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 K-궁궐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김서울 지음 / 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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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고궁 나들이가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그때도 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막 대학을 입학 했을 때 당시 숙대 교수셨던 이모님을 따라 운현궁(흥성 대원군의 사저)마마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 어쩌면 나의 첫 궁궐 방문이었을 정도로 별로 친하지 않은 곳이 궁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이며 철저한 신분 구조 사회 속 최상류층에 살던 이들이 살던 공간이라는 거리감과 낯설음은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그후 시간이 많이 흘러 이렇게 나와 비슷한 경험의 작가가 쓴 궁궐이야기를

읽는다.

서울 한복판에는 다섯개의 궁이 있다. 놀라운 것은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다섯개의 이름과

위치를 잘 모르며 더군다나 이 다섯개의 궁을 하나의 '궁궐'이라는 덩어리로 이해한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어진 경복궁, 유니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자연과의 배치가 아름다운 창덕궁, 창덕궁과 연결되어 있고

일제 강점기에 가장 많이 훼손 된 창경궁, 고종황제의 즉위식이 열렸던 덕수궁, 다른 궁궐에 비해 작고

잘 알려지지 않아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을 한 명도 볼 수 없는' 그러나 예쁜 산책길이 많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경희궁 이렇게 다섯 궁이 있는데 난 호젓한 경희궁이 가장 좋다.

알다시피 조선의 궁궐은 나무와 나무를 이어 만들었다. 궁궐 전각 바닥의 기단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과 보는 물론이고 벽을 세울 때도 짚 등의 섬유질을 사용했고, 건축물 설계에

쓰이는 도면부터 건축에 사용한 물품과 자재를 기록해 정리하는 마지막 과정에도 종이가 사용될 정도로

나무는 궁궐의 모든 것이다. 닥나무 섬유와 큰 꽃송이가 인상적인 황촉규의 진액으로 만드는 도배지가

완벽한 비건vegan 제품이었던 것과 벽에 바르는 초배지를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인

낙폭지를 사용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물론 글자가 쓰인 종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답안지를 절구에 찧어 만든 일종의 재생지를 사용한 것인데 한 장에 집 한채 값에 맞먹는 기와를 써 놓고,

보이지 않는 면에는 재생지를 사용한 절약 정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것도 하필 과거에서

낙방한 사람들의 시험지를.

조선의 궁궐들을 거닐다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꽃나무가 별로 없다. 조선 초기에는

과실나무나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닥나무들, 실용적인 나무를 꽃보다 선호했던

세종의 명으로 궁에서도 꽃나무를 보기 어려웠고, 그나마 꽃을 좋아했던 연산군이 후원에 연산홍 1만

그루를 심으라고 명했을 뿐 공식적으로 꽃나무를 심은 흔적은 발견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고개만

살짝들면 사계절 내내 활짝 핀 모습으로 반짝이는 꽃나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청이다. 한 가운데의

분홍색 꽃, 그 꽃을 둘러싼 동글동글한 녹색 장식, 그 다음에 여백을 채우는 선. 건국기념인 유교 사상에

따라 검소함과 소박함, 고고함과 청아함에 높은 가치를 두었던 조선 왕실의 단청은 사대부 집의 단청에

비해 의외로 수수하다. 저자는 이를 무심한듯 시크한 방식으로 부를 드러냈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조만간 저자의 바램처럼 궁궐의 돌을 한번 더 들여다 보는 사람을, 궁궐의 나무를 조심스레 헤아려

보는 사람을, 궁궐의 진짜 색을 상상해 보는 사람을 만나게 될것 같다.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조만간

궁궐에 가보고 싶어 질것이다. 이쯤되면 저자의 궁궐 영업은 성공작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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