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어 버린 교회는 더 이상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한다. 지금의 교회가 그렇다.
사람들에게 교회 혹은 예수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손사레를 치며 거절하며 '너나 잘 믿으세요'라고
한다. 예수의 권위와 명예는 이미 길거리에 버려져 아무에게나 짓밟힌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무너진 예수의 권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여전히 복만 빈다. 철저히 잘못됐음에도 대충
넘어가려하고, 철저히 타락했음에도 은헤로 치부해 버린다. 이런 현실 앞에 저자는 칠죄종(七罪宗 ,
seven deadly sins )을 예로 들며 우리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이 말은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문제는 죄 이후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죄를 회개할 의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회개'라는 엄청난 축복이 주어졌다. 문제는 그 축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말'하시겠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특별히
목회직을 맡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첫장부터 강렬하다. '영적 남용'. '남용'이란 '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함부로 씀' 혹은 '권리나 권한
따위를 본래의 목적이나 범위를 벗어나 함부로 행사함'을 의미한다. 함부로라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라는
뜻이다. 힘을 가진 자는 그에 걸맞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목회자은 영적 능력을 가진 자다. 영적
능력이란 성령의 은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주님께 부여 받은 직분의 영광을 말하기도 한다.(작자주)
이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영적 남용'이며 이는 부모와 자식간에도, 부부사이에도, 인간관계
속에서도 일어난다. 비단 목회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평신도 리더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적
남용은 영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그 권위를 이용하여 신자들을 강압하고 조종하고 착취할 때 발생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목적이나 뜻을 합리화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영적 협박으로 신자
길들이기를 시도하며, 온전한 구원과 축복을 빌미로 온갖 규정들을 만들어 신자들을 죄책감과 의무감에
빠지게 하고, 정죄하고, 통제하며, 자신이나 자신의 교회만 특별하다는 영적 엘리트 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과의 차별성을 가지게 하며, 무분별한 은사의 남발로 성도의 유익이 아닌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 앞에 '연자 맷돌'을 기억하게 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