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시간은 항상 '적당한 때'이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도, 우리의 갈급함이 목을 타 넘어오는 순간도,
내가 간절히 사모하는 그 순간도 아니고 오직 '그분의 때'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자주 '주님의 때'를
오해하고 실망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처럼 가장 적절하고 가장 적당한 때 임하기에 기다림이 필요한데
우리는 조급함과 성급함, 염려와 걱정으로 왜 지금이 아니냐며 억지를 부린다. 저자의 온두라스 강의가
그랬다. 농부들의 농사를 위해 계속 비가 와야 하는 때와 사역자들의 학업을 위해 비가 멎어야 하는 때,
바로 이 때가 그분이 일하시는 때였다. 저자가 파라과이 교회에서 만난 S와 K의 경험이 그렇고 이스라엘
유학을 위한 항공권 비용과 프랑크푸르트 공항 항공기 사정이 그랬다. 사역의 현장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 때'에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십여년전 지역에 있는 노숙인들 200여명을 초대해
점심 식사와 생활 용품을 나눠 주는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전날부터 강풍에 비까지 내리는 악천후여서
참석하기로 했던 노숙인들 대부분이 불참하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그렇게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밤을 맞도록 기도하였지만 여전히 비바람은 거셌다. 행사 세시간여를
앞두고 다음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 하는 상황에서 당시 담임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하실겁니다.
끝까지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실로 먼저 들어가시고 행사 준비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함께 기도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놀랍게도 비와 바람이 그쳐 있었고 우리는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을 찬양하였다.
비바람이 그치자 불참하겠다고 했던 노숙인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노숙인들까지 285명이 행사에 참여해서
준비한 음식과 선물이 모두 동이 나 버렸다.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야외에 쳐 놓았던 텐트와 장비들을 모두
정리하고 함께 모여 마무리 기도를 하는데 어떤 권사님이 '어, 비오네'라고 하시고 그때부터 다시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 보던 시청 직원들과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그저 신기해 할 뿐이었고
우리 모두는 평생의 간증 꺼리가 생겼다. 그후 시청에서는 매년 교회가 주관하는 공식행사로 지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시청 직원 중 두명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지금은 교회의
좋은 일꾼 집사님들이 되셨다. 주님의 때는 그분이 원하시는 바로 그때이고 가장 '적당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