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미래의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전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인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람에게 일을 맡기신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세상의 마지막 때 택한 백성을 교회로 불러 모은다. 그리고 이 일들은 그의
뜻대로 계획한 영원한 목적을 따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미리 정해두시고 일하시는 '작정'과
그 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창조'와 '섭리'로 이루신다. '섭리'는 때가 있다. 그 때는 그분의 때이며
그 분의 시간이다. 한국 교회의 시작은 그 '때'가 차면서 시작된다. 당시의 전통 종교에 대해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 사람이 옛 종교에 대한 충성이 식었고, 믿음을 잃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신앙의 공허와 거짓을 보고 있었다'. 고 보고할 정도로 당시의 종교상은 공황상태였다. 또한 변화를
요구하는 세상의 압박을 견딜 힘도 의지도 없는 상황에서 '개방'과 '개화'가 시작된다. 공직자들의
부패는 극에 달해 백성이 수탈의 대상이 되며 정의가 사라지고 소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배 국가들은 지배국가와 종교가 함께 들어와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것과는
달리 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한 국가와 한민족을 식민지화 한 국가가 서로 다르다는 특징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개신교가 들어오기 100여년전인 1784년에 로마 천주교(이 표현은 아주 맘에 든다)
선교사가 들어와 당시 기득권 세력의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감등으로 박해의 구실이 되어 수없는
'사화'를 거치게 된다. 백여년이 지난 후 들어오게된 개신교는 이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밖,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은 '권서인(부끄럽게도 처음에는 사람인줄 알았다.
colporteur)'이라 불리는 한국인 개종인들에 의해 전국으로 전달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 개종자들인 권서인들에 의해 선교사들이 입국하기전 이미 복음을
전달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권서인이던 '서상륜'이 1885년 20여명의 개종자들과 함께
개신교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반도 최초의 교회이자 장로교의 요람인 '소래(송천)교회'이다.
동생인 서경조는 1900년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고 후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07년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명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서병호는 한국 최초의 유아 세례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