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값을 매긴다면? 아마도 우리는 매번 적자에 허덕일 것이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격으로 매겨진다면 우리의 생각의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생각의 폭과 방법은 좁고 좁고 좁다.
생각은 규칙을 만드는 작업이다.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좋은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규칙은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절실함을 만나야 비로소 실체가 나온다. 생각에는
예술가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값을 받을 수 있다. 예술혼이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면적
외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정신이다. 연극
프로듀서인 찰스 코크란(Charles Cochran)의 '절대 관객을 위해 쇼를 올리지 마라. 오히려 항상 너 자신을
위해 올리되, 최선을 다해서 제작해라. 그러면 아마 관객이 보러 올 것이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심장이
터질것처럼 만드는 생각만이 누군가의 시선과 집중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성공은 운이 따라주어야 가능하다.' 저자의 솔직함이 묻어나는 문장이다. 그렇다. 성공의 비법은
모두 허구다. 그 사람에게 그것이 통하고 운이 다았기에 성공한 것이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그 허구를 마치 진리인양 쫒는다. 비법에는 운이라는 달콤한 함정이 숨어 있고 정작 누구도
그 함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좋은 수는 성공의 비법이 아니라, 실패를 하지 않는 방법이다. 실패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작이 된다.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위인전을 읽었다고 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사람을 안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운은 움직인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쉽게 잡히지는 않지만 운은 스스로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 온다.
저자는 착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이 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단지
누가 덜 악한가의 문제이다. 누구나 악당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악당에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그 대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영원한 승부는 없다. 승부는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고 잘 끝낼 줄 알아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요즘 well-being 만큼이나 well-dying이 중요해졌다. 결국 인생은 자신과의 승부이기에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좌우하기도 한다. 늦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하나씩 시작하면 된다.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이고 염려는 시작하면 사라진다. 살아남는 것이 승부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강한 사람이 살아 남는 시대가 아니라 살아 남은 사람이 강한 것이다. 문제에 봉착했다면
이 문장을 기억해보자. '문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 문제는 문제를 대하는 너의 자세지'(캐리비안의
해적 중에서) 승부의 세계에서 '직시'는 승패의 전부이다.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하는
지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된다. 그리고 우린 여전히 그 승부의 갈림길에 서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고민이지만 새로움이며 익숙함을 바꾸는 일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세상에 없다.
지금 익숙한 모든 것도 처음에는 변화된 새로움이 시작이었다. 변화는 발칙(저자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
마음에 든다.)하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변화까지 변화시키는 일이 혁신이다. 혁신은 변화보다 본질적이고,
발견보다 의도적이며, 모험보다 계획적이다. 내가 행동으로 경험한 것만이 혁신의 연료이다. 혁신은 가격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 완성되는 선물이다. 낡고 무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변화이고 혁신이다. 0이 마침의 숫자라면 1은 출발의 숫자이다. 시작은
결국 끝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완벽한 것은 하늘의 길이고 완벽하고자 노력하는 것은인간의 길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길은 '진심'이 통한다. 그런 길을 우리는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