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카드. 역사가 깊다. 무려 1987년부터 이어져 오는 SF 시리즈 물이다. 깊은 역사 만큼이나
작가도 43명이나 되는데 시작은 여타 SF 물에 비해 단순하다.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 폭탄이 뉴욕
상공에서 터지고 난 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작가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각각의 스토리를
채워간다. 여기에 '얼음과 불의 노래'(후에 '왕좌의 게임'으로 제작되었다)로 '미국의 콜킨'이라는
명성까지 거머쥔 조지 R.R. 마틴이 이 작품의 대표 편집자겸 작가이다. 여러 작가가 하나의 공통된
세계관을 이어가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한 이 책은 2021년 현재 28권까지 발간된 진행형이다.
SF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여지없이 이 책에도 이능자들이 등장한다. 1권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
가는 크로이드(로저 잴라즈니의 슬리퍼에 등장) 수면 후 갑자기 능력이 생기고 이 능력으로 은행을
털기도 한다. 잠이 들 때 마다 다른 능력이 발휘되는 그는 에이스와 조커를 오가며 변화무쌍한 변이를
펼친다. 때로는 형편 없는 이능자가 되었다가 때로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에이스가 되는 그의 삶은
흥미롭다. 투명인간, 염력의 소유자(갑자기 '나에게 염력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려는 모든 사람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싶다'는 댓글로 유명한 망작 '염력'이 생각났다), 남의 생각을 조절하고, 순간이동을 하며
하늘을 날며 놀라운 파괴력을 가진(이쯤되면 '엑스 맨'이다)이들의 비참한 삶(총알받이가 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모든것을 숨긴채 숨어 산다)이 그대로 그려지며 여기에 정치적 음모와 권모술수들이
이능자들을 점점 나락으로 빠트린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권선징악은 진리다.
와일드 카드 데이. 90%사망, 9%의 조커, 1%의 에이스. 나에게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 모르겠다. 이능자가 되어 세상을 누려 볼 생각도 있지만
그러기엔 주어질 권력이 너무 거대하다. 돌연변이체로 이능자의 수족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현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흥미가 없다. 그럼 남는것은 '사망'뿐이다. 차라리 이꼴저꼴 안보고
죽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일일것 같은데 이마저도 뭔가 아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작품에 녹여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스티븐 리의 에서 숨죽이며 숨어지내던 조커들이 거리로 나서는 모습이 등장한다. '6월 항쟁'이 생각났다.
그때 군부에 의해 참묵했던 많은 이들이 분연히 일어났고 거리로 나왔다. 탄압과 핍박 속에서 인권마저
유린 당한채 숨어지내던 그들이 거리와 나와 세상의 권력과 마주한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에이스들을 탄압하고 조커들을 무자비하게 몰아가는 이들, 그들의 탄압에 맞서 결국 거리로 나서게
되는 이들, 현실과 너무 닮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와일드카드'라는 작품을 지금까지 끌고 온
동력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 '더 높은 그곳'을 갈망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신분이나 능력등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 그대로
갖혀산다. 변형된 유전자를 지닌 에이스와 조커들 처럼. 한번 정도는 모든 욕망을 현실로 구현하는
'서큐버스'가 되어 보고 싶다는 야릇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