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드시는 하나님 세우시는 하나님 - 팬데믹 이후, 인생 재편의 시작
박종렬 지음 / 패스오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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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굴곡의 연속이고 시련과 환란은 예고 없이 엄습한다. 충분히 버틸만 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닥쳐오는 그것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비빌만한 든든한 언덕이라 생각되던 기반 조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뿌리째 뽑히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흔드시는 이유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세우시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며 전하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열심히 사는 자들에게는 함부로 고통을 주어선 안된다. 고통을 당하는

순간, 녀석들은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거든. 우리는 그저 고통 없이 열심히 살게 하다가 저놈들을

한방에 날려 보내야 해'.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좋아하지 않기에 호시탐탐 고통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 저자는 이것을

'위대한 전환점'이라 부르며, 고통 앞에 마주하길 요구하며,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쓰임 받은 사람이 없음을 말한다. 고난을 겪으면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을 포기하게 되며, 이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질 시기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문제 자체와 씨름하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줄 알아야 한다. 다윗은 끝없는 고통과 고난을

만나면서도 먼저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이 주실 기쁨을 붙들었고, 바울은 복음 증거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모든 고난을 자기 안에 계신

그분과 하나되는 시간으로 만들었고 고통하는 인생을 위로하는 사람이 된다.

예전에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적이 있다. 예배의 자리는 가득차 있지만

뭔가 공허하고 뭔가 허전한 마음에 한참을 그 질문과 씨름을 했다. 분명 찬양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잘 듣는것 같은데 정작 그 예배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저자도 그랬던것 같다. 그리고

발견한 '하나님 나라'는 단순하지만 우리가 너무 무감각하게 넘겨 버렸던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다스리는

그 곳'이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배는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영적 태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 분 앞에

내 삶을 드리는 헌신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우리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시 새롭게 하신 그 모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해 갈망하는 것이다.

저자는 '섭리'와 '예비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다. CGN TV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나 일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일본인들에게 많은 도전과 감동을 안겨준 '러브 소나타'가 되어져 가는 일들은

'섭리'가 아니면 설명 할 수가 없는 일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섭리와 예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은 내려놓고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조금 더디게 보일수도, 조금 힘겨워 보일수도, 조금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이고 그 길이 주가 가신 길이라면 그렇게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걸음이다.

영생이란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그분과 누리는 삶 전체를 말한다. 참된

진리의 길, 진리 되신 생명, 생명 되신 빛 안에 거하는 삶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예수를 믿는 것,

예수와 함께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 분을 믿으면 이 영생을 얻는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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