시작을 이야기 할때 "보라"라는 단어를 두번이나 사용하며 주의를 환기 시키며 강조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3:2.9). 직접 보라는 것이다. 의심과 불신의 사람에게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신앙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섭리이다. 억지로 무지막지하게 밀어 붙여서 믿으라가 아니고 보고 듣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신약에도 이와같은 말이 나온다. "와서 보라"는 구절이다. 와서 직접 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서 자신이 없으면 "와서 보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다. 발달된 문명으로 거의 모든 것이 발가 벗겨진것처럼 드러나기에 정말 자신이 없으면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은 "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보는 것이 묵상이다. 모든 생각과 사고의 관점을 집중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말씀 속에서 거하시는 분을 보는 것이며,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분을 보는 것이며, 삶의 모든 순간에 개입하시는 분을 보는 것 이것이 섭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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