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
구마 겐고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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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호모 노마드(Homo nomad)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호모 에랙투스, 호모 사피엔스를 이은

이동하는 존재라는 의미의 호모 모벤스(Homo movens)를 지나 정착생활을 하지 않는 유목형 인간

즉, 호모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정의한다. 물론 나는 별로 동의 하지 않는다. 저자도 그런것

같다.

저자는 자신을 이동하는 동물이 아닌, 흔적을 남기고 살아 간다는 의미로 '나무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나무는 존재 자체가 그때까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다. 나무의 대부분은 나무의 줄기를 구성하는

리그닌(lignin)이라는 물질로 흔적을 남기는데 흔적이 구조물로 남아 유지되면서 현재의 활동을 지원해

준다. 저자는 이러한 흔적에 집중하며 '장소와 흔적'에 대해 근현대 건축사와 종교 미학과 자신의 건축

철학을 가미하여 다채롭게 이야기한다. 모더니즘 건축과 깔뱅파라는 신학 사조와의 관계와 이로 인한

이동들은 미처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모더니즘 건축의 조합이라니 말만

들어도 신기하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독일의 철학자, 저서인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일을 구별하는 데에 있어서 따져보아야 할 것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태라고 말하며 존재에 눈을

떠야 한다고 주장함)는 '건축한다. 생활한다. 사고한다'라는 강연에서 '건축은 다리다'라고 말했다. 다리라는

표현은 건축은 반드시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여러개의 받침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비유는 탁월하다. 가늘고 길어도, 아무리 높아도 여러개의 받침점들이

없으면 건축은 지어질 수 없다.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굴'로 연결한다. 굴은 체험하는 장소, 현상학적

존재인 것 이상으로 이곳과 저곳을 연결한다. 굴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굴 저편에 무언가

존재하며 굴은 그곳까지 뚫려 있고 왼쪽에 있는 공간과 오른쪽에 있는 공간이 굴을 매개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굴은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를 겹겹이 연결한다. 굴은 동굴처럼 닫힌 것이

아니라 공동성을 환기시키는 밝고 열려 있는 곳이다.

예전에 강릉에 있는 SEAMARQ 호텔 개관식에서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 백색의 건축가라 불리는

명료와 세련미의 대가)가 했던 말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건축의 기본은 거부권입니다'. 단지 현상의

일부를 긍정하는 '좋다'는 보수주의의 별명이며 거기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부는 다르다. '이건 아닌데' 혹은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마음은 현상에 대한 부정이다. 그 거부하는

자세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 지금까지의 세상에는 탄생하지 않았던 것이 탄생한다.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끊임없이 'No'를 외치는 자세가 중요하다.

버나드 리만(Bernhard Riemann, 수학자)의 '지금까지 시대는 크기를 추구하며 달려온 시대다'는 말은

경제도 학문도 문화도 모두 크기에 집중하고 신봉했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작은 시간에 발생하는

작은 변화량에 착안하여 변화와 운동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적분 방법에서 그는 거대한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도시에도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고 이웃이 있다. 이것만으로 자연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라는 확고한 존재는 없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있는 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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