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읽는 사도신경
윤석준 지음, 한동현 그림 / 퓨리탄리폼드북스(PRB)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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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박물관'. 지하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그곳은 그야말로 우리 인생의 모든

이채롭고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루틴'에 따라 움직여 간다.

굳이 '삶의 피동성'이라는 어려운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린 그냥 그렇게 떠밀려

살아가고 있다.

묵상(Maditatio)은 자신을 저 넓디 넓은 진리의 품 안으로 풀어 놓는 것이다.(이 말은

명상 수련하는 곳에 가면 처음 듣게 되는 구절이다) 옛 학자들은 이를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을 말하는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관조, 명상)와 '내 바깥에 있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메디다치오(Meditatio, 묵상)로 나누는데 여기에서

마음수련과 기독교의 묵상이 갈린다. 기독교의 묵상은 스스로가 무한의 공간이 아닌

'참 진리이신 그 분'께 빠져드는 것이다. 내 속이 아닌 그분의 진리를 들여다 보는 것이기에

어찌보면 더 많은 집중과 몰입이 필요하기에 휩쓸림과 떠밀림으로 대변되는 지하철에서의

묵상은 안 어울리는 조합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떠 밀려가는 우리가 자유로워져서

참 진리인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이것을 지하철 안에서의 묵상으로 보며 보편교회

(Catholic, 공교회)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이야기한다.

오랜만에 바르트(Karl Barth, 신정통주의 신학자)의 '사도신경 해설'을 만난다. 젊은 시절

바르트의 신학에 몰입했었고 그의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3권)과 '로마서

강해'(Der Romerbrief)를 원서로 읽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때도 바르트의

'전능하신'의 개념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었고 보수정통신학 아래에서 자란 나에게

'창조 행위'에 국한되던 하나님을 '아버지 되심'으로 받아들이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분의 전능은 객관적 뛰어남이 아닌 바르트의 말처럼 '신적인 전능의 행동이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계시'이다. 그분이 지으신 창조와 그분이 돌보고 다스리시는 섭리는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국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만드셨고 섭리하심을 믿는 다는 것이다.

예외 없이 모든 교회에서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이십여년전 나는 과연

우리는 각 고백에 담긴 의미와 교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은 이 고백의 의미와 교훈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그렇다면 그 고백이 유사종교들의 주문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들이나

이들이나 '믿음'이라는 궁극의 가치와 대상을 향한 고백인데라는 생각으로 딜레마에

빠졌었다. 그때 내린 결론이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믿는다' 였다. 물론 신적 존재에 대한

의심은 없다. 다만 무늬만 가진 헛개비와 같은 신앙은 맹목적이고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오랜 질문들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시절 그 열정이 조금 살아나는 느낌이다.

'먹어 봐야 맛을 안다'는 말처럼 알고 믿어야 더 깊은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고백의 마지막은 '아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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