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사회이건 계급은 존재한다. 아니라고 우겨봐도 소용없다. 본인만 비참해 질 뿐이다. 부르주아와 거지 혹은 부자와 약물중독자라는 묘한 대비는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각각의 것들은 언제나 존재하며 언제나 대립하고 언제나 적이다. 갈등의 시작이며 불만의 근원이기에 늘 불안하다.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는 여전히 우리 속에 존재하고 종교는 이곳에서 조차 문제거리며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런 세상을 향한 저자의 독백과도 같은 고백은 이렇다. '선입견이 없는 사람, 여행자, 유목민의 영혼을 가진 사람, 항상 길을 찾는 사람,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오만함이 없습니다.

'나쁜것을 보았다, 나쁜것을 들었다, 나쁜 짓을 했다. 의식의 전환인가. 의식의 발전인가 의식의 형상화인가.. 결국 그녀는 세번째 원숭이, 사악한 원숭이였다. 좋은 엄마, 좋은 주부, 좋은 시민이라는 서술과는 좀 동떨어진 설명이 오히려 더 깊게 다가온다. 꼬마 도둑에게 빼앗긴 핸드백 깊은 곳에서 나온 폴라로이드 사진 한장은 그녀의 과거이며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현실이기에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 잃어 버리면 안 된다.' 우리에게도 절대 잃어 버리면 안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좀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 있다가 맞을 것이다. 정체성, 가치관, 이념, 아니 단순히 연예일지라도 그렇다. 그것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나만의 그것이 오롯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지키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인 '신과 인간의 대화'. 신은 과연 인간과 대화하길 원하긴 하는걸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보기로하자.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신은 분명 인간과 대화하길 원한다. 그것도 친밀한 대화를. 그럼 인간은 과연 신과 대화하길 원할까. 어쩌면 필요에 의한 대화 이외의 대화는 '사절'이 아닐까.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해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자신들의 성취를 위해 신도 무자비하게 가져다 사용하고 버린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친밀한 대화를 원하는 신과 필요에 의한 대화만 원하는 인간의 대화는 영원한 모놀로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너는 하나님의 사과를 기다렸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라는 아무르 교수의 말과 그가 인용한 페르시아 고대시인 하피즈의 글은 많은 갈증을 남긴다. '신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배우다 보니 나는 더는 기독교인도, 힌두교도도, 이슬람교도도 ,불교도도, 유대인도 아니다.'

이 책에는 튀르키예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있다.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는 여정이고 현재는 미래를 위한 발걸음이다. 튀르키예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문명간의 충돌,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 서구화로 인한 전통의 상실등의 문제가 부각되는 곳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서술이 인상적이다. 사뭇 튀르키예에 날을 세우고 있는 '하얀성' '내 이름은 빨강'의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역할이라는 건 계속 바뀌는 것이다. 원자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항상 움직인다. 삶의 형태는 원이고, 원 위의 모든 점은 중심에서 등거리에 있고, 그 중심을 신이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아니면 전혀 다른 뭐라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종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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