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아닌 'Because of you'입니다. p38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고백이다. p20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찬양을 목 놓아
부르며 그분의 응답하심을 기다렸던 때가 있다. 암울했던 그 시절
그 분은 '혀 짤린 하나님'이셨고 '침묵하는 에수님'이셨다. 물론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이렇게 저렇게 함게 하시고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지만 그 땐 정말 그랬다.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 목 놓아 불러야 할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분'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봤지?'. 20여년전 기도했던 저자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원하는 그때가 아니라 그 분이 원하시는 그때.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기다리지 못할 뿐이다. 자그마한 신학생이 아닌 당신의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계시다 당신의 적절한 바로 '그 때'에 응답하신다. 지금 우리는 기다림에 너무 인색하다. 아니 인색을 넘어서 어뵤는 지경이다. 무슨 자판기에서 물건을 뽑아 내듯 기도하면 바로 즉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착각을 한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엘 로이'의 하나님이다. 지금도 여전히 눈동자와 같이 바라보고 계신다.
신학생 시절 '아도나이'의 하나님을 찾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보여주십시오'가 기도의 처소에 들어 갈 때마다 부르짖었던 기도였다. 그 떄 함께 부르짖던 동기들 중 몇은 이미 그 분 곁으로 갔고 몇은 현역에서 물러났고 몇은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이 인정되고 선포되어지면 더이상 문제는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지금도 여전히 그 이름을 붙잡고 기도한다. 경배와 찬양 10집에 들어 있는 엘 샤다이와 하용인 선교사님의 조용히 따라 부르시는 찬양이 더 깊고 묵직하게 전해지는 바룩하바(Baruch haba)는 저희 예배시 부르는 찬양이다. 지금도 수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메시아닉 주·Messianic Jews)들은 인사로 이 말을 한다.
'바룩하바 베쉠 아도나이(בָּר֣וּךְ הַ֭בָּא בְּשֵׁ֣ם יְהֹוָ֑ה)'
이 책은 우리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다. 혼돈과 좌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에게 '진짜'가 있다는 사실과 그 이름이 우리의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