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나폴레옹의 행동들은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하층민들을 끌어들여 혁명을 일으키지만 결국 그들을 자신들의 신분 상승의 도구로 이용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저자는 이를 통해 사회주의가 아닌 독재자 스탈린의 모습을 비판한다. 급기야 자신들의 혁명의 기치인 칠계명은 민중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지식층의 방관과 무관심으로 제멋대로 수정되고 소설의 끝에는 마지막 남은 한 문장인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마저 '네 다리도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바뀌게 된다. 이미 평등은 깨졌다. 평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더'를 사용하므로
스스로 차별을 정당화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미 7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끝없이 침묵하는 대다수의 민중들, 무슨짓을 해서라도 권력을 잡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파렴치한들, 그들에게 빌 붙어 떡 고물이라도 먹어 보겠다는 협잡꾼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대부분의 혁명은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존에 존재하던 악의 축을 무너뜨리고 나면 새로운 기득권층이 형성되고 이전에 행하던 악행을 답습하거나 초월한다.
이 책은 어쩌면 혁명의 실패 이유를 통해 우리에게 역설하려는 것 같다. 혁명은 성공하는듯 했으나 끝없는 돼지들의 권력과 탐욕, 대다수 다른 동물들의 침묵 혹은 방조를 통해 결국 인간과 동물 농장 돼지 들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게 되고 인간과 돼지는 얼굴 모습이 서로 같아져 누가 누군지 못 알아 보게 된다. 그리고 창 밖에서 참담한 마음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물들. 조지 오웰은 혁명 이후에 대해 풍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들의(우리들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권력의 타락을 방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